임 광 규 (변호사)
우리는 자고로 명분을 너무 좋아한다. 명정언순(名正言順)이면 그것으로 좋겠으나, 명분 고집하다 나라 망치고 명분의 주술(呪術)에 묶여 백성이 골먹어온 것이 우리역사의 전통인 것을 어찌하랴. 정묘년(1627)에 만주족 기마대의 파괴력을 목견하였으면, 이를 격파할 무기와 전술에 주력하든지 아예 만주족에 협조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할 것 아닌가
우리의 선조들은 숭명(崇明)의 대의를 위해 9년간 명분을 토론하다가 병자년(1636)에 나라는 패하고 수많은 백성이 짖밟혀 죽었다. 기해년(1785)부터 조상을 기억하는 제례(祭禮)를 놓고, 하느님에 거역하는 우상숭배라고 믿는 순교자적 명분과 제사도 안지내는 무부부군(無父無君)의 무리라고 확신하는 조선조정의 삼강오륜 명분 때문에 2만명 이상의 순량한 백성들이 사형당하거나 죽어갔다.
100년만에 그렇게 백성을 죽일 일이 아니라는 조정의 결론이 났고, 150년이 지나서는 로마교황청이 동양의 전통제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어 그렇게 반대할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1949년의 이북실권자가 이남애국자들을 평양으로 불러다가 들러리로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명분에 모든 것을 거는 분들에게 좌든 우든 동포끼리 합작하고 분단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명분의 미끼를 던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피 압박민족의 비애를 삼키면서 독립투쟁을 실수없이 이끌었고, 1945이후 혼돈과 전란와중에서 나라의 진로를 확고히 세우고 굳게 지켜온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 규탄하던 많은 명분들은 실상 따지고 보면 대안들이 못되는게 대부분이었다. 일찍 은퇴하기를 거부한 것들만 빼고서. 보릿고개와 제3세계의 비참을 벗어나려고 증산, 수출, 건설에 매진하던 박정희 장군은 민주주의 대의명분을 내세운 반대자들의 문제점을 간파하였다. 그러나 더 나아가 민주주의 기능을 과소평가 한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였고 명분을 반대자들에게 빼앗겼다.
30년간 민주주의 대의명분 하나로 선전조직을 가동해온 반대자는 집권에 성공하자 계속하여 명분을 서로간으로 반복하면서 나라경영을 해 나가면 괜찮으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민족통일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기만 하면 우리헌법을 훼손하여도 무사히 넘어 간다는 것을 간파한 과격운동단체들의 단골메뉴는 통일세력의 자임(自任)이고 반 통일세력의 규탄이라는 명분이다.
우리는 지금 상호모순되는 명분들을 함께 모시고 있다. 모순되는 것들을 다 모시면 전부 잃어버리게 되는 평범한 사리가 통하지 않는다.
구조조정의 명분도 세우고 싶고 근로자 직장보호의 명분도 동시에 지키고 싶다. 퇴출 은행 직원들의 딱한 사정을 최대한 수렴하여 대리 이하를 전부 재고용토록 하는 따뜻한 명분을 세워야 하겠고 동시에 인수은행의 수익성유지의 명분도 잃기 싫다. 그래도 인수은행은 우량은행 평급을 계속받게 될 수 있는가.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들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명분을 잃어서는 안된다. 아울러 국민세금부담인 생산성 낮은 정부나 공공기관의 절약과 효율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공약은 후퇴한 일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바람보다 좋은 이솝의 햇빛을 명분으로 하여 반 국가단체로 부터도 호감을 받으면서 동시에 우리 체제를 훼손한 쪽은 그만큼 이상의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국가안보 메커니즘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선인들이 17세기부터 실사구시(實事求是)하자고 주장한지 400년 가까이 되어간다. 금년 7. 17.은 우리「삶의 시스템」인 헌법제정 50주년이다.
헌법은 이미 결정되어 있어서 그 내용을 밝히기만 하면 된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우리헌법은 매일, 매달 입법되어가고 있다. 이「삶의 시스템」을 매일, 매달 조정하는 과정에서 명분에 심하게 집착하는 우리의 낡은 소프트웨어를 이제 돌아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