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언론,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국민투표"가 큰 화제꺼리로 떠올랐다. 이 문제는 김대통령이 10.9 한나라당총재와의 영수회담에서 "국민투표를 하게 될 상황이 생길 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데서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투표에 관한 논란이 예상외로 크게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청와대는 즉각적인 진화작업에 나섰다. 박준영 청와대대변인은 김대통령의 국민투표론이 "먼 훗날얘기"에 대한 "수사(修辭)"론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라고 하면 국민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국민투표는 엄청난 국가적 대사이다. 국정의 총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이 그러한 중대사건을 "먼 훗날"일에 대한 수사론적 얘기로 다루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나라당의 당무회의에서는, "김대통령의 국민투표론이 상징적 차원에서의 원칙론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이회창총재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당 중진들이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관하여 뜨거운 논의를 교환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현재 한반도의 정치상황이 미묘한 국면을 맞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김대통령이 언명한 국민투표론은 깊이 검토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러한 견지에서 이 점에 관한 몇가지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헌법상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이다. 하나는 헌법개정을 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대통령이 중요정책을 결정하는 경우이다. 헌법을 개정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헌법 제 130조 제 2항). 그러나 대통령이 중요정책을 결정하는 경우의 국민투표는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서 그 실시여부가 좌우된다(헌법 제 72조). 그러므로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는 김대통령이 언급한 국민투표가 위 두 가지 경우중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김대통령의 "국민투표"가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고 본다. 첫째로 헌법개정을 위해서는 재적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 정족수의 충족은 현재 여야의 국회의석비율로 봐서 참으로 힘든 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 여태까지 헌법개정논의나 그를 위한 준비절차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봐서 대통령의 독단적인 헌법개정발설은 불가능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헌법 제 72조(중요정책의 국민투표)의 국민투표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요즘 온 국민의 관심과 걱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소위 의약분업분규의 해결책 결정을 위한 국민투표인가? 아니면 지금 한창 시끄러운 퇴출기업(정리기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퇴출"은 스스로 물러난다는 뜻이다)의 결을 위한 국민투표인가?
둘 다 아니다. 국민투표의 대상이 되는 대통령의 중요정책은 "외고, 국방, 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헌법 개정이 아니면서 국가안위에 관한 사항으로 국민투표의 대상이 될만한 중요정책이 무엇일까?
최근 한반도통일방안에 관한 논란이 새삼스럽게 언론과 여론 그리고 학술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논란은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느슨한(낮은 단계의)연방제"와 김대통령이 주장하는 "국가연합"이 동일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정체론에 관한, 해석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문득 우리는 이러한 가정을 해본다. 김대통령이 자신의 국가연합체제의 채택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이 가정이다. 이것은 헌법 제 72조가 규정하고 있는 "통일"에 관한 대통령의 "중요정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논리의 전개는 바로 실질적 헌법논리로부터의 반격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그 반격이란 바로, 낮은 단계의 연방이든 국가연합이든, 그것은 국가정체에 관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정체에 관한 결정은 "헌법"사항이다. 그러므로 "낮은 단계의 연방제"이든 "국가연합"이든 남·북의 협력정체를 구축하려고 하면 그것은 "헌법개정"을 통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이 말한 "국민투표"는 "헌법 제 72조"의 국민투표가 아니고 "헌법 제 130조"의 국민투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러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느슨한 연방제"와 "국가연합"에 대한 남북의 합의와 양해는 이미 6.15 남북정상의 공동선언 당시 이루어 졌으므로 헌법개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예상되는, 위 반론의 요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에는 무서운 독소적 논리가 숨겨져 있다. 국가정체에 관한 문제가 헌법사항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서, 국민들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아니한 채, 헌법개정을 거쳐야 하는 남·북 협동체제에 관한 사항을, 혼자서 임의로, 결정한 것으로 된다. 이것은 중대한 월권행위가 아닐 수 없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국가연합"에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헌법론적인 문제외에, 보다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가 내제하고 있다. 그것은 연방제이든 국가연합이든, 연방과 연합을 구성하는 지방정부나 국가가 동일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제군주제 국가와 민주공화제국가가 연방이나 국가연합을 이룬 일이 없었다. 전체주의독제체제국가와 자유체제국가, 또는 공산주의 국가와 자유민주제 민주주의 국가가 그렇게 한 일도 없었다. 이 말은 북한과 우리사이에는 연방이든 연합이든 협동체제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전례없이 다른 체제-그것도 50년간 원수로 대결했던 남과 북-가 갑자기 연방이나 연합을 이룬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많은 나라가 이것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와 노력 그리고 피와 땀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 안일하고 조급하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는, 아무리 통일이 소중하다고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 없는 통일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하는 역사적 소명을 엄숙히 실천해 나가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다른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최고지상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진우 (변호사)
[이 글은 헌변의 공식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