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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

제목 제주 4.3 사건과 오늘의 쟁점
등록일 2003-12-23 조회수 14639

- 새정치국민회의 4.3특위 2차공청회를 중심으로 -

조 남 현 (우남회보 편집주간)

1. 제주 4.3사건의 개요

1) 3.1 사건에서 4.3까지
  일반적으로 제주 4.3사건은 이보다 1년전에 일어난 3.1사건으로부터 설명된다. 이는 제주 4. 3사건이 1948년 4월 3일이 아니라, 그보다 1년전인 1947년 3월 1일부터 시작된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해방 직후부터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저술이나 증언을 종합해보면 해방직후부터 제주도는 좌익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선 45년부터 46년까지 세워진 27개 학교와 다수의 강습소를 통한 '교육', 곧 '의식화'가 토대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예가 조천중학원인데, 자본론과 공산주의 운동사 등이 교재로 쓰였다. 이 학교 교사들 대부분이 4.3사건의 주역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또 학생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까지도 포괄 하는 광범위한 조직화가 이루어졌다. 이같은 배경하에서 3.1사건, 그에 이은 4.3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음은 제주도 4.3연구소가 발간한 <이제사 말했수다 4.3증언 자료집>에 나오는 당시 조천중학원 학생의 증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당시 중학원에는 세포가 있어. 그러믄'도당'에서 명령이 내려오주 "언제 어디에 무슨 삐라를 붙이라. 시위를 허자"허는 명령이 내려오매(오거든)우리한테도 그 세포를 통하면 명령이 떨어지는디 안헐주가 없주게. 만약 명령에 안따르면 비판이여, 뭐여 해야 되니까 삐라를 만들어, "미군정 물러가라, 이승만 물러가라"(중략)1학년에 입학 허믄 '세포'로 가입허게되는디 거의 모든 학생이 가입하게 되주 그런데 자기선밖에 몰라 누게가 무얼하고, 어느선인지 세포가 되는건 당원이 되는 거난 서로덜 신원보증을 서주면서 가입허는 거주(중략) 다덜 가입했주. 수업을 받다보면 연락이 오매. 오늘 밤 어느 집 앞에서 '강돠가 있덴(있다고)'허는 거기를 가서 보믄 고만고만 다 아는 얼굴들이 대여섯 앉아있고 상부에서 사름이오는 디...(중략) 몇 개월쯤 학습허단, 46년 가을쯤 어디로 오캥 하연게...교대로 두 사름씩 보증을 선 입당을 헌거라



  1947년 2월 하순 경찰은 남로당이 총 파업과 함께 대규모 시위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패트리지 군정법무관이 주재한 관계관 회의에서 직장 단위의 기념행사 외에 일체의 3.1절 기념집회 금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남로당은 집회를 강행했다. 당시 남로당 중앙은 3.1절 기념을 무기 휴회에 들어간 미.소공위의 재개투쟁과 결부 시킬 것을 지방에 지령해 놓고 있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 대규모 군중이집결했다. 이는 남로당의 조직적인 동원에 의한 것이다. 남로당은 광범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선전선동과 함께 협박까지 해가며 대중을 동원시켰다.

  집회는 곧 시위로 이어졌고, 이때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다. 시위대에 포위된 경찰의 발포로 4명이 사망하고, 수명이 부상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강동효 제주경찰 서장이발포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이후 남로당 외곽 조직이 총동원된 가운데 총파업, 좌익에 의한 경찰관 살해, 대대적인 검거선풍 등 제주도는 계속 혼란의 와중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중순이 되면 남로당 및 외곽조직의 한라산 입산이 시작된다. 이는 남로당의 본격적인 무장투쟁 4.3사건이 예고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2) 사건의 전말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경 한라산과 제주지역 89개 '오름'에서 일제히 봉화가 타오름과 동시에 좌익 부장대의 경찰지서 및 우익인사들의 집에 대한 습격이 개시된다. 이들은경찰이나 우익인사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다.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4월 3일부터 29일 까지 무장 폭동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찰피살 9명, 양민피살25명, 폭도피살 12명, 신원불명 피살 19명, 경찰부상 10명, 민간인부상 62명, 폭도부상 5명, 경찰행방불명 3명, 민간인 행방불명 3명, 민간인 가옥파괴 12채, 경찰 가옥파괴 9채. 이를 보면 좌익 무장폭도들의 일방적인 공세가 한동안 계속되었고, 경찰은 방어적인 대응에서 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군정 당국은 우선 선무공작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무장폭도들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오히려 거세져 갔다. 특히 5.10선거가 다가오면서 더욱 극렬해졌다. 5.10선거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치러져 투표율이 극히 저조해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의 경우 무효 처리되었다. 5.10선거를 앞둔 6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 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중령으로 교체된다. 이어 선거가 끝나고 드디어 토벌작전이 본격화된다. 그러나 역시 초기에는 토벌작전이 순조롭지 못했다. 당시 9연대에는 많은 좌익세포들이 침투해 있었다. 이 때문에 정보가 누출되거나, 집단탈영 사태까지 벌어져 진압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본토로부터 지원병력이 도래하고, 10월 11일 제주도 경비 사령부가 설치된다. 그러나, 완전 진압이 이루어지는데는 장장 6년여의 기간이 소요되었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2. 제주 4.3사건의 성격 규정

  제주 4.3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간 계속 논란이 되어 왔고, 공산폭동론과 민중항쟁론이 대립해 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전통적인 입장은 물론 4.3은 공산폭동이라는 것이다. 민중항쟁이라는 주장은 수정주의 사관에 입각한 것으로 80년대 이후 제기되었다. 수정주의에 입각한 논자들은 제주 4.3뿐만 아니라 그간 한국 현대사 전반에 대한 해석에 있어 기존의 시각을 완전히 뒤바꾼 주장을 제기함으로써 특히 젊은 대학생들의 역사 인식에 악영향을 미쳐왔을 뿐 아니라 좌익 운동권의 세력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그간 6.25에 대해서도 북한군의 사전 계획에 의한 전면 남침이 아니라 옹진반도에서 시작된 전쟁이 점차 전 전선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을 펴며, '조국통일전쟁' 이니 '민족해방전쟁'이니 하는 주장을 펴왔다. 이들의 성향을 엿볼수 있는 것중 하나는 이들이 애써 북한군의 '남침'이라는 용어대신 '남하'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이런식이다 보니 이들의 눈에는 전통적인 역사인식은 모조리 그릇된 것이고 관제어용적인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영남 10월 폭동, 심지어 여수, 순천에서의 14연대 반란 사건까지도 '민중항쟁'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으로 물의를 빚었던 그간의 일들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쉽게 그 배경을 알 수 잇을 것이다. 제주 4.3사건을 '민중항쟁'으로 규정 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정주의 사관에 의한 저술들은 그러나 지금와서는 모두 휴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구 소련의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이들의 주장이 사실에 기초한게 아니라 자신들의 인식의 틀에짜 맞춘 것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영남폭동만 해도 그들이 주장한 것처럼 '민중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소련의 조정과 자금지원이 뒷받침된 것이 스티코프 비망록에 의해 입증되었다. 물론 6. 25역시 기존의 주장과 시각이 정확한 것이었음이 이제는 여지가 없게 되었다. 제주 4.3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명백히 공산폭동이다. 민중항쟁론의 경우 면밀히 분석을 해보면 말 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난 9월 28일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새정치국민회의 4.3사건진상규명특위 주체 공청회에서 주제발표자로 나선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가 이 사건을 양민학살로 규정하는 주장을한것이다. 그는 단지 희생자의 수가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전후사정은 가리지 않은 채 양민학살로 규정하며,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사건으로 주장하기까지 했다. 물론 4.3의 진압과정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초토화 작전을 전개 했다는점부터 그렇다. 때문에 억울한 희생자가 다수 발생한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주장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이 사건의 성격 자체를 양민학살로 규정하려는 것은 안될 말이다. 제주 4.3사건을 잘보면 보복이 되풀이된 흔적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진압의 전 과정이 다그렇다고 할 수 는없지만 적어도 무고한 희생자가 대규모로 발생한 것과 보복의 악순환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부분은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인데, 문제는 그런 전후의 상황은 거두절미한 채 무조건 '한국판 킬링필드'라는 식으로 몰고 가려는 태도에 있다.

3. 무엇이 문제인가

  국민회의 4.3특위가 추진하는 제주 4.3의 해결 모색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4.3희생자에 대한 해결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우선 국민회의 4.3특위는 모든 것을 거두절미한 채 제주 4.3사건을 해결하려는 것 자체가 이 나라 건국주도세력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서중석교수가 주장한 대로 4.3이 양민학살 이므로 국가가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경우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심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인제공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나타난 결과만을 놓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도 문제다. 분명 4.3은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다. 때문에 가장 큰 책임은 공산세력에 있다.그럼에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간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과잉진압만을 문제삼아왔다. 또 공산폭동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말해도 흑백논리라고 비난하는게 보통이다. 국민회의 4.3특위 공청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제발표자나 토론자들은 한결같이 공산폭동 주장을 흑백논리라며 백안시 하는 태도를 취했다.

  또, 한가지 문제는 문제 해결의 순서가 잘못 됐다는 점이다. 억울한 피해자 명예 회복이됐든 보상이 됐든 그건 어디까지나 진상규명 및 성격규명이 선행되었다. 그 사건이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보상도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제주 4.3의 경우 광주민주화운동과는 문제의 본질이 다르다. 다른 성격규정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안될 이유는 없다. 다만 이 경우도 희생자 유가족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노인이나 어린아이 등 명백하게 억울한 피해자임이 드러나는 경우가 아니면 사실 정밀한 진상규명 없이 억울함 여부를 가리리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때문에 정확한 진상규명과 성격규정은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무시된 채 성급하게 보상을 위한 특별법에만 매달린다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칫 대한민국의 정통성만 훼손될 우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