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종 찬 (자유기업센터 연구원)
최근 들어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문제를 둘러싼 노사간의 갈등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노동계는 사용자가 노조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2002년부터) 사용자를 처벌하도록 돼 있는 "노동조합 및 노사관계법"의 관련 조항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경영계는 이 조항을 그대로 유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노동계는 동계(冬季)투쟁을 선언하고 있고 경영계는 정치활동도 불사하겠다고 합니다. 노사정위원회가 나서서 중재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은 것 같습니다.
문제가 어렵고 복잡할수록 원칙을 생각해 보고 그것에 입각해 해결책을 찾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노조전임자 임금지급에 관한 원칙은 과연 무엇일까요?
임금은 근로의 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은 근로의 대가로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무노동 무임금(無勞動 無賃金) 원칙입니다. 이것은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근본적, 보편적 원리 중 하나입니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노조원의 권익을 위해서 조합원 스스로 결성한 단체입니다. 따라서 노동조합을 위해서 일하는 전임자의 임금은, 그 근로를 제공받는 노조원에 의해서 지급돼야 합니다. 이것이 노조전임자에 관한 무노동 무임금 원칙입니다.
물론 노동조합이 노조원들의 권익을 위해서 일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 계층을 대변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노조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용자가 노조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해야 할 이유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노동조합의 사회적 기능이 그렇게 크다면 노조전임자의 임금은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또 노동조합이 노무관리 등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사용자가 노조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적어도 부당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용자가 임금을 지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근로행위는 어디까지나 근로 계약상의 노동행위입니다. 따라서 사용자가 요청하지도 않고,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노조를 누가 보호해야 하는가
노조전임자의 임금지급에 대해서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하면 소규모 노조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며, 이는 단결권을 보장한 법정신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노조 전임자를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의 부담으로 전임자 임금을 지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행 노동관계법에 노동조합비 징수의 상한이 철폐돼 있으므로 노조원들이 합의하여 조합비를 인상해 전임자 임금을 충당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98년말 우리나라 임금근로자에 대한 직접 비용은 141만5천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조합원이 100명인 소규모 사업장이라도 조합비를 급여의 2∼3%로 인상하면 1인의 노조전임자를 두고도 일정한 노조사업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 방법 외에도 노동조합을 적은 비용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전임자의 임금을 지급하는 문제는 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단결권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단결권은 근로자들이 단결하여 사용자와 대등한 교섭과 쟁의행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용자의 지원이 없을 경우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노동조합에 대해서 사용자가 전임자 임금을 지급하게 되면 해당 노조의 자주성이 불가피하게 약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노동조합의 보호 문제는 어디까지나 노조원의 몫입니다. 사용자가 노조를 보호해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법이 단결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사용자가 노조의 설립이나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자율적으로 처리할 문제인가
노동계에서는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를 노사간에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형식상 이런 주장은 상당히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98년 3월에 발간한 "단체협약분석(II)"이라는 자료에 의하면 조사대상 기업의 단체협약 중 전임자의 대우에 관한 규정이 있는 협약의 94.7%가 회사에서 전임자의 임금을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회사들이 자율적으로 전임자의 임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경제단체협의회에서 발간한『1999년 단체협약 체결 지침』이라는 책을 보면 현행 노동법과 노동부의 법해석에 근거하여 노조전임자에 대한 총 지원규모를 매년 20%씩 줄여나가되 가능하면 전임자 수를 줄이도록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단체협약에 관한 경영계의 입장은 노조전임자에 대한 임금을 지급 허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체결된 단체협약의 대부분에서 회사가 전임자에 대한 임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노동조합이 사용자를 상대로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을 강제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용자는 그것을 수용하기 싫어하면서도 단체교섭의 체결이 지연되거나 쟁위행위가 발생하는 것을 우려하여 어쩔 수 없이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를 노사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사용자를 압박해서 지금까지의 관행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금지하는 나라가 없다?
노동계에서는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을 금지하는 법규정을 두고 있는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왜곡된 주장입니다.
먼저 우리나라와 같은 기업별 노조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사용자가 노조전임자에 대한 임금을 거의 지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노사정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는 "(일본의) 경비원조에 관한 각종 법규정과 노동성통첩, 판례 등을 종합해 볼 때 ··· 전임자에 대한 임금은 노동조합의 재정에서 거의 전적으로 지급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우리나라의 기업별 노조임원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은 사업장 별로 노조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직장위원(shop steward)인데, 이들이 노조업무에 사용하는 시간은 주당 평균 6시간이며, 선임직장위원의 경우에는 주당 10시간인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1995년). 이 시간에 대해서는 사용자가 근로시간을 유급으로 할애해 주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노조 업무만을 수행하는 노조전임자가 존재하는 사업장은 전체 사업장의 2%에 불과합니다(1990년).
프랑스의 경우 법적으로 노조전임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노조대표에 대해서 월(月)단위로 10시간에서 20시간의 근로시간면제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조전임자에 대해서 사용자가 임금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대규모 공공부문에서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독일에서는 종업원 평의회라는 것이 있고 여기에는 평의회 업무만을 전담하는 전임자를 두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업원 평의회는 노동조합이 아니고 종업원의 대표조직,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노사협의회와 비슷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노조원뿐만 아니라 비노조원, 관리직 직원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따라서 종업원 평의회의 전임자를 우리나라의 노조전임자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독일의 사업장 내에서 노동조합의 업무만을 주관하는 사람은 노조신임자(Gewerkschaftliche Vertrauensleute)이며, 이들에 대한 임금은 노동조합의 재정에서 충당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사례를 볼 때, 외국에서 노조대표들에게 제한적으로 근로시간을 면제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노사관계에 있어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정도이며, 기본적으로는 노동조합의 운영을 노조원이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을 금지하는 법규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수많은 전임자에 대해서 사용자가 타율적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관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외국의 사례는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규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바람직한 제도를 정착시켜야
지난 97년 3월에 여야간의 합의로 통과된 노동법에서 사용자의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을 금지한 것은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바람직한 노사관계의 원칙을 세웠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법은 그대로 유지돼야 합니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합니다.
제도가 경제성과에 주는 영향에 대해서 연구한 공로로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노스(D. North)는 "잘 규정된 재산권" 제도가 경제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임금이 노동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도록 하는 제도는 기업과 근로자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사유 재산권 제도의 한 형태입니다. 이러한 제도가 무너질 때, 그 사회는 적지 않은 비용을 치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노동계가 노조전임자 문제에 관련된 법 조항만은 기어이 개정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추진하는 방법은 입법기관인 국회에 청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회 내에서 합리적인 토론이 이뤄지고,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여 법개정 여부가 표결로 결정돼야 할 것입니다. 현재와 같이 길거리에서 투쟁을 벌이는 것은 경제원리는 물론,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리까지 무너뜨리는 비생산적인 활동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직이 비생산적인 활동에 노력을 쏟을 때 결국 그 사회는 빈곤해 진다고 지적한 더글라스 노스 교수의 경고에 귀 기울일 때입니다. ♠ (발췌: 자유기업센터발행 Opinion Leaders Digest / No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