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경제

제목 우리 헌법의 경제 질서
등록일 2003-12-23 조회수 20388
경제질서의 의의

  인간이 공동생활에서 평화와 협동을 통해 공존공영을 실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행위와 생활에 관한 사회질서가 형성되고 기능하여야 한다(E.Eucken의 경제 질서론 참조). 그리고 이 질서는 인간의 양심과 이성, 자율적인 사회도덕, 그리고 강제적인 국가법제 등 각종 사회규범에 따라 형성된다. 국민경제의 질서형성에서는 경제체제(economic systems)를 제도적 기반으로 하고, 기업(대·중·소), 근로자 및 소비자 등 경제주체들의 경제활동이 집합하여 공동체 경제질서를 형성한다.국제경제의 경우에도 이치는 같다.

  1990년대 초에 동서냉전이 일단 끝나고 1995년 1월 WTO체제가 출범하면서 시장개방과 자유경쟁의 신경제질서가 형성·기능할 것으로 크게 기대되었다. 그러나 국가주권의 주장과 민족문화의 갈등 속에서는 국가간·기업간 공정경쟁과 국제협력의 질서는 형성될 수가 없고 힘에 의한 무한경쟁만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근세초에 중상주의 경제의 중압을 벗어나 자연법적인 자유주의경제를 실현하려던 A.Smith의 꿈은 다시 한번 좌절을 맞게 된 것이다.

  근대의 자연법사상은 사유재산의 보장과 영리활동의 자유를 천부인권으로 인정하여 경제적 자유와 창의를 촉진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공전의 번영을 가져왔다. 그러나 자연법사상과 기독교문화의 궤도에서 일탈한 서구자본주의의 무한경쟁은 마침내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이라는 자본주의경제의 질서형성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잇다른 경제공황과 만성적인 대량실업 및 인플레이션과 같은 경제위기가 내습 하고 빈부격차와 노사대립 등 사회위기가 닥쳐도 시장경제는 속수무책 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수정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Weimar 헌법체제, Keynes 등의 완전고용을 위한 정부개입, 미국의 New Deal입법 등 혼합경제체제와 자본주의 타도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체제가 세계에 등장하였다. 제2차대전 후 오랜 냉전이 종식되면서 계획경제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으나, 자유와 창의를 기본으로 하는 시장경제의 질서정착은 아직도 요원한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 해결의 근본적 열쇠는 경제적 자유와 창의를 올바른 사회규범을 통하여 어떻게 선용(善用)할 것인가 하는 법치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자유와 창의의 존중

  우리 헌법 제119조 1항에서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기본경제질서의 바탕이 되는 제도가 제23조의 재산권보장과 제15조의 직업선택(영업활동)의 자유이다. 이 두 기본제도는 근대 서구의 시민사회에서도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촉진하여 자본주의사회를 번영에로 이끈 주역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제질서에서 자유(自由)의 의미와 내용은 자명한 것 같다. 우선 개인과 기업의 자유는 타인(정부나 권세자)으로부터 타율적 압력이나 간섭을 받지 아니할 소극적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I.Kant는 자기의 양심과 이성(理性)에 자율적으로 따르는 적극적 자유를 높게 평가하였고, 주권자(主權者)인 전체국민의 공동체의 형성에서도 이런 자유가 요구된다. 자유방임의 경우에도 이런 적극적 자유는 그 남용을 자율규제한다.

  그런데 우리 경제질서에서 창의(創意)는 거의 불확정개념에 가깝다. 사전상 의미로는 창의는 새롭고 발전적인 가치·제품·방법 등을 발견하고 제조하려는 정신과 의지를 말한다고 해석된다. 우리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에서의 창의를 규정한 것이므로, 여기서의 창의는 타인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고 공익을 증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공정거래법 제1조에서는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여 창의적 기업활동을 조장"한다고 규정하여, 창의적 활동의 수단으로 공정경쟁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와 창의를 존중(尊重)하는 경제질서는 정부의 정책과 입법에 의해서만 아니라 시장에서 민간경제주체들의 계약과 거래활동에 의해서도 형성되고 기능한다. 그리고 자유와 창의의 존중은 소극적인 침해의 금지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우대와 보상도 의미한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정당한 기술개발, 경영혁신 또는 시장개척 등에 의한 이윤 극대화 경쟁은 정부와 시장으로부터 우대와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정경유착, 관치금융, 허위광고, 불공정거래, 독과점조작 등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행위와 관행은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경제질서를 형성할 수 없다.

  자유와 창의의 질서형성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직업윤리의 재건과 실정법의 개혁 외에도 오늘날 과도하게 세분화·전문화된 정치학·경제학·법학 등 사회과학을 학제적(學際的) 방법으로 공동연구·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국가의 규제와 조정국가독점 내지 금융독점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에서는 개인간·기업간의 경쟁이 무한경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어 공정경쟁과 공동체경제를 외면하게 되고 시장의 자동조절기능마저 상실하게 된다.

  여기서 출현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수정자본주의의 혼합경제체제에서는 마비된 시장기능 대신에 국가의 규제와 조정(規制·調整)을 전진배치하여 작동시킨다. 우리 헌법은 자유주의적인 혼합경제체제(社會的 시장경제체제가 다수설)를 채택하여, 경제질서의 기본은 "자유와 창의"의 존중이지만, 헌법이 정하는 경제적·사회적 위기상황에서는 국가의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허용하고 있다(제119조 2항). 이는 특정한 목적을 위한 행정권의 경제정책(經濟政策)을 허용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기극복을 위한 최소한의 잠정적 조치일 뿐 그것이 경제질서의 원칙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따라서 국민의 경제적 기본권(基本權)을 국가가 제한할 때에는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법률을 제정하여야 한다(제37조 2항).행정권의 경제정책은 국가의 경제적·사회적 위기에서 시장기능만으로 극복할 수 없을 때 행정부의 방대한 조직과 인력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위기에 대응하려는 비상조치의 일종이다. W.Friedman 교수는 "국가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제공자, 규제자, 기업가 및 중재자"의 넷으로 나누면서 국가의 공급기능과 함께 민간활동에 대한 규제기능(regulator 및 umpire)을 인정한다. 여기서 규제는 [일정한 경제활동에 일정한 경제질서를 부여하기 위하여 그 활동을 금지·제한하거나 보호·육성하는 국가작용]이다.그러나 오늘날 경제적·사회적 위기의 만성적 지속으로 행정권의 경제정책은 원칙화·항구화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경제정책의 수립·시행에 대해서는 법률에 의한 행정(法治行政)의 원칙을 사전에 엄격하게 적용할 수는 없다 해도 그 공정성과 효율성에 대해서는 주권국민과 국민대표의 사후적 통제와 감독에 의해 정치적·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1997년말 금융·외환위기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정책의 실패는 수십만·수백만의 국민에게 대량실업이나 기업도산과 같은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정책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입법목적으로 정책을 수립·시행시에 관계공무원의 성실한 연구·노력과 부정·부패의 방지 등 기본적 의무를 명령하는 경제정책 절차법(가칭)이 제정되어야 한다. ♠   김영추(경성대학교 법정대학 교수/헌변명예회원)

[이 글은 헌변의 공식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