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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자유

제목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운동과 민주주의
등록일 2003-12-23 조회수 17583

  4·13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경실련이 공천 부적격자명단을 전격 공개한 이래 총선시민연대와 정개련도 각각 공천반대자명단과 '유권자가 알아야 할 15대 국회의원명단'을 발표했다. 또한 단순한 명단발표로 만족하지 않고 장외집회를 열고 가두서명과 명단배포등, 낙선운동에 직접 뛰어들고 있다.

  시민단체의 이러한 적극적 선거법불복운동이 노동단체이외의 다른 단체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 87조를 개정하는 성과를 일구어내기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시민불복종운동에는 간디나 소로우(H. D. Thoreau), 및 마틴 루터킹 목사 등의 경우에서 현저하게 목격되듯 자못 비장함과 긴장감이 서려있게 마련인데, 이번 선거법불복종운동에는 대통령과 여당이 선뜻 지지하고 나서고 여론의 뒷받침을 받게됨으로써 핍박받는 의로운 운동보다는 하나의 시대흐름으로 정착되고 있는 느낌이다.

  보스위주의 정당정치와 하향식 공천제도, 식물국회와 방탄국회, 정치개혁보다 정치개악을 일삼는 정치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야말로 시민단체의 '불법적인' 정치인 퇴출운동이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라는 그 동안의 비아냥을 떨쳐 버리고 "시민있는 시민운동"으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셈이다. 즉 낙천낙선운동의 압도적인 지지여론에는 정치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라는 시민들의 집단의사(collective will)를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명실공히 "시민있는 시민운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고언을 경청할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만에 하나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데, 감히 누가 잔소리를 한단 말인가"하는 태도가 묻어난다면, 독선적 태도로서, 시민운동의 건실한 성장과 발전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우려되기 때문이다.

공익은 발견의 범주가 아니고 결집의 범주

  그 동안 시민단체들은 소중한 시간과 정성을 투여하며 의정활동을 감시해 왔고 때로는 격렬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의회민주주의라는 공공재(public goods)산출을 위해 헌신해왔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의회정치가 책임정치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국회의원은 과연 누구에게 책임을 지는 존재인가 하는 화두(話頭)를 이 시점에서 던질 필요가 있다.

  다원주의를 표방하고있는 민주사회에서 시민단체들만이 국회의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특권적 존재는 아니다. 일반 이익단체나 사회집단도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민주정치를 '정치시장(political market)'의 범주로 접근한 슘페터(J. Schumpeter)의 통찰이 유의미하다면, 이익단체라고 하여 '정치적 생산자'인 국회의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자격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공익뿐 아니라 사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의 정당성을 인정하는데 인색치 않은 사회가 민주사회인 까닭이다, 여성단체들도 여성비하발언을 한 국회의원에게 준엄한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의사단체나 약사단체도 각기 자신들의 이익제고에 극적인 국회의원들에게 거부권을 행사할 만하다.

  물론 한 이익단체만이 독점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면 민주주의에 심각한 걸림돌이 되겠지만, 다수의 이익단체들의 경합이 보장되는 이상, 공익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다. 사익의 치열한 경쟁이야말로 결코 '카오스(chaos)'의 상태가 아니며, 적어도 공익이 출현할 수 있는 필요조건은 된다고 생각된다. 사익과 공익의 연계고리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민주사회에서 공익은 결과적으로 혹은 사후에(ex post) 나오는 것이지, 사전에(ex ante) 혹은 선험적으로(a priori) 규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발견'의 범주가 아닌 '결집'의 범주로서 공익을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혜택이 분리가능한 사익(divisible benefits)에 집착하는 이익단체에 비하여 혜택이 분리불가능한 공공의 이익(indivisible benefits)을 추구하는 시민단체의 위상은 신선하며, 이 점에서 시민단체들의 도덕성은 높히 평가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시민단체들의 목소리는 존중되어야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국회의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는 충분하다.

  그들의 의로운 목소리가 경청자가 별로 없는 외로운 목소리가 되서야 하겠는가!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시민단체도 민주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임의 단체들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 정치인들의 평가를 독점하거나 모든 유권자들의 의견을 대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시민단체들만이 의정활동평가를 독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 시민단체에 의해 '낙선대상'으로 낙인찍힌 의원이 다른 사회단체에 의해 '당선대상'으로 선정될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시민단체들이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리는 최종 권한을 가진 정치적 의사처럼 행동하거나, 낙천낙선대상의원에 대하여 "세상에 종말이 오더라도 정의가 이루어져야한다(fiat justitia ruat mundus)"고 부르짖는 정의의 사도처럼 군림하려는 태도는 부당하며, 자신들 평가의 한계와 임의성을 인정하는 겸허함이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비록 '퍼포먼스'의 수준이기는 하지만, 낙 천대상 정치인들을 분리 수거 쓰레기통에 담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치들사이의 경쟁에서 비관용(非寬容)은 민주주의에 반한다

  이와 연장선상에서 시민단체에게는 자신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있는 입법자들에 대하여도 관용의 태도가 요구된다는 점을 각별히 강조하고자한다. 왜 관용의 논리가 필요한가? 우리는 가치가 완전히 확정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며 가치가 완전히 불확정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완전한 가치확정적 세계라면 롤즈(J. Rawls)가 말한 축차적 질서(lexical order)의 세계가 될 것이며, 완전한 가치불확정적 세계라면 다수의 실존주의자들이 조망한바 있는 자유방임적 세계가 될 것이나, 우리의 다원적 민주사회는 오히려 가치가 부분적으로 확정적이며 또한 부분적으로 불확정적인 세계에 근접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가치가 부분적으로 불확정적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다툼보다 '선과 또 다른 선'의 다툼이 현저하다.

  선과 선이 다툴 수 있다는 현상은 일견 이상하게 여겨질는지 모르나, 여성의 미인(美人)대회를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미인대회에서 입상을 다투는 미인들의 경쟁이 불꽃튀는 경쟁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가치의 부분적 불확정성을 감안할 때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의 판단은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독일점령하의 어느 날 파리의 한 청년이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사르트르를 찾아왔다. 그의 고민은 레지스탕스운동에 참여할 것인지 혹은 늙은 어머니를 모실 것인지,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문제의 상황은 충(忠)의 가치와 효(孝)의 가치가 경합하는 상황에 비견될 만큼 심각한 선택의 딜레마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사르트르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어떤 대안을 선택해도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 경우 두 가지대안의 가치는 엇비슷한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2분법의 편협성

  유달리 우리시민단체들은 정치·사회·경제 각 영역에서 개혁을 강조해왔고 따라서 '개혁'과 '반개혁'의 이분법을 선호해왔다. 그러나 '개혁'과 '반개혁'의 이분법은 '선'과 '또 다른 선'의 다툼현상을 조망하는 데 대단히 미흡하다고 생각된다. 실상 우리사회에서 '선과 또 다른 선'의 다툼으로 투영되는 경우는 국가보안법개정문제, 개혁입법문제 등 적지않기 때문이다.

  국가의 안보와 인권의 가치가 경합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경우, 양자는 공히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사안들은 미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묵은 논쟁, 즉 총기판매찬반논쟁 혹은 임신중절찬반논쟁, 안락사논쟁, 사형제도폐지논쟁등의 범주를 방불케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범주의 사안이라면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직접 가늠하기보다는 유권자들 판단의 몫으로 남겨두는 편이 타당하다. 경합적인 가치갈등의 사안에서조차 입법자로서 국회의원의 재량권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반개혁주의자', '반인권주의자' 혹은 '반민주주의자'등으로 매도한다면, 모든 갈등을 '선과 악'의 다툼으로만 파악했던 고대 마니교도들의 경직된 태도나 오늘날 이슬람의 근본주의자들의 태도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 박효종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이 글은 헌변의 공식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