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안보

제목 우리민족의 선택은 복합적이었다
등록일 2003-12-23 조회수 14085
변호사 임 광 규

1. 서기 994년이면 우리의 고려 성종 13년이고, 중국대륙 남부는 문화의 꽃을 피고 풍요로운 송나라 태종의 치세였으며, 중국대륙 북방은 강대하고 호전적인 몽고족 글안의 성종이 통지하고 있었다.

글안세력은 이미 송나라를 여러차례 격파하고, 그때까지 송나라와 선린을 맺고 송나라 년호를 쓰던 고려에 대하여 남으로 압박을 가하고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고려가 취한 전략은, 정확한 정보에 터잡아 글안에게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결하여 그 총사령관 소손령을 안융진에서 사력을 다해 격파한 다음, 이듬해부터 송나라 대신 글안의 년호를 써서 몽고족에게 천자의 위신을 세워주는 형식의례의 대가만 치루고, 실질적인 문물은 송나라와 교역하는 독자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런데도 글안은 고려를 침공하는 테스트를 여러번 했으나, 끝내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압록강 넘어 성을 쌓다가도 고려의 항의를 받으면 성을 헐고 대신 고려왕에게 명목적인 자기나라 신하의 직함을 주는 형식의례로 만족해야만 했다. 당시 고려는 문신들과 하급관리도 항상 활쏘는 훈련을 받았고, 전사한 장병의 가족에게 최대의 영예와 보상을 주었다. 야만세력과 문화세력을 이웃해서 반도의 지정학속에 살아가는 그때의 모습은 형태만을 달리할뿐 지금까지 우리역사의 끊임없는 도전이었다.

당시 북방의 야만세력은 군사력이 강했고 서쪽바다 건너의 문화세력은 풍요로웠으므로, 고려의 전략은 힘을 바탕으로 강한 야만에 대해 사력을 다해대항하고 풍요로운 문화를 흡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2. 1884에 조선조의 지식인들은 동남부 일본의 야만과 신문화선진을 겸한 세력에 접하였다.

일본의 야만성을 보지 못하고 신문화선진에만 눈이 팔린 김옥균, 박영효 등 젊은이들이 일본의 야만과 제휴하여 살인구테타로 당파싸움을 해결하려다 일본으로 도주하고, 급습당한 세력은 정보에 어두워 중국대륙의 무능하고 후진적인 군대숫자에 의존하기도 하고 서구문명의 일부라고 착각한 후진러시아에 기대해 보기도 하였다. 994년도 고려때의 투쟁정신과 슬기로운 지혜에 비하여, 1884의 조선조 지도자들은 정보가 어두워 어리석었고 힘을 바탕으로 싸우는 용기가 부족했다.

3. 1910년에 나라를 잃은 우리의 선배들은 뿔뿔이 여러세력권에 흩어져 우리에게 다가오는 야만세력과 문화세력을 각기 다르게 느끼고 배우면서 지냈다.

소련극동부와 중국동북부에 들어간 많은 한인들은 러시아혁명의 대륙야만세력에 심취하여 김좌진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를 살해하였다. 중국 중부지역에 들어간 독립투사들은 점차 야만화되어가는 대륙세력에 심리적으로 압도당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독립을 목표로 교육, 식산에 주력하던 선배들은 동양에서는 선진적인 일본의 문화와 그 야만성을 동시에 맏닥드리는 과정에서, 일본의 야만성에 눈감고 그 문화에 항복한 이광수, 최남선이 있는가 하면 일본문화는 배우되 그 야만성을 간파한 송진우, 김성수가 젊은이들의 힘을 키워주고 있었다. 태평양을 건너간 선배들은 자유창의의 문화와 강대한 힘을 겸비한 해양세력 미국과 손잡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4. 1945 해방이 되자 미국과 유럽의 해양세력과 손잡기로 결심한 이승만, 조병옥이, 패전을 하였지만 동양에서는 선진문화를 가장 많이 흡수한 일본의 문화를 배워놓은 국내의 송진우, 김성수와 제휴하고, 일본문화를 배워둔채 중국대륙에서 고생하면서 그곳의 문화세력과 교류를 두텁게 한 신익희와 제휴하였다. 소련극동부와 중국동북구에서 일본의 야만성만 제일 나쁘다고 믿고 싸운 한인들은 해양문화를 접해보지 못한 편협한 교도주의의 야만성만을 배우다가 같은 야만의 챔피언에게 숙청당해갔고, 1949 야만화가 완성된 중국대륙의 영향을 한반도 남쪽만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으니 민족감정으로 야만세력과 어떻게 타협해보자는 어설픈 임정요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역사의 뒤안길이었다.

5. 지정학적으로 외로운 한반도남부를 사수하여 문화와 풍요를 가져오겠다는 결의가 1948. 7. 17. 우리헌법 제정으로 결실되었을 때, 많은 비겁한 지식인들이 대한민국의 장래를 비관하였었다.

이승만이 동해에 이승만라인과 문화라인을 그어 일본의 잠재된 야만성에 경계선을 긋고, 대륙의 공산주의 야만을 막는 투쟁에서, 일본치하에서 야만과 문화를 동시에 배운 일정관리출신들에게 문화를 택할 개과천선의 조건으로 대한민국에게 협력하게 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동양문화의 한시(漢詩)를 보여주기도 하고 불교 조계종을 복원하기도 하면서, 자유와 창의의 자본주의를 배우게 하고, 한미방위조약을 맺어놓아, 대륙의 야만에 대한 방위투쟁결의를 다져놓은 이승만들은 역사는 아직도 충분한 평가를 못하고 있다. 1004년전 글안의 소손령을 전투로 격파한 유방(庾方)이 있고 동시에 외교의 말로 설득한 서희(徐熙)가 있으며, 이를 지휘한 현명한 고려 성종을 보고, 나라를 방위하는 대가를 치룰 준비가 된 민족의 모습을 본다.

6. 현대의 야만이란 무엇인가. 혁명의 이름으로 개인과 인권을 유린하는 시스템과 논리가 야만이다. 현대의 문화란 무엇인가. 머리속에 틀을 두지 않고 창의롭게 생각하는 것이 문화이다.

왜 요사이 야만에 심취해있는 일부 젊은 청년들이 설치는가.부모의 훈육이 부족한채, 부모나 남의 덕에 공짜로 먹고 입고 자는데 별로 부족을 못느끼면서 제멋대로 떠드는 응석받이이기 때문에 그렇다. 서기 994년의 고려청년들은 나라와 문화를 지키려고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에서 사투하다가 고향에는 용맹의 이름만을 되돌려 보낸 사람들이다.

오늘의 젊은이여 야만에 멋을 느끼고 심취해 있다면 한번 역사의 교훈을 읽어보고 좀 부끄러워할 줄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