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성명서

제목 최장집 정책기획위원장께(2차)
등록일 1998-12-11 조회수 968

최장집 정책기획위원장께

안녕하십니까
지난 1998. 11. 10. 헌법 제7조 제1항에 의하여 공직자에 대하여『알권리』를 가지는 국민의 일원으로서, 헌법을 공부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법률인들로서, 여론 앞에 귀하에게 질문함으로써 귀하로부터 양식에 맞고 구체적이며 논리적인 대답을 한 달에 걸쳐 기다려왔습니다.
도중에 귀하의 그러한 대답을 다시 촉구한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의 저서 및 논문이 대한민국의 존립근거와 정통성을 훼손하였느냐 여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편적 상식인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양식에 맞게 구체적이며 논리적인 대답 대신 간단한 부인이나 모순되는 논리들이 있어서 또다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대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귀하는『사회와 사상 1991. 여름호』중『마르크스주의의 위기, 학술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토론에서

(1)『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구좌파(old left)운동이 제도권 내에 흡수되어 정체되는 동안 환경문제, 반핵평화문제, 여성문제 등등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념이 포괄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슈들이 이른바 신좌파라는 이념과 운동의 범주내에서 발생한 것도 특기할만한 일입니다. 한가지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노동운동과 계급운동 중심의 구좌파운동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신좌파운동의 이념들과 서로 결합하기보다는, 이념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실제 운동면에서는 이 두 운동의 성격 자체가 상당히 분절적인 양상을 보였습니다. 신좌파운동이 단일 이슈 중심이다 보니 운동의 연속성, 지속성이 없어졌고 운동이 분절화되고 간헐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정통적인 계급운동, 노동운동과 결합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오히려 정통적인 운동을 약화시켰습니다. 이로써 좌파운동의 새로운 이념적 지평과 영역은 더 이상 넓혀지지 못했다는 것이 서구의 현단계 운동의 위기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28쪽)』라고 전제하고서

(2)『개인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불행하게도 원래 마르크스가 제기한 이론적 과정, 철학적 바탕 위에서 발전해나가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 큽니다만, 사실‘자본’에 나오는 명제 가운데에는 후기자본주의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부분이 많습니다.(32쪽)』라고 귀하 개인이 마르크스주의가 발전해나가지 못하는 불행을 크게 아쉬워한다고 지적하고
『물론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세계사의 발전단계와 더불어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할 만큼 발전한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나왔을 때의 19세기적인 정치적 경제적 조건,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섰을 때의 레닌 및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이론이 있고, 파시즘이 대두했을 때의 그람시, 트로츠키 등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등 정치체제의 구조적 변화들을 기초로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도 나름대로 발전했는데, 그러나 그 이상을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소련에서 레닌주의, 스탈린주의로 발전된 마르크스주의의 가정 등을 당연시했던 모든 시도들은 새로운 시대적 전환을 염두에 두면서 현대적으로 새롭게 발전시켜야 할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론이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나는 김선생님이 언급했던 그람시나 알튀세 같은 학자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새로운 시대의 마르크스주의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에 있어서도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층위들 사이의 독자성, 유기적 결합 등을 통해 총체적으로 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일찍이 플란차스도 역설했듯이 그 동안 정치적 수준의 토대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 속에서, 여태까지는 정치적인 갈등이나 권력투쟁도 모두 경제적인 모순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성이 강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화되기 이전에도, 마르크스 이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도, 즉 인간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는 예술이라고나 할까 메카니즘, 기술은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너무 자의적인 해석에만 매달렸던 점을 극복하여 앞으로는 너무 경직된 이념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더욱 폭넓고 풍요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32쪽, 33쪽)』라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풍요롭게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음

(3)『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개념은 혁명 이후 사회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생존했을 당시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여러 조건들로 인해 소련에서는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스탈린주의적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아주 단적인 예로 걸프전에서도 나타나듯이 스탈린주의에 의해 구축된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진영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미국이 저렇게 제멋대로 하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 스탈린주의가 미국의 엄청난 물리력을 견제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37쪽)』라고 말하고
『더구나 스탈린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체제 자체를 완전히 부정해버리려고까지 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이지요.(37쪽)』라고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체제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더욱 심각한 것이라고 말하였음

(4)『변화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설명할 때, 마르크스의 좁은 의미에서의 명제적인 언명들을 너무 교조적으로 따를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이론에 있어서도 마르크스주의는 더욱 발전시켜야 할 이론입니다.(41쪽)』라고 말하고 있음

(5)『덧붙여 말씀드리자면 근대사회의 대이론가로서 마르크스, 베버, 뒤르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베버와 뒤르껭은 본격적으로 부르주아사회를 분석하고 부르주아적인 이론적 가치를 수용한 이론가들 아닙니까? 가능분화, 사회의 복잡성과 그에 따라 사회가 연계되는 통합의 문제 혹은 관료화의 문제 등, 우리가 해결하기 위한 방법도 모색해왔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론 가운데에는 귀담아 들을 만한 요소가 많다고 봅니다. 그것을 다만 부르주아 이론가인 베버와 뒤르껭이 말했다는 이유 때문에 절실한 문제조차도 무시하고 지나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즉 마르크스주의라는 전체적인 틀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이론을 수용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42쪽)』라고 말하였음

(6)『학술운동의 위기란 상대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개인의 학술운동 단체에 대한 참여도가 낮아졌다. 예전만큼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가능하지만, 그 동안 대단히 보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질서가 이념적으로 천일화되고 헤게모니를 확장해나가고 있었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합니다. 근래 들어서는 이러한 상황이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국가기구의 팽창과 그 주변 연구기관의 확장, 또는 학교의 교육 커리큘럼이나 프로그램 내용도 과거보다 오히려 더 보수화한다든가 하는 현실, 그리고 새로운 젊은 세대의 진보적 연구자들이 우선은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는 현실, 즉 어떤 형태로든지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 편입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입니다. 내부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련 및 동유럽의 변화가 가져오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의 외풍도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재 학술운동은 정체기 내지는 앞으로의 새로운 변화를 위한 과도기적인 단계에 들어서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 선생님 말씀과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학술운동이나 사회과학이론은 결국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역사도 상당히 짧고 그 저변이 얕기 때문에 그동안 마르크스주의가 매우 피상적으로 연구되고 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 피상성으로 인해 외적인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는 양상을 보이면서, 최근에는 내부적인 투항주의 혹은 패배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을 공부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마치 열병처럼 퍼져나가고 또 마르크스주의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느꼈는데, 요즘에는 상당히 수세에 몰려 축소되고 위축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이러한 주·객관적 상황이나 조건들을 보면서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의 성장, 발전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과거에는 학술운동이 부분적으로 분위기와 열정만으로 이루어진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이제 안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차분하게 다시 시작해야 할 때라고 보입니다. 사실 그동안 좀 들떠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감연한 비판정신, 엄격한 이론적 훈련이 다시 강조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52쪽, 53쪽)』라고 말하고 있음

(7) 다른 대담자가『혁명이라는 먼 목표를 상정할 경우 현재의 일상적인 투쟁방식은 개량이건 혁명이건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살아남아 핌을 얻어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방법은 개량밖에 없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역량도 없으면서 혁명적 구호만 외쳐봤자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학술운동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운동이 다 마찬가지라고 봅니다.(53쪽)』이라고 말하자
귀하는『김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사회를 개량한다는 것과 사회주의 이념을 갖는다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량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거나 주장, 언명할 때는 비판당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비판 때문에 스스로가 위축되거나 심지어는 열등감까지 느끼면서, 때로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개량주의자로 몰리지나 않을까’하는 의구심과 강박관념을 갖기도 하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를 개량할 수 있는데까지는 개량해야 하며, 따라서 개량을 위한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자본주의사회를 부분적으로 개량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적 이념과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인 이념과 이상은 가지면서도 얼마든지 자본주의의 개량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53쪽, 54쪽)』라고 말하고 있음

(8) 또 다른 대담자가『부분적으로는 레닌도 “혁명과 개량의 경계는 없다”는 말도 했으며, 유럽의 구조개혁론도 가능한 한 현존의 조건 속에서 아래로부터 개량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해방 이후 40여년의 역사적 조건이나 현존의 힘관계, 물리력의 수준 등을 통해 혁명은 아직 가능하지 않다고 볼 때, 마르크스주의의 틀 안에서 본격적으로 개량주의를 사고하는 방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회혁명이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볼 때 경제적 잉여가치를 제한하고 정치로부터의 대중의 소외를 극복하는 두가지일텐데,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해석하는 과거의 전통적인 방법에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틀 내에서 개량주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54쪽)』이라고 말하자
귀하는『그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예로서 이탈리아 유로코뮤니즘과 이탈리아공산당의 역사적 역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량주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에서 보면 이탈리아 공산당이 이루어낸 성과는 엄청난 것입니다.(54쪽)』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은 곧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정치적으로 해방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으로, 이것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의식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 그와 병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55쪽)』라고 말하고 있음

(9) 위 (1)의『전제』,
(2)의『개인의견』,
(3)의『심각성』,
(4)의『발전시켜야 할 이론』,
(5)의『수용자세의 필요』,
(6)의『마르크스주의 중심전개의 차분한 재시작』,
(7)의『사회주의적 이념과 원칙을 포기하지 않은채 개량 참여할 수 있다는 것』,
(8)의『좋은 세상 만들겠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정치적으로 해방되는 세상 만들겠다는 것』등을,
전후 문맥과 함께 읽어보는 상식있는 사람으로서 질문컨대, 귀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인가요 아닌가요,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10) 1991. 여름에 말한 위와같은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그 이후 바뀐 일 있습니까.
월간조선 11월호에 대하여 귀하가 소송을 제기한 이후 해명한 것을 제외하고, 바뀐 점이 글로써 발표된 일이 있습니까.


2. 귀하는『창작과 비평 1991. 여름호』중『냉전시대 이후의 평화운동』토론에서

(1)『80년대 중반 특히 86,7년 이후부터 민족민주운동 내부에서는 군축문제, 평화통일문제, 반미자주화문제 등이 여러 수준에서 주류를 형성하면서 제기되어 왔습니다.(7쪽)』라고 전제하고

(2)『평화의 개념이나 운동을 이데올로기적인 한 실체라고 이해한다면, 이를테면 미국이 걸프전에 개입하는 명분, 여론에 호소할 수 있는 명분이란 것이 국제 평화와 안전이거든요. 그럴 때 평화라는 개념이 들어가고 안보라는 개념을 평화라는 개념과 붙여서 쓴단 말예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로 평화를 파괴하는 반평화적인 정책이 미국에 의해 수행되고 있잖아요? 후세인 같은 사람이 나와서 미국이 쿠웨이트 괴뢰 정부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땅에 들어가서 쿠웨이트를 해방시켰다고 얘기할 때, 역사적으로 보면 또 일면 타당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평화라는 것은 양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미국은 자기가 평화를 수호하는 세력이라고 하고 저쪽은 자기가 제국주의에 반대해서 평화를 수호하는 세력이다라고 얘기할 때, 일반 사람들이 볼 때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요소도 있다는 거죠. 우리 평화운동의 어려운 점도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34쪽, 35쪽)』라고 말하고 있음

(3) 또 귀하는 다른 대담자들에게『김세진, 이재호 학생의 분신도 말씀하셨지만, 80년대 이후 우리 민족민주운동 세력이 양대 산맥으로서 NL과 PD로 나뉘어져 왔는데 (지금은 서로 중화된 면도 많지만) 어쨌든 양대 흐름이라는 것이 아직도 중요하고 이념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를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앞으로 민민운동의 방향과 관련해서 지금 반핵평화운동을 어떻게 연결지을 수 있는지, 어떤 이슈를 우위에 두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호보완적으로 병행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씀해주시죠.(52쪽)』이라고 권유하고 있음

(4)『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있다 또는 할 가능성이 있다. 원자로가 있다는 식의 보도들을 하고 있는데,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인지 의도적으로 보도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우선 [조선일보]를 보니까 4월 1일자에 느닷없이 무지하게 큰 지면으로 ‘북한의 핵 실태와 방향’ 해 가지고 ‘96년 양산체제 가능성’하면서 지금 북한이 핵을 개발해서 몇 년 후에는 양산해가지고 핵공격이 임박한 듯한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다 그런 분위기 조성으로 느껴진단 말예요. 그런데 실지로 얼마전에 몇몇 정치학자들이 이와 관련된 세미나를 해서 이 문제를 얘기한 적이 있는데, (저는 사실 핵무기 전문가가 아닌데 여기 불려나와서 사회를 보고 있는 입장이지만) 제가 판단컨대는 지금 북한에는 핵무기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고 봐요.(54쪽, 55쪽)』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대담자가『지난해 세바르나제 외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해서 한국과의 수교를 통보했을 때 북한측이 그렇다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위험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지요.(55쪽)』라고 말하자
귀하는『예. 없으면서 있는 듯이 할 수도 있겠지요.(55쪽)』라고 말하고 있음

(5) 위 (1)의『전제』, (3)의『NL과 PD운동에 관한 아이디어 요청』을, 전후문맥과 함께 읽어보는 상식있는 사람으로 질문하건대, 귀하는 민족민주운동을 지지합니까, 그저 그런 주장이 있다는 소개만 한 것입니까, 반대합니까.

(6) 귀하는 위 (1) 및 (3)에서 민족민주운동의 양대산맥이 NL과 PD로서 이들은 아직 중요하고 이념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를 담고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1991. 여름에 말한 위와 같은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월간조선 11월호에 대하여 귀하가 소송을 제기한 이후 해명한 것을 제외하고 달리 바뀐 점이 글로써 발표된 일이 있습니까.

(7) 귀하는 NL운동과 PD운동이 대한민국법원에서 계속 처벌받고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8) 위 (2)에서『평화개념을 이데올로기적인 실체』라고 이해하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귀하의 말은, 먼저 침공한 것도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보아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리에 타당성이 있을 때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인가요. 아닌가요.
이것은 제국주의자의 전쟁은 침략이고 사회주의자의 전쟁은 침략이 아니라는 레닌의 주장과 유사한 것인가요 유사하지 않은 것인가요
1991. 여름에 말한 위와같은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그 이후 바뀐 일 있습니까
월간조선 11월호에 대하여 귀하가 소송을 제기한 이후 해명한 것을 제외하고 달리 바뀐 점이 글로써 발표된 일이 있습니까.

(9) 위 (4)의『북한에 핵무기가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는 귀하의 결론적 판단 또는 의견은 근거를 가진 판단을 매체앞에서 단언한 것인가요. 아니면 가볍게 말해본 것인가요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그 이후 바뀐 일 있습니까


3. 귀하는『한국민주주의의 이론 1993. 제1판 제1쇄』의 들어가는 말에서

『한국정치에 있어 민주주의로의 이행문제를 설명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필자의 규범적 개입과 함께 이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느냐 하는 주제와 문제의식으로 씌어진 것이다.(3쪽)』라고 쓰므로서, 위 저서는 실천방안에 관하여 쓴 것임을 밝히고,
『실제에 있어서 민주화의 과정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를 둘러싼 정치적 경쟁이나 투쟁이 아닐 수 없다.(4쪽)』고 전제하면서,

『민주화의 과정이란 다름 아니라 그 정의를 둘러싼 갈등이라고 할 때, 민주주의를 주제로 하는 학문적 탐구는, 예컨대 논리실증주의적, 분석적 패러다임이 강조하듯이 더 이상 연구자의 엄밀한 가치중립적 태도와 객관적, 분석적 진술의 행위일 수만은 없다. 연구자의 가치와 규범적 개입없이 순전히 객관적으로 민주주의가 진술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정치학은 애당초 그것이 규범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다른 학문과 구별된다. 민주주의에 관한 연구가 연구자의 규범적 개입을 피할 수 없게 한다면, 그것은 그가 연구의 행위를 통하여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치적 실천에 매개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학도는 그 깊은 의미에 있어서 파당적이다.(4쪽)』라고 분명히 적었습니다.

이런 자세에서 귀하가 다음 4항~8항을 썼다고 이해해도 됩니까. 아니면 다음 4항~8항은 순수히 학자로서 중립적으로 글을 쓴 것에 불과합니까.


4. 귀하는『한국민주주의의 이론 1993. 제1판 제1쇄』『제1부 제1장, 제2장』에서

(1)『그람시의 이론 속에 나타나는 국가는, 레닌(V.I.Lenin)에게서와 같이 부르주아지의 계급지배를 위한 강권기구이며, 따라서 적대적 실체로서 타도 또는 권력장악의 대상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 단순하고 협애한 성격의 정치적 기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통합국가”(integral state, lo stato integrale)로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를 함께 포괄하기 때문에 사회의 경쟁하는 세력들이 각각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장(場)이 되며, 피지배계급 역시 이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람시의 이론에서는 계급의 개념 또한 파격적이다. 그것은 생산의 사회관계에서 객관적으로 위치하는 계급이 정치적 수준에서도 변혁의 담지자로서의 계급이 된다는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계급은 정치적 실천, 정치적 교육의 효과이다. 한 면에서 국가에 관한 이론 또는 접근을 자본의 논리에 중점을 두느냐, 계급적 실천 또는 정치투쟁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자본이론”학파와 “계급이론(또는 논리)”학파로 분류할 수 있다면(Jessop, p.252), 그람시는 이 후자의 이론적 지평을 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30쪽, 31쪽)』라고 네오마르크스주의의 국가이론을 소개하고

(2)『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Cumings, 1981)은 매우 복합적인 책이다.(33쪽)』라고 소개하면서,
『이 책은 미·소를 중심으로 한 패권국가간의 정치적, 전략적 이해를 둘러싼 세계적 수준에서의 힘의 관계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의 급변하는 정치적 조건, 이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포함하는 세계적 수준에서의 정치, 약소국 한국의 국내정치의 다이내믹스, 맨아래의 지방수준에서의 민중들의 열망·투쟁 등을 포함하는 정치적 양태, 이들 삼층 수준 사이에서 국제정치와 국내정치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구조를 해명하고 있다.(33쪽)』고 쓰면서,
『사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의 기본 테마는 다음과 같은 폴라니의 인용문에서 드러난다. “그러한 제도(자율적인 시장)는 사회의 인간적, 자연적 구성내용을 파괴함이 없이는 일정하게 긴 기간동안 존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신체적으로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의 환경을 야만상태로 변형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가 그 자체를 보호할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을 필연적이다.”(Cumings, 1981 p.50)(34쪽)』라고 쓰고,
『필자의 관점에서는, “한국전쟁의 기원”이 빼어난 저작이 되게 한 요체는 당시 정치변화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본시각을 그 복합적 구조의 최하위수준인 민중의 움직임에 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규범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면에서도 옳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리고 이 관점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올바른 이론의 사용이라고 본다. 폴라니, 무어, 페이지와 같은 이론의 적용을 통하여, 해방후 한국민중의 투쟁과 좌절, 그리고 한국정치의 격변은 비로소 한반도에 고립된 하나의 국지적 사건이 아니라, 보편적 세계사의 한 핵심적 부분이라는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즉, 그전까지 세계사의 기본구조를 이루었던 반제 반봉건 민족해방투쟁을 통한 갈등에서, 미·소를 정점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 이데올로기대립을 둘러싼 세계체제로의 때 이르고 급작스런 재편성의 격변적 과정에서, 한반도의 민중의 조건은 중국, 베트남 등과 같은 동아시아 지역의 반제투쟁과 밀접한 관련성 하에서 이들과 비교의 시각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34쪽, 35쪽)』라고 쓰고 있으며,
『식민지하에서 잘 발달된 강권기구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국가는, 전후 미국이 한반도에 부여한 대공방위전선의 최전방 보루라는 역할 때문에 다시 복원되기에 이르렀고, 그것은 곧 당시 민중의 여망에 반하는 반혁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회혁명을 주도하는 것은 노동자계급만이 아닌 농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폴라니의 이론을 따라, 커밍스는 이 반혁명에 저항하는 중심세력으로서 농민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건설된 강권적 국가와 미국이 이 기구를 관장하도록 지원한 보수적 지배블록을 한편으로 하고, 사회에서의 민중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대립구도의 설정이, 이 과정에서의 특히 후자에 대한 중요성과 함께 한국전쟁의 국내적 조건을 강조하는 이른바 ‘내인론’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35쪽)』라고 쓰고,
『“한국전쟁의 기원”의 중심 논지는 외세의 압도적 규정력과 내부의 혁명적 조건간의 변증법적 상호관계에 있으며, 우리는 그 텍스트로부터 내인론에 관한 부정적 평가와는 정반대로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민중의 힘이 주도하는 정치체제의 건설이 가능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그러한 전쟁의 발발이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시사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35쪽)』라고 씀

(3)『(논쟁의 수준을 높였다고 귀하가 본 박광주의) 비판의 대상은 한상진, 강민으로 대표되는 관료적 권위주의이론, 김성국, 임현진 등의 종속이론 및 세계체제이론, 박상섭 최장집 등의 네오 마르크스주의 국가이론이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대상은 관료적 권위주의론과 과대성장국가론을 중심으로 한 네오 마르크스주의국가이론인데, 관료적 권위주의론에 대해서는 주로 립셋과 오도넬을 대응시키고 있기 때문에, 비판은 특히 후자에 집중되고 있다.(39쪽)』라고 쓰면서,
『그는 과대성장국가론에 대하여는 명시적으로 네오 마르크스주의이론으로 상정하나, 관료적 권위주의론에 대해서는 암시적으로 함의에 있어 그렇게 규정한다. 여기에서 비판의 대상은 네오 마르크스주의이며 비판의 이론 틀과 이데올로기적인 입지점이 자유주의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자유주의 대 (네오)마르크스주의로 설정된다.(39쪽, 40쪽)』라고 밝히고 있으며,
『과대성장론에서의 민중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분된다. 넓은 의미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민중은 영어의 people(프랑스의 peuple, 이탈리아의 popolo, 스페인의 pueblo, 독일의 Volk에 해당. 그러나 원래 이 번역어인 ‘인민’이라는 우리말은 북한말처럼 인식되어 오해를 피하기 위한 대용어로서의 민중을 사용)을 의미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민중은 노동자, 농민, 하급중산층등을 포함하는 기층민중(popular sector)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에서의 민중은 기층민중과 중산층으로 구성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의미에 있어서의 기층민중과는 엄연히 구분된다.(43쪽)』라고 정의함

(4)『“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동인이 부르주아의 내부분열, 부르주아 분파간의 이해관계의 불일치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EB'.pp.46~48). 여타 다른 계급과 공화파에 대항하여 전체 부르주아지 공동의 계급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보나파르트를 주축으로 한 행정권에 맞서 이들은 두경쟁적인 왕당파, 즉 부르봉파 또는 정통파와 오를레앙파가 연합한 질서당으로 조직되고 의회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간 내부분열은 동시에 질서당의 분열로 표출되고, 이러한 내부분열은 지배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를 정치의 영역에서 매우 허약한 정치세력으로 드러나게 하고, 결국 그것은 전체 시민사회에서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상실토록 하는 요인이 된다. 무엇보다 먼저 부르주아지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자본의 일반적 차별성 때문에 분열한다. 부르봉파는 대토지귀족, 또 토지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부르주아 분파의 이름이며, 오를레앙파는 금융귀족을 주축으로 하여 대산업자본가·대무역업자(상업자본가)분파의 연합체이다. 즉 토지자본 또는 구자본과 신흥자본간의 이해관계의 대립이나 분열은, 자본의 형태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와 취향 그리고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과 같은 사회적 존재양태의 차별성에서 기인한다.(101쪽, 102쪽)』라고 본 마르크스의『브뤼메르 18일』을 소개하면서,
다시『마르크스가 여기에서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분석의 하나는, 정치체제의 변화, 국가 대(對) 7월왕정 시절 지배권력으로서 사회의 힘과의 관계의 변화, 부르주아계급의 정치무대 전면으로의 등장과 퇴장 등 정치의 변화가 노동자계급이 밑으로부터 가해오는 위협이나 봉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번째 시기, 즉 1849년 5월 선거에 의해 구성된 제헌의회의 통치시기는 부르주아공화국, 부르주아 통치시기였다. 부르주아의 지배형태가 왕정으로부터 공화정으로 변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한 6월봉기와 6월학살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것은 “왕권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에 의한 자유주의적 반란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봉기에 의한”(‘EB’.p.29)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과실은 그 혁명을 주도한 프롤레타리아에게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게로 돌아갔던 것이다. “2월과 6월의 혁명은 혁명의 결과를 부르주아 규모로 축소시키고”(‘EB’.p.23),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가장 혁명적인 사태가 실제에 있어 가장 반혁명적인 사태로 둔갑하여 버렸다”(‘EB’.p.29)라고 마르크스로 하여금 탄식토록 했다. 부르주아공화국의 성립이 그들 스스로의 힘과 희생과 투쟁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 반면, 부르주아공화국의 붕괴는 프롤레타리아의 봉기 때문이 아니라 부르주아 스스로의 분파적 분열의 결과였던 것이다.(102쪽)』라는 점,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가장 근대적인 정치분석가로서의 면모를 약여하게 드러내보인다. 그는 계급투쟁과 사회변화의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 기본계급간의 힘의 분간 못지않게 군의 역할에 대해 그 중요성을 부여한 최초의 근대적 사회과학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이야말로 애국심과 보수주의 이념을 담지하여 부르주아지배와 국가기구 내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믿음직스러운 조직으로, 밑으로부터의 혁명이나 급진적 변혁을 시도하는 세력에 대한 가장 강고한 보루로 묘사된다.(107쪽)』라는 점,
『의회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의 지배는 의회제도가 안고 있는 내재적인 모순 때문에, 부르주아의 특수이익이 보장되는 조건하에서만 작동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116쪽, 117쪽)』는 점,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의 관점은 프롤레타리아가 이중의 고통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하나는 그 통치의 방법이 부르주아대의제 민주주의인 부르주아지배에 의한 압제와 착취로부터이고, 두번째는 대의제민주주의 자체의 미숙한 발전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다 관심을 갖는 것은 두번째 측면이다.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마치 초기 “헤겔법철학비판”(1843)에서나 “유대인문제”(1845) 그리고 “공산당선언”(1848)에서와 같이 인간의 진정한 해방은 ‘진정한 민주주의’(때로는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라 불렀던)의 확대, 발전이라는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그는 자본주의 생산체제하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보았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하게 인민대중의 소외를 영속시키는 부르주아 권위주의의 지배형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125쪽)』라는 점 등을 소개하고 나서,
『“브뤼메르 18일”에서 상정되는 이러한 내용들은, 1871년 파리코뮨의 옹호를 위해서 쓰여진 “프랑스내전”에서는 대의제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대안으로서 권력분산과 민중의 직접참여에 의한 직접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제시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모델은 볼세비키 혁명과 더불어 엄청나게 전위된 형태로 스탈리니즘으로 제도화되면서, 사회주의 국가의 공식제도와 이데올로기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세계적인 규모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맞아 민주주의의 실혐에 대한 앞날이 상당히 어둡게 보이는 오늘 “브뤼메르 18일”에서 우리는 이 비관적 전망을 극복하려는 정신과 처방을 가려 배울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126쪽)』라고 결론짓고 있음

(6) 위 (1)의『그람시를 소개한 점』,
(2)의『브르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필연론을 빼어난 저작이라고 보고 외세(미군정)가 아니었으면 민중의 정치체제가 가능하였고 6.25전쟁도 발발하지 않았으리라는 시사를 읽을 수 있다고 본 점』,
(3)의『최장집의 과대성장국가론, 네오마르크스국가이론』,
(4)의『마르크스의 ‘부뤼메르 18일’ 글에서 정신과 처방을 가려 배울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는 것』등을,
전후 문맥과 함께 읽어보는 상식있는 사람으로서 질문하건대, 귀하는 네오 마르크스주의자입니까, 그저 그런 주장이 있다는 소개만 한 것입니까, 반대합니까


5. 귀하는『한국민주주의의 이론 1993. 제1판 제1쇄』중『제3장 한국국가의 성격』에서

(1)『여기에서 사용된 분석틀은 마르크스(K.Marx), 엥겔스(F.Engels)의 국가에 대한 고전이론과 이후 변화된 현대사회의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발전시킨 네오 마르크스주의(neo-Marxism)의 국가에 관한 이론들이다.(127쪽)』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2)『남한사회의 국가는 극히 최근까지 계급간 힘의 교착상태를 이룬 적이 없고, 대외종속성의 정도가 정치군사적, 경제적 수준에서 수평적 상호의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성은 1)해방후 분단조건하에서 시민사회와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계급세력의 힘의 관계라는 면에서도 국가가 비대하다는 점에서 함자 알라지(Hamza Alavi)의 과대성장국가의 개념 2)분단조건하에서 피지배계급의 단결을 저해하는 냉전반공 이데올로기와 3)남한사회에서의 자본축적의 시기, 유형, 성격이라는 면에서 “자본론”에 집대성된 고전정치경제이론 위에, 매개변수로 고려되어야 할 여러 종속이론들이 제기한 명제들이 보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128쪽)』라고 쓰고,

(3)『실천상의 중단기적 목표와 방법이 많이 고려될 필요가 있으며, 궁극적 목표설정에 대한 지나친 강조보다는 하나의 단계가 다음 단계의 목표와 방법을 열어나가는 ‘실천적 변증법’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함으로써 지배구조의 변화와 역동성, 국가폭력성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동의의 변화하는 배합이라는 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본다.(132쪽)』라고 씀.

(4)『헤게모니나 대항헤게모니의 획득은 모순관계나 대립관계에 있는 계급에 대한 양보와 희생을 요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의 고수와 다층적 대치선 위에서의 광범한 민족민주연합의 가능성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발견되는데 양자는 어떻게 조정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대항헤게모니를 조직할 수 있는가? 또 신식민지파시즘테제는 종속적 자본주의 조건하에서 생산력증대와 기술발전에 따른 계급구조와 그 내용의 변화를 간과하기 쉽다. 곧 중간계급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청되고 있다는 것이다.(132쪽)』라고 씀

(5)『나는 종속적 자본주의라는 물적 토대를 갖는 하나의 서술적 개념으로서 ‘독재’라는 표현을 쓰려 한다. 국가형태는 그 특성을 구분할 수 있는 몇 개의 소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자본축적의 조건과 발전, 계급구조 및 지배블록의 구조 및 성격변화, 국가엘리트의 성격과 국가의 역할변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힘의 변화가 구분의 기준이 되겠다. 무엇보다도 해방이후 45년간의 정치적 변화는 지배블록과 민중간의 힘의 대립관계로 볼 때 안정과 불안정, 혁명적 변화와 복원 사이의 주기적 반복과정으로 특징된다. 해방 이후 지배구조가 주형된 원초적 특성은 당초 일제식민통치유제의 청산과 민족독립국가수립을 요구하는 민중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하였던 혁명적 경험과, 진영모순의 최전방에 위치한 결과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가장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민중운동의 완전한 절멸과 이를 통한 구질서의 복원이라 하겠다. 이승만정권은 형식적 서구민주주의로 포장된 민간독재의 형태를 가진 것으로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를 위로부터 부과하는 일종의 국가자본주의 형태를 띤다. 이것은 국가가 자본(외국원조 및 자본)을 배분, 관리하고 자본가를 창출해냈으며, 식민지 관료기구를 전수받고, 국내안전보다는 진영간 군사대결을 의표화한 현대식 군부의 성장으로 장비된 ‘과대성장국가’의 특징에 부합한다. 그러나 이 과대성장국가는 정치적 안정의 유지와 자본축적과정에서의 국가의 역할이라는 면에서 전혀 안정적이거나 효율적이라고 할 수 없다. 지배세력의 헤게모니는 매우 약했는데, 50년대의 체제유지는 다만 한국전쟁의 폭력성이 휘몰아친 여파가 미친 기간에만 가능했다. 4.19혁명과 보수적 의회민주주의 세력의 집권이 이를 말해준다.(133쪽)』라고 씀.

(6)『19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6.29선언, 노태우정권의 성립을 보자. 6월항쟁은 40여년 한국현대사에 있어 국가권력 및 지배세력의 힘과 민중의 힘이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반군부독재선언을 형성하면서, 최초의 힘의 균형상태로 들어간 혁명적 대사건이다. 6.29선언은 양측의 잠정협정(modus vivendi)이나, 국가기구가 6월항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각한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배세력에게 유리한 계기를 마련한다. 그것은 재정비의 숨쉴 여지로 작용했다. 7-8월 노동자대투쟁은 6월항쟁에 못지 않은 또하나의 역사적 계기이다. 이 사건은 반독재민주화라는 낮은 수준의 민주화에서 한걸은 더 나아간, 암묵적으로 기존의 지배적 사회관계와 축적 및 분배의 체계에 대한 재편성이라는 계급적 요구를 전면으로 부상시켰다. 이것은 민중의 혁명적 참여의 규모, 밀도에 있어 해방후의 수준을 획득한다. 플롤레타리아트의 정치무대로의 전면진출이라는 점에서 6월항쟁이 프랑스대혁명에 비유될 수 있다면 7-8월 노동자대투쟁은 1848년 혁명과 1910년대 말, 1920년대의 유럽의 정치국면에 비유될 수 있다.(134쪽, 135쪽)』라고 쓰고,

(7)『노태우정권은 부분적 개방과 부분적 파시즘, 국가폭력의 선별적 사용과 파시즘적 요소가 배합된 제제이다. 파시즘의 핵심요소가 두려움과 이데올로기의 동원에 의한 자발적 동의유도라고 할 때, 우리는 국민대중의 분리통치를 가능케 하는 이데올로기가, 점차로 그 효능을 상실해가는 냉전반공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큰 위력으로 확산되고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임을 목도한다. 이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주도되었던, 그리고 내용상 방어적인 반공주의에서 부르주아헤게모니의 확장에 따른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가치정향에 지라잡아왔음을 뜻한다. 6월항쟁은 민중의 투쟁 때문에 가능하였으나 그 결과물은 부르주아지가 거두어들이고 있다. 6월항쟁은 노동자를 전면으로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정치세력으로의 부상을 가로막았던 군부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부르주아지를 등장시킨 계기였다.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가와 자본간의 결합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상당한 독자성을 갖고 국가권력과 동맹을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35쪽, 136쪽)』라고 씀.

(8)『민족민주세력이 항상 정치사회 밖에 위치하고 있는 한, 이들이 실제적 힘을 행사하고 있고, 또 격변성을 안고 있는 한국정치의 구조적 특성상 지배체제를 안정화시키려는 그 어떤 정책이나 시도에도 정치는 불안정할 것이다. 민족민주세력의 정치과정에의 참여는 사회 내에서의 민족민주세력에 상응하는 참여를 획득할 수 있는 정치사회 자체의 획기적 재편성을 수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연대의 이념적, 현실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어야 한다. 곧, 지배권력에 대항하여 계급적 요구와 비계급적 열망이 결합할 수 있는 다층적 동맹의 네트워크를 형성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우리는 민족·민중·민주의 집단의지의 형성이라 부를 수 있겠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민족민주세력은 제도적 공간 밖에서 뿐만 아니라 제도적 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대항헤게모니를 조직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136쪽)』라고 결론 맺고 있음.

(9) 위 (1)의『마르크스 엥겔스 고전이론과 네오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전제로 함,
(2)의『분단조건하에서 피지배계급의 단결을 냉전반공이데올로기가 저해하였다』는 점,
(3)의『실천적 변증법의 강조』,
(4)의『프롤레타리아트헤게모니의 고수와 민족민주연합가능성의 조정과 대항헤게모니의 조직』,
(5)의『해방후 45년간 지배블럭과 민중간의 힘의 대립에 따른 민중운동의 혁명적 경험과 민중운동의 절멸을 통한 구질서의 복원, 그리고 이승만정권은 형식적 서구민주주의로 포장된 민간독재』라는 것,
(6)의『1987.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무대 전면진출』이라는 것,
(7)의『노태우정권하에서 부르주아지가 국가권력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
(8)의『지배권력에 대항하여 계급적 요구와 비계급적 열망의 동맹네트워크가 필요하며 민족민주세력이 대항헤게모니를 조직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등을,
전후 문맥과 함께 읽어보는 상식있는 사람으로 질문하건대, 귀하는 네오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한국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증대를 주장하는 것인가요, 그저 그런 주장이 있다는 소개만 하는 것입니까, 반대합니까.

(10) 위 (1)을 전제로 한 (2) 내지 (8)에 쓴 바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3. 4. 10. 제1판 제1쇄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뀐 일 있습니까.
월간조선 11월호에 대하여 귀하가 소송을 제기한 후 해명한 것을 제외하고, 바뀐 점을 글로 쓰거나 대담한 것이 글로써 밝혀진 일 있습니까.


6. 귀하는『한국민주주의의 이론 1993. 제1판 제1쇄』중『제4장 자유민주주의 이론 비판』에서

(1)『통념적으로 우리는 보통 서구 선진 자본주의사회를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자유민주주의는 대의제 의회주의를 가지며, 사회주의적 생산체제와 사회주의체제의 속성인 듯이 이해되는 전체주의에 대립되는, 그럼으로써 사회 내의 모든 시민의 자유가 향유되는 체제로 이해된다. 그래서 ‘서구선진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성공했는가’라는 질문은 ‘서구선진자본주의사회가 발전시킨 이념과 제도가 곧 자유민주주의인데 성공했느냐’라는 반문을 제기할만큼 어리석은 질문같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며, 성공하지 않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은 사실상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하느냐에 달린 것이다.(137쪽)』라는 귀하 자신의 논점에서 출발하여

(2)『문자 그대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합성어인 자유민주주의는, 서구에서 발전할 때 자본주의시민사회가 발전한 다음에 그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본주의발전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사회계급의 구조화라는 조건 위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먼저 발전한 것은 자유주의였다. 자유의 이념을 원리로 하는 자유주의는 새로운 자본주의사회의 지배적인 계급으로 부상하고 있었던 시민계급, 즉 부르주아지의 이념과 제도로서 발전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사회의 두 개의 핵심적인 제도적 지주인 사유재산과 자유시장을 보장하는 것, 곧 그 권리를 향유하는 자유를 의미했던 것이다.(139쪽)』라고 쓰고,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민중권력을 의미하는 이념이며 제도이다. 그 기본적인 표현이 바로 1인 1표의 보통선거제도였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시민사회가 발전한 토대 위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서 계급구조가 형성된 다음, 즉 노동자계급이 창출된 이후에 발전된 제도이다. 실제로 민주주의는 부르주아계급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노동자계급의 힘의 팽창의 결과였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경제 및 정치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정도로 힘이 성장한 결과이며  그 제도적 표현인 것이다. 때문에 이 민주주의 이념과 기본정신, 제도적 발전은 자유주의의 그것과 상충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제도의 발전은 갈등하는 사회세력간의 힘의 경쟁관계에서 양자 사이의 끊임없는 타협의 산물이었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사적 소유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그 사회내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약하기 때문에 그것은 민주적일 수 없다는 인식과 보통선거라고 하는 민주적 제도가 실현된다면 이 민주적 방법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계급지배사회로부터 해방되는 민주주의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상정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부르주아의 계급지배의 방법인 의회민주주의는 매우 불안정한 체제라고 생각했다. 보통선거제도의 확대가 부르주아지배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139쪽, 140쪽)』라고 씀.

(3)『그렇다면 서구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실현된 것인가? 그 대답은 명백히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발전은 자유민주주의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요소, 즉 부르주아민주주의 성격의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주체인 민중이 중심이 되는 민중중심적 민주주의발전이라는 질적 변화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실현되었는가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서구의 부르주아자본주의사회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분명 부르주아헤게모니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관철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자유민주주의가 진정한 또는 민중중심적 형태로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이 말은 시민권과 정치권의 확대가 초기 노동자대중의 계급투쟁, 즉 민주화투쟁의 핵심적인 내용이었고,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구성요소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노동자대중의 정치참여는 참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141쪽)』라고 쓰고 있음.

(4)『로버트 달(Robert A. Dahl)이나 찰스 린드블롬(Charles Lindblom)같은 다원주의이론가들은 그들의 초기이론을 크게 수정하였다. 그들은 미국사회에서 계급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초기) 다원주의모델과 사회적 현실, 즉 대기업-그들은 독점자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의 성장과 역할이 얼마나 일치하지 않는가를 확인하고 있다. 대기업(가 집단)은 사회의 어떤 다른 집단과도 달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들은 말한다. “미국에서는 더 많은 돈, 더 많은 에너지, 더 많은 조직력이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저해하는 방향으로, 자유를 증진하는 것보다 저해하는 방향으로, 공적 행위를 공공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이익을 위한 대기업의 영역을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사용한다.” 결국 다원주의체제는 “부정의와 불평등을 안정화시키고, 시민의식의 형성을 저해하며, 공적 이슈를 왜곡하며, 공적 기능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따라서 다원주의체제에서 자본이 “다원주의 위에 군림할 가능성은 다원주의가 민주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적이 아니기 때문에 시장체제와 결합하게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치경제체제에서 ‘중대한 구조적 개혁이 요구’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143쪽)』라고 소개함.

(5)『정치학자 필립 슈미터(Philippe C. Schmitter)의 말을 빌면, 오늘날 후기자본주의사회에 있어 자본의 결합체 또는 자본가단체들은 “사적 이익정부”(private interest goverment)를 형성하고 공익의 영역을 축소시키면서 그에 대립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독점기업은 사회의 경제적 자원을 독점적으로 전유하며 성장, 고용, 물가 등 경제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됨은 물론, 핵심적인 정치적 이슈를 제기하고, 왜곡하고 폐기시킬 수 있는 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적 이익이 공익을 전치시키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원리라 할 민중주권과 민중권력의 개념과 대립하는 사회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144쪽)』라고 씀.

(6)『서구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민중의 사회적, 경제적 권익이 얼마나 실현되었느냐의 관점에서 볼 때 반드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민주화의 평가의 기준은 그 사회의 사회문화적 수준에 상응하여 상승한다. 자유민주주의 발전은 사회적 부와 문화적 성취를 균등하게 배분받고 향유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권리의 실현, 즉 권리개념의 확대를 가져왔다. 오늘의 시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여부를 시민적, 정치적 권리의 실현이라는 기준에서 평가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이말이 시민적, 정치적 권리가 완전히 실현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사회경제적 권리획득이라는 측면에서 민주화의 만족스런 실현은 여전히 거리가 멀다. 현실적으로 볼 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복지국가의 발전으로 표현되고, 이 복지국가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케인즈 경제이론으로 뒷받침되어왔던 것이다. 케인즈주의는 자본주의의 기본구조는 유지하되 정치적 방법, 즉 국가의 개입을 통하여 분재구조를 개선한다는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계급타협의 이론이며 정치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완전한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본주의시장원리와 공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사회복지정책이 수혜자들로 하여금 국가에 더 많이 의존하게 하고, 반체제적 변혁의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기본의 지배적인 정치경제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용해왔다는 비판 역시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문제는 복지정책이 실제로 계급적 불평등을 얼마나 개선했느냐 하는 점이다.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적 질서를 얼마나 개혁했느냐? 그답은 부정적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1980년 미국과 1983년 영국에서의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와 대처리즘(Thatcherism)은 서구선진자본주의사회의 보수화의 열풍과 함께 사회복지국가의 원리와 노동자대중의 사회경제적 권리의 실현에 심대한 후퇴를 가져왔다. 그것은 이른바 ‘공급중심경제이론’에 의한 케인즈주의의 대체, 자본가-노동자간의 계급타협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50쪽, 151쪽)』라고 씀.

(7) 위 (1)의『서구선진자본주의사회가 발전시킨 이념과 제도인 자유민주주의는 성공한게 아니라는 결론』,
(2)의『민주주의는 민중권력을 의미하는 이념』이라는 것,
(3)의『부르주아헤게모니가 자유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관철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4), (5)의 그 설명,
(6)의『서구사회에서 민중의 사회적 경제적 실현은 성공적이 아니며 그 복지정책은 계급적 불평등을 개선하지 않았다』는 것 등을,
전후 문맥과 함께 읽어 본 상식있는 사람으로서 질문하건대,
귀하의 의견은 일반적으로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며 구체적으로는 미국이나 독일에 판결하는『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는 다른 민중을 위한 제도가 대안으로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까.
귀하는 한국 헌법의『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반대합니까. 지지합니까.


7. 귀하는『한국민주주의 이론 1993. 제1판 제1쇄』중『제2부 제1장 한국정치균열의 구조와 전개』에서

(1)『우리가 ‘건준’과 ‘인공’과 같은 정치기구의 역사적 중요성을 평가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일단 현상적으로는 ‘건준’과 ‘인공’은 그람시가 말하는 “민족적, 민중적 집합의지”(national-popular collective will)에 기반한 “역사적 블록”(historical bloc)로서의 특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탈식민의 과제가 투사되고 광범위한 사회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으며 새로운 민족, 새로운 역사로 이끌어나갈 혁명적 변화의 계기들을 선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159쪽)』라고 씀.

(2)『미군정은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고 지도되었던 ‘인공’을 부인하고 이승만과 한민당(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조직된 부유한 엘리트들, 그리고 행정관리로서 일본에 협력한 많은 한국인들과 손을 잡았다. 경찰, 군인, 관료로서 일본에 협력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국민중에게 부일협력자들의 공적 지위에의 재등용은 해방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미·소의 대립은 다양한 집단과 계급의 이익을 수렴할 수 있는 제도의 출현을 분쇄하였다. 미군정은 한국의 미래와 관련하여 한국정치에 그들 자신의 제도를 부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일정을 추진하는 데에는 이점의 식민지국가기구의 급속한 재생과 강화가 필요했다. 따라서 해방은 강압적 국가기구의 탄압과 폭력의 ‘일시적’유예에 불과했으며 시민사회는 미군정과 그에 동맹한 한국인들로부터 신속하게 소외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해방후 한국의 국가를 과대성장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159쪽, 160쪽)』라고 쓰고
『미군정의 정책은 민중의 의지에 부응하거나 또는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에 의해 온존된 식민지국가기구는 거대하게 팽창되었고 시민사회는 여러가지 법과 강제력의 집행에 의해 제약되고 위축되어졌다.(160쪽, 161쪽)』라고 씀.

(3)『1946년 10월~11월의 전국적인 민중봉기를 남한에서의 단독정부의 수립과 식민지시기의 계급관계의 온존에 대항한 시민사회의 저항의 표출에 다름아니었다. 이 사건은 미군정정책의 기조에 대항한 것이었고, 미점령당국과 시민사회의 충돌이 그 본질이었다. 미군정과 이에 협력하는 한국인들간의 정치연합은 한국민중으로부터의 지지를 획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시민사회의 탈정치화의 과정은 군정의 통치구조를 뒷받침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세력기반을 창출하는 과정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정당국은 세가지 이데올로기적 기조에 기반한 정치연합을 수립하고자 시도했다. 그것은 첫째로 반공국가의 확립, 둘째로 자본주의경제체제의 확립, 세 번째로는 정치체제 또는 지배의 형태로서 의회제도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주의 제도화였다. 불행하게도, 1945년 이후 한국에서 자본주의, 반공주의, 의회민주주의는 위로부터의 지속적인 선전이나 강조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정치적 언술체계 내에서 우선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이 세가지 원리 자체는 서로 상출관계에 놓여져 있었다. 남한 내 단독정부의 수립과정에서 미군정은 민주주의적 개혁보다도 자본주의시장경제와 반공국가의 확립을 우선시했으며, 이로부터 우리가 제1의 정치균열이라 부르는 현상을 야기시키게 되었다. 남한 단독국가의 수립 이후 국가에 의해 제창되는 민주적 이상과 권위주의적 실재 사이의 괴리로 표현되는 이 정치균열은 이후 한국정치에서 구조적으로 되풀이되게 된다. 민주주의적 규범과 권위주의적 실제 사이의 괴리에 기반을 둔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둘러싼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적으로 제1공화국 아래에서의 민주제도의 정착은 이미 두가지 차원에서 구조적 제한성을 갖게 되었다. 우선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따른 계속적인 반란과 봉기로서, 제주도에서의 전면적인 봉기와 뒤이은 여순반란과 계속되는 빨치산투쟁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그렇지 않아도 엄청나게 거대한 경찰력의 규모를 더욱 팽창시켰으며, 1948년 12월에 제정된 국가보안법과 같은 입법조치를 통해 국가강권력의 무제한적 행사를 제도화시키게 되었다. 결국 일제식민지시기 이후 미국의 점령을 거쳐 남한에서 제1공화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는 국가강권력의 발달과 사용이라는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승만체제하에서 제도화된 강권력의 사용은 좌파세력의 근절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적 반대세력조차도 침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보수주의적 반대세력은 이승만체제하에서의 의회체제의 정당성과 존재가능성에 대한 두 번째의 도전의 자원이 되었다. 여기에는 경제적 측면이 존재한다. 이승만에 반대하는 야당으로 전환하게 된 지주층의 정당인 한민당은 제한적인 토지개혁을 통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부분적으로 상실했다. 남한의 토지개력은 북한과는 달리 지주가 소작인에 의해 보상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매우 온건한 토지개혁조차도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지주나 보수세력에 의해 반대되었으며, 토지의 재분배가 완전히 실현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전쟁이 종결된 이후 강력한 국가기구를 관장하는 이승만과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한민당 세력간에는 극심한 힘의 불균형상태가 노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권과 보수주의적 반대세력 사이의 이러한 힘의 불균형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나 동질적인 사회경제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간극을 깊이 심화시키는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보다 치열한 갈등은 이승만체제와 시민사회 사이에 존재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강제적으로 부과된 “강력한 국가-약한 시민사회”(strong state-weak civil society)의 관계는 1948년 수립된 제1공화국에까지 연결되었다. 1948년의 상황을, 혁명적 열기가 정치지형에 가득하고 헤아릴 수없이 많은 집단과 조직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활동하였던 해방 직후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현격하게 드러난다. 남한 내 단독정부의 수립은 다른 한편 시민사회의 탈정치화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미군이 점령한지 3년이 지난 후, 민중과 미국에 연계된 지배블록간의 힘의 균형은 후자쪽으로 기울어졌다. 시민사회의 급격한 쇠퇴는 한국사회의 내적 다이내믹스에 기인하기보다는 오히려 미군정의 정책과, 정책목표를 위해 동원되었던 일련의 광범위한 자원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제1공화국의 수립과정은 외삽적(外揷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한국가가 외삽적이라는 것은 제1공화국의 정당성이 유약하고 취약한 기반위에 서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만약에 어떤 이유에서 미국이 체제에 대한 지지를 줄이거나 철회했다면, 이전의 세력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시민사회로부터의 정치적 갈등 분출의 개연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주의간의 대립이라는 단순도식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한국전쟁을 해방 직후에 형성되었으며 미·소의 분할점령으로 왜곡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세력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하나의 폭력적 시도라고 해석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162쪽~164쪽)』라고 씀.

(4)『전쟁 이전에 국가는, 미군정이든 제1공화국이든간에 국가는 시민사회의 전반세력에 대하여 헤게모니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람시의 표현을 빌어온다면, 한국의 국가는 “강제력의 갑옷으로 무장되어”야만 하였다.(166쪽)』라고 씀.

(5)『시민사회에 있어 한국전쟁은 심대한 고통과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쟁의 참혹상은 사회 내의 개개인에게 직접적으로 각인되었다. 분단은 휴전선을 따라 더 깊이 새겨졌고,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에 대한 공포는 정치문화의 한 내재적 일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 전쟁의 직접적 경험은 그것을 어떻게, 어떠한 것으로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조차도 남한 국가에 의해서 통제될 수 있도록 조작되기 시작했다. 전쟁의 경험과 고통은 이제 언어를 통제하고 공통의 언술체계를 통제하며 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반공주의적 세계관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의해서 취합되고 표출되기에 이르렀다.(165쪽, 166쪽)』라고 씀.

(6)『4.19혁명은 우리가 제1의 정치균열이라 불렀던, 전전(戰前)에 이미 존재하였던 민주주의적 외형과 권위주의적 실재 사이의 대립과 관련하여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혁명은 한국전쟁 이후 국가에 대항한 시민사회의 최초의 직접적 도전이었으며 시민사회의 첫 번째 승리로 기록될 수 잇다. 그러나 혁명은 군부, 경찰, 관료 등의 억압적 국가기구를 해체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제한된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4.19혁명기 동안에 발생한 정치적 균열과 관련하여 우리는 한국전쟁의 유산으로 남아있는 반공이라는 가공스런 보루를 발견할 수 잇다. 이러한 한정된 정치공간 속에서 투쟁은 민주주의 대 독재의 대립으로 규정되었으며, 이승만정권의 정당성은 의회민주주의의 규범과 실현이라는 원칙적 측면에서 도전받는 양상을 띄었다. 이승만정권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합의를 통해서’사회의 하층계급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지 않았으며 대중정치조직을 조직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국가의 강권력이 효능을 상실하고 투쟁이 진전되자 투쟁의 열기는 사회의 하층에까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정치적 갈등은 제1의 균열을 넘어서게 되었다. 급속한 정치화의 과정에서 언술체계는 때때로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게 된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뒤, 학생세력의 보다 급진적인 분파는 투쟁의 방향을 통일문제로 전환시켰다. 통일에 관한 학생들의 언어와 접근방식은 소박했지만 상당히 이상주의적이었고 개방적이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남과 북의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만날 것으로 요구하고, 그럼으로써 통일로 이끌 광범위한 운동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168쪽)』라고 씀.

(7)『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커다란 열망과 에네르기를 불러일으키는데 가장 기여한 것은 민중민주세력의 성장이었다.(196쪽)』라고 쓰고
『만약 대항헤게모니세력(counter-hegemonic forces)이 약화되거나 제거된다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대의 것은 현존하는 권력구조속에서의 제한적인 진전, 곧 그람시가 말하는 “수동혁명”일 것이다.(197쪽)』라고 씀.

(8)『특히 1988년초 이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종교계와 문학·예술계의 진보적 인사들에 의해 주도된 민중적 통일운동은 6월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주화운동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확대했다.(230쪽)』라고 씀.

(9)『우리나라의 경우 제국주의 대 민족해방운동간의 대결이 냉전체제하에서 반공 대 친공이라는 새로운 대치선을 따라 격렬하게 재편성되면서 민족주의운동과 이념은 자연히 약화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236쪽)』고 쓰고,
『1986년 4월말의 서울대학생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자살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반미자주화의 이슈를 정치화시키면서, 민주화운동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혔던 사건이었다. 이들은 전방부대에 입소하는 대학생군사훈련이 미국의 ‘제국주의적’지배전략의 일환이며, 미국이야말로 한반도의 분단고착과 군부독재정권의 배후세력이라고 규정하면서 분신을 통하여 정면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243쪽)』라고 쓰면서,
『정부여당, 보수적인 지도층인사, 각종 언론매체들은 이러한 분신의 의미를 왜곡하는데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잇달은 분신을, 죽음을 무기로 한 체제전복세력의 반인륜적 행위로 공격했다. 그들은 또한 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학생운동이나 재야운동의 지도부가 청년학생들의 분신을 선동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이들의 공격의 초점은 계속되는 분신은 운동권 사이에 죽음을 찬미하는 소영웅주의적, 허무주의적 분위기가 집단 감염되듯 확산되면서 나타나는 병리적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민주화과정에서의 분신은 그러한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반이성적, 반도덕적 정치상황에서 이에 치열하게 저항하기 위한 도덕적 정의감과 감연한 희생정신의 표출이라 하겠다.(244쪽)』라고 씀.

(10) 위 (1)의『‘건준’과 ‘인공’은 민족적 민중적 집합의지에 기반한 역사적 블록이고 새로운 역사로 이끌어나갈 혁명적 변화의 계기를 선취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
(2)의『인공은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고 지도되었고, 이승만 등이 손잡은 일본 협력자들이 이제는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였다』는 점,
(3)의『미군정과 이에 협력하는 한국인들(이승만과 그 제휴자들)은 한국민중으로부터의 지지를 획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1948. 12.에 제정된 국가보안법 같은 입법 조치를 통해 국가강권력의 무제한적인 행사를 제도화했으며, 제1공화국의 정당성이 유약하고 취약한 기반위에 서 있다』는 점,
(4)의『제1공화국은 강제력의 갑옷으로 무장되어야만 하였다』는 점,
(5)의『6.25 전쟁을 어떠한 것으로 기억할 것인가도 남한국가에 의해 통제조작되었다』는 점,
(6)의『4.19혁명은 군부, 경찰, 관료 등의 억압적 국가기구를 해체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점,
(7)의『민주화와 통일열망에 가장 기여한 것은 민중민주세력』이라는 점,
(8)의『1988년초 이래 전대협, 종교계, 문학예술계의 진보적인사들에 의해 주도된 민중적 통일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확대 하였다』는 점,
(9)의『제국주의 대 민족해방운동간의 대결이 반공 대 친공이라는 대치선을 따라 재편성되었으며, 대학생 분신은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반이성적 반도덕적 정치상황에서 저항하기 위한 도덕적 정의감과 감연한 희생정신』이라는 점 등을,
전후 문맥과 함께 읽어보는 상식있는 사람으로서 질문하건대,
귀하는 대한민국 헌법의 존립근거와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헌법의 존립근거와 정당성을 인정합니까.

(11) 위 (1)에서『‘건준’과 ‘인공’은 민족적, 민중적 집합의지에 기반한 역사적 블록으로서 특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쓴 바,
『역사적』이라는 단어는 가치긍정적인 것입니까. 가치중립적인 것입니까.
위 (1)의『새로운 민족, 새로운 역사로 이끌어나갈 혁명적 변화』라는 표현은 가치긍정적인 것입니까. 가치중립적인 것입니까.

(12) 위의 (1) 내지 (9)에 쓴바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합니까
아니면 1993. 4. 10. 제1판 제1쇄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뀌었습니까.
월간조선 11월호에 대하여 귀하가 소송을 제기한 후 해명한 것을 제외하고, 바뀐 점을 글로 쓰거나 대담에 게재하여 밝힌 일 있습니까

(13) 위 2항 (1), (3)에서 인용한 바『민족민주운동의 양대산맥이 NL과 PD』라는 귀하의 1991년 여름의 인식과 의견에 유념하면서, 위 (7)의『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커다란 열망과 에네르기에 가장 기여한 것은 민중민주세력의 성장』이라는 귀하의 인식과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합니까 아니면 언제 바뀌었습니까


8. 귀하는『한국민주주의의 이론 1993. 제1판 제1쇄』중『제2부 3장 한국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에서

(1)『이글의 주제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또 가능하다면 어떤 민주주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답하려는 것이다. 이 문제의식은 두가지 내용을 동시에 포괄한다. 즉 현실분석적인 것과 가치함축적인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의미하는 민주주의는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바람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때 바람직한 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게 하는 방법 또는 전략적 측면, 즉 실천적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논의되지 않는 한 그것은 한낱 관념적 모델에 불과할 지 모른다. 특정 유형의 민주주의는 현실성, 가치정합성, 실천성이 내용적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 요청된다. 필자는 그러한 내용의 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상정하고, 이를 개진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왜 한국에서는 일반화된 자유민주주의 이론이나 실천이 아니라, 다른 어떤 민주주의가 추구되어야 하는가 하는데서부터 논의를 출발시킬 필요가 있다.(367쪽)』라고 써서 일반화된 자유민주주의 이론이나 실천이 아닌 다른 어떤 민주주의가 추구되어야 하는가를 논의의 출발로 삼고 있음.

(2)『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모델이 필요한 이유(367쪽)』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내용을 충실히 실현해왔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민주주의를 한국의 역사적, 구조적 맥락에 위치시키고 이를 자유민주주의의 고전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의 경험과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유민주주의는 문자 그대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합성어이다. 서구에서의 자유주의는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발전에 따른 신흥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지극히 서구적인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구체제하의 지배계급인 본건토지귀족에 대항하는 신흥 저항세력이었고 자유주의는 이들의 이념이었다. 인신보호(Habeas Corpus), 사상,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은 이 사상 또는 이념의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부르주아지에 의해 주도된 자유주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기본권의 가치를 함축하기 때문에 진보성을 띤다. 자유주의의 또다른 측면은 ‘최소국가’를 추구하거나 내용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된 정치적인 권위체제의 힘이나 역할이 부르주아 지배의 시민사회와 시민사회의 경제적 교환관계의 중심적 메커니즘인 시장에 대해 매우 약하다는 특징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원상으로 ‘민중의 권력’, 또는 ‘다수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는, 특히 근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볼 때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사회의 성장이 먼저 있은 다음 뒤에 민주주의와 민주적 제도가 발생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노동계급의 성장과정과 궤를 같이 하며, 그 제도적 발전의 핵심은 1인 1표의 보통투표권의 확대다. 최초의 노동운동이 1830년대 영국에서 차티즘(Chartism)이라고 하는 노동자의 투표권 요구를 내용으로 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 민주주의의 성장은 노동자들의 많은 희생을 필요로 했던 투쟁의 과정이었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시민사회와 시장에서의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압도적인 힘의 불균형상태가 1인1표라고 하는 평등한 민주적 제도에 의해 제어되고 균형될 수 있는 체제로 현실화된 것이었다. 그것은 양자간의 타협점 또는 결합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간의 갈등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구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이념으로서, 제도로서 수용할 수 있었던 지배계급으로서의 ‘패권적 부르주아지’(conquering bourgeoisie)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전에서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Jr.)가 말한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 no democracy)라는 말은 옳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은 이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한국에서의 국가는 해방후 좌우대립,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변화과정에서 약하게 발전한, 그러면서도 구 봉건적 지배관계와 일제하 식민지적 자본주의적 계급관계가 결합한 계급적 대립의 첨예화와 남북체제간 대립에 의해 중층결정된 사회적 조건 위에서 매우 과대성장된 억압적 강권기구로서 제도화되었다. 동시에 부르주아지는 국가에 의해 창조된 매우 약한, 국가와 외세 및 외국자본에 종속적인 성격을 띠면서 정치권력과 이익, 이데올로기, 정향에 있어 분리되기 어려운 보수성이 강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한국의 부르주아지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헤게모니를 가지며, 서구의 부르주아지와 같은 진보적, 자유민주주의적 태도와 가치를 가진 적이 없다. 이점에서 한국의 부르주아지는 197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의 부르주아지가 군부독재권력과의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군부독재와의 정치동맹으로부터 이탈하여 민주화를 지지했던, 그러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세력으로 역할할 수도 없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부르주아지는 군부독재의 속성과 같이 권위주의적, 노동억압적, 반공적, 보수적, 가부장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이것이 왜 한국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일 수 없는가 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취하지 않는 이유는 역사속에서 실현되고, 현실에서 향유되는, 그리고 지배적 언술체계(discourse)에서의 자유와 자유주의가 한편으로는, 즉 하나의 가치와 체제로서는 모든 대중에게 보편적으로 향유되어야 할 것으로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다른 한편 실제의 현실에서는 다수의 민중에 대하여 억압적 이념기제, 또는 지배적 언술체계로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즉 자유는 진영간 이념의 대립에 있어서 공산전체주의에 대응하는 반공과 동일한 것으로 자주 인식되어왔다. 자유는 인간의 자발성, 천부인권의 권리, 자율성이 아니라 두려움을 동원하는 이념의 원천이며 실제로 자유를 희구하는 민중의 어떤 부문에 대한 탄압의 예고로 이해된다.(368쪽~370쪽)』라고 씀.

(3)『1987년 이후 구조적 수준에서는 국가의 축소 또는 약화와 시민사회의 팽창이 이루어졌다. 1987년 민주항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는 시민사회의 팽창은 민중권력의 팽창에 의한 민주화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후 정치변화의 과정을 통하여 시민사회팽창의 성격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시민사회에 있어서 부르주아헤게모니의 확대, 중산층의 보수화와 기층민중세력간 연대의 때이른 해체, 지역감정의 확산을 통한 지역간 수직적 분할의 심화, 기층민중운동세력의 때이른 약화, 보수적 사회기반의 강화로 나타났다. 곧 탈권위주의화와 민주화는 일치되지 않았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규범성과는 더욱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372쪽)』라고 쓰면서,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원리중의 하나는 바로 사회경제적 평등이다. 이점에서 우리사회의 민주화의 방향은 이에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민중의 힘을 통한 민주개혁을 통하여서만 해결 가능하다. 이것은 경제적 민주화의 실현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군부의 퇴진없는 자유화나 탈권위주의화 없듯, 소유의 분산을 통한 경제적 평등의 실현없이 실질적 민주화는 불가능하다. 한국적 특성에서 이는 재벌의 민주적 재편을 말한다. 그러한 재편의 핵심은 1)국가권력과 거대독점자본간의 결합의 금지 2) 그를 통한 재벌해체 및 생산조직의 민주화를 지칭한다. 곧 생산조직의 재편을 통한 부의 불평등과 집중에 대한 제도적 규제 없이는 민주화는 불가능하다.(374쪽, 375쪽)』라고 씀.

(4)『그러므로 우리가 상정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퍼스펙티브에서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수준과 정치적, 국가적 수준을 동시에 포괄한다. 사회적 수준에서의 그것은 한 사회구성원 개개인들이 스스로의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고 결정함에 있어서 자유, 자율성, 판단을 향유하고 행할 수 잇는 특정형태의 사회적 조건, 또는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1)이러한 사회에서의 개인은 사고, 판단, 행위의 자유와 자율성을 평등하게 향유할 권리를 갖는다.[자유와 권리의 원칙] 2)그리고 이번에는 그들 개인의 행위와 권리가 그에 의하여 조정되고 재규정될 것이 요구되는, 한 공동체로서의 그 사회의 공동의 일반의사를 형성하는 과정에 참여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자발적 선택과 타협을 통하여 강제되기를 스스로 수용하는 과정을 포함한다.[자발적 강제에 의한 공동체 형성의 원칙] 그뿐만 아니라 3)이 사회공동체가 구체적으로는 하나의 생산의 사회적 조직으로서 자본주의, 즉 자본의 소유와 비소유 내지는 그 크기의 과다 때문에 발생하는 구조적 불평등으로 인해, 위에서 말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형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그 사회가 공동체적 원칙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기준에 의거하여 사회의 부와 영향력이 정의롭게 배분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말한다[자유 권리행사의 실질적 조건의 원칙].(377쪽, 378쪽)』고 씀.

(5)『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주도하는 계층은 민중이라고 할 수 있다.(379쪽)』라고 쓰면서,
『여기서 민주주의 실현의 주체가 민중이라고 주장할 때, 그렇다면 민중은 누구인가, 계급과 민중은 무엇이 다르고 민주화운동세력, 또는 야당과 민중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변화와 민주화의 첫 출발점은 자본주의사회 내에서의 계급과 계급관계 및 이들간의 갈등과 모순에 놓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민주화는 정치적 행위자들이 형식적, 절차적 차별없이 서로의 이익과 요구를 협상, 타협하고 공적 결정에 이르는 하나의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구조 내에서, 즉 현실세계에서 민주화는 기본적으로 계급간 대립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제도적 메커니즘이 되며, 이 제도를 통하여 모든 사회계급에서 평등과 자유가 실질적으로 담보되는 과정이며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하나의 계급으로서 정치적 실천의 행위자 또는 주체가 될 수 있는 문제는 결코 어떤 근본주의적 이론의 정식화나 고전적 변혁이론의 모델을 따라 그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계급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그것은 생산의 기본적 사회관계 내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이 사회적, 정치적 수준에서도 필연적으로 계급으로 나타난다고 인식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는 상이하다. 여기에서는 객관적 사회관계에서 존재하는 계급과 그것이 민주화투쟁이든 계급투쟁이든 정치적 집단행위자가 되는 것 사이에는 개연성, 잠재성,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y)은 존재할 수 있어도 필연적 관계는 없다. 이 양자간 관계를 연결시키는 것은 정치적 실천, 헤게모니의 행사, 정치교육이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적 실천없이 집단적 행위자로서의 계급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계급이 복합적 사회 구성체 내에서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의 총체성의 효과로써 정의하고 잇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과도 상이하다. 여기에서는 계급은 경제적 관계의 수준에서만 정의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379쪽, 380쪽)』라고 씀.

(6)『구체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민중은 다음의 수준에서 인식된다.
1)민중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노동분업 내에서 피지배적 지위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사회집단이다. 노동과 자본이라는 대립적 위치에서의 노동자집단을 중심으로 농민과 하층 서민계층까지를 결합하는데, 이는 주로 경제적 수준에서의 민중을 뜻한다.
2)민중은 강력한 권위주의 통치하에서 국가의 강권력에 의해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정치참여가 제한됨으로써,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과정, 즉 정치과정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집단이며, 이는 정치적 수준에서의 민중이다.
3)민중은 제국주의적 외세, 특히 미국의 영향을 부정적으로 담지하며, 특히 한국이 그동안 세계체제 내에서 진영대립의 최전방 대치선에 위치한 결과, 또 그 힘의 외표화로서 분단조건하에서, 이 조건 때문에 그들의 물질적, 정신적 생활에 직, 간접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받는 사회집단을 말한다. 이는 중심 종속적 주변관계를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와 남북분단 수준에서의 민중을 뜻한다.
4)민중은 언술의 수준에서도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의 민중은 계급으로서 언표화되기보다 민중으로 되어왔다. 마르크스의 계급이론만으로서는 설명되기 어려운 한국의 역사적 사회구성체의 특수성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수준 등 여러 수준에서의 사회계급간 경계의 포괄성, 포섭성, 유도성 때문에, 계급적 언술이 반공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권위주의체제하에서 중심적 억압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민중이라는 언술의 형성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중은 현재적 사회집단에 대한 언표일뿐 아니라, 일제하 민족독립운동, 해방후 자주적 민족국가수립운동과정에서 “억압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전통으로서의 역사속에서의 집단적 행위자로 인식된다.
따라서 민중은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이다. 그것이 포괄적인 까닭은 위의 여러 가지의 요소를 포괄하기 때문이며, 역동적인 까닭은 그러한 조건을 담지하는 사회집단 또는 범주이지만, 또한 실천적으로 역사와 현실 속에서 그들이 사회와 역사에 대해 스스로를 정의하고, 그 과정에 스스로 참여라는 행위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핵심적인 요소가 강조되어야 한다. 민중은 포괄적이되 한가지 필수적인 요소인 중심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즉 민중은 위의 네가지 요소 가운데서 첫 번째 요소를 반드시 내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점에서 민중은 ‘계급 1’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계급 1’의 내용을 포괄하는 중첩성을 기본 요건으로 한다는 의미이다. 민중개념을 구성하는 네 요소 중 첫 번째 의 요소는 다른 요소와 함께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민중의 구성조건으로부터 이슈를 발생시키며, 이를 실천하려는 운동으로 전개된다. 즉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민족 자주·통일운동이 그것이다. 이것은 왜 그동안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이 이 세 문제영역을 포괄하면서 나타났는가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민중의 민주화운동은 민민운동이라 불린다, 두루 알다시피 민민운동은 민중적 민주주의운동, 또는 민족민주운동의 줄임말이다. 때문에 민민운동은 내용적으로 민중적 민주주의에 중심성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민주화과정이 실질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의 내용을 갖지 못할 때 허구화되면서 다른 방법에 의한 지배권력의 통치의 도구가 되는 것과 같이, 그렇기 때문에 민중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과 같이, 민족자주화 통일운동이 민중성을 상실했거나 그와 연계를 갖지 못할 때, 그것은 정의적 민족주의운동, 또는 어쩔 수 없이 보수적, 낭만적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며 민중적 민주주의운동과 적대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 민중은 운동, 봉기, 데모, 분노, 한, 열망, 종교, 이익집단, 정당, 정파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자기표현을 갖는다. 정치적 수준에서의 민주화운동 과정을 통하여 민중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한다. 즉 민주화운동의 세력, 범주, 집단, 정파, 정당, 조직 등으로 나타난다. 재야, 운동권, 민족민주운동, 정치사회 내 야당인사들은 모두 민중의 정치적 표현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들을 민중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은 민중이 계급적 중심성을 갖는 것과 같이 이 요소를 포괄할때만이 그러하며,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민중과는 관계가 없다.(384쪽~386쪽)』고 씀.

(7)『민중적 권력을 그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국가와 독점자본주의의 지배구조나 발전방향을 변개시킬 수 있는 가능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정치적 수준에서의 민중적 민주화운동의 결과에 의한 민주화의 증대는 자본주의국가의 형태와 정책의 내용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민중적 민주주의운동이 증대될 때 국가가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이에 개입하고, 그 투쟁에 비례하여 한국의 독점자본주의에 대한 민중적 개혁요구를 일정하게 실혐시킬 수 있는 투쟁의 장소로서 인식한다.(388쪽)』라고 쓰고 있음.

(8)『국가가 계급국가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국가 내에서 또는 정치사회의 제도권 내에서 민주주의는 민중들로 하여금 계급관계에 의해 설정된 한계 내에서라고 하더라도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따라서 투쟁의 장으로서 국가와 대의제 민주주의는 존중되고 활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민중적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를 통하여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를 지향한다. 이 민주적 사회주의가 장시간에 걸쳐 자본주의사회의 계급구조 내에서, 그리고 그와 병행하는 조건에서라 하더라도 그러하다.(390쪽)』라고 씀.

(9)『이 새로운 민주주의는 외견적으로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비교될 수 있을른지 모른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매우 크다, 서구에서의 사회민주주의는 진보세력으로서의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이어받은 산업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지배질서에 대한 도전의 결과,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사회민주주의적 협약’(social democratic pact)의 산물로 실현된 것이다. 민중세력이 이 ‘사회민주주의적 협약’의 주도세력이 되며, 또 그것이 대의제 의회민주주의의 틀을 통하여 실현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한국적 자본주의 발전은 국가-자본 연합의 압도적 힘, 지체된 민주적 개방, 교육받은 도시중산계급의 엄청난 양적, 질적 크기, 기층 대중이 노동자계급만으로는 계급세력으로서 통일되기 어려운 현실조건을 만들어내었다. 한국에서는, 노동자단일계급 헤게모니하의 개혁이 아니라, 다계급, 모순 및 갈등의 다층적 사회세력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개혁이 현실적이기 때문에 자주 복지의 차별적 수혜대상이 되는 비조직노동자 사회집단들을 배재할 수 없다.(390쪽)』라고 쓰고 있음

(10)『국가-시민사회축에서 전개되는 민주화투쟁의 언술 및 투쟁과 생산관계의 축에서 발생하는 계급투쟁간의 변증법적 관계, 비계급적 사회집단과 계급적 사회집단간의 상호관계, 국가기구내의 제도화된 공간에서의 투쟁과 그밖에서의 투쟁을 결합하는 문제는 최대로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문제는 민중성의 확보, 그리고 그 안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의 관철이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대중적, 민주적, 시민적 투쟁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노동운동을 마치 비현실적이고 계급투쟁적인 듯이 인식하고, 시민운동은 마치 현실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인 듯이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 언술로 자리잡아왔다. 노동운동은 어느덧 전체 운동 가운데서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적어도 언술의 수준에서는 시민운동이 중신에 놓이게 된 듯하다. 그러나 시민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노동운동의 언술적 기반을 파괴하면서 진행되는 듯한 경향은 비판되지 않으면 안된다.(395쪽)』라고 씀.

(11)『우리는 운동과 함께, 강력한 개혁적 반대정당의 구축을 통한 민주화전략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를 통하여 지배체제의 변개를 시도, 기존의 자유주의적 협약을 통한 탈권위주의화에다가, ‘민중주의적 협약’의 내용이 담기는 실질적 민주화가 담보되는 민주주의에의 접근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397쪽)』라고 씀.

(12) 위 (1)의『왜 한국에서는 일반화된 자유민주주의의 이론이나 실천이 아니라, 다른 어떤 민주주의가 추구되어야 하는가 하는데서부터 논의를 출발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
(2)의『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취하지 않은 이유는 자유와 자유주의가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다수의 민중에 대하여 억압적 이념기제로서 작용해 왔기 때문』이라는 점,
(3)의『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원리중의 하나는 바로 사회경제적 평등이다. 소유의 분산을 통한 경제적 평등의 실현없이 실질적 민주화는 불가능하다. 재벌해체 및 생산조직의 재편을 통한 부의 불평등과 집중에 대한 제도적 규제 없이는 민주화는 불가능하다』는 점,
(4)의『우리가 상정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퍼스펙티브에서 사회에서의 개인은 사고, 판단, 행위의 자유와 자율성을 평등하게 향유할 권리를 갖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자발적 선택과 타협을 통해 강제되기를 스스로 수용하는 과정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점,
(5)의『정치적 실천없이 집단적 행위자로서의 계급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
(6)의『민중은 계급적 중심성을 갖는다』는 점,
(7)의『민중적 권력을 그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국가와 독점자본주의의 지배구조와 발전방향을 변개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
(8)의『국가는 계급국가이며, 국가의 대의제민주주의는 투쟁의 장으로서 존중되고 활용되지 않으면 안되며, 민중적 민주주의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점,
(9)의『민주적 사회주의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차이가 매우 크다』는 점,
(10)의『국가기구내의 제도화된 공간에서의 투쟁과 그밖에서의 투쟁을 결합하는 문제는 최대로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문제는 민중성의 확보, 그리고 그 안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의 관철이다』라는 점,
(11)의『민중주의적 협약』등을,
전후 문맥과 함께 읽어본 상식있는 사람으로서 질문하건대,
귀하는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민주주의 질서 아닌 다른주의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는가요, 그게 아니고 그저 그런 학설을 소개하는데 불과한가요, 아니면 다른주의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반대하는가요.

(13) 위 (2)~(9)에서 쓴 바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3. 4. 10.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뀐 일 있습니까.
월간조선 11월호에 대하여 귀하가 소송을 제기한 후 해명한 것을 제외하고, 바뀐 점을 글로 쓰거나 대담에 게재하여 밝힌 일 있습니까

(14) 위 (3)에서 쓴 바『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원리중의 하나는 바로 사회경제적 평등이다』, (4)에서 쓴 바『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자발적 선택과 타협을 통하여 강제되기를 스스로 수용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6)에서 쓴 바『우리나라 에서 민중은…제국주의적 외세 특히 미국의 영향을 부정적으로 담지하며』, 라는 세가지 부분을『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다수파에 의한 평등강제의 사회주의 이론』『대한민국의 평화수호와 국토방위의 문제』에 유념하여, 대답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9. 귀하는 1998. 11. 19.자 게재 동아일보와의 대담에서

(1)『“우선 정통성 문제를 얘기해봅시다. 나는 북한의 정통성을 인정한 적이 없고 그런 주장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느끼는 부분이 있었다면 오해입니다. 북한과 제1공화국으로 제도화되는 남한 정치체제 사이에 정통성은 비교의 대상조차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자입니다. 북한체제는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남한 정치체제가 아주 바람직한 형태로 제도화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단정노선으로 시작해서 단독정부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의 이승만정부의 정통성은 인정합니다. 그 이유는 이승만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제도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통성의 근본이 됩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고 해외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 지도자가 제1공화국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승만정부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해 왔습니다. 단독정부 수립과정에서 많은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배제됐다는 것이 비판의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2)『“저는 자유민주주의를 한번도 부정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안보상업주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해방후 지금까지 공산주의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극단적 반공주의가 당연시되다 보니까 사회변화와는 거꾸로 과거지향적인 냉전 반공주의를 자꾸 재생산 해내기 때문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상업적 이익을 볼 수 있을지 모르나 국가와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볼때는 과연 사회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라고 말하였으며,

(3)『다만 저는 이 사태에만 문제를 두지 않고 한국전쟁을 보다 평화주의적이고 민중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모든 것을 김일성의 전쟁결정에만 초점을 맞춰서 본다면 김일성을 규탄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지만 전쟁의 의미를 거기에만 한정지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념적으로 남한사회가 양극화된 상황이 전쟁의 구조적인 원인을 이뤘다고 본 것입니다. 이를 넘어서려면 중간파의 존재가 중요한데 해방후부터 제1공화국이 건국되는 과정속에서 남한의 김구선생과 같은 폭넓은 중간파세력이 배제됐습니다. 저는 이점을 비판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음.

또 귀하는 1998. 11. 19.자 게재 중앙일보와의 대담에서

(4)『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전쟁의 책임이 어디에 있습니까 남쪽입니까 북쪽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말할 것도 없이 김일성을 정점으로 한 당시 북한 정치 지도부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음.

(5)『“북한의 전면 남침을 전제로 한국전쟁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의미 부여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전쟁은 좁게 보면 한반도에서 38선을 중심으로 일어난 남북한간 전쟁이지만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전쟁입니다. 예컨대 미·소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질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두 진영간 대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 국한시켜 볼 때는 남한 내부에서의 이념적 갈등과 남북한간의 첨예한 이념 대립의 결과물이기도 하죠”
“먼저 강조하고 싶은게 저는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비전문가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글에서도 친북주의나 친김일성주의를 표방한 적이 없습니다. 그같은 용어 역시 제 가치로 수용한 적은 없고 단지 서술적 용어로서 사용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6) 또『90년 발표한 글에는 ‘한국전쟁은 통일지향적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을 갖는 내전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한 반면, 96년 나온 글에는 ‘한국전쟁은 전쟁을 통한 공산주의 통일을 지향했던 전쟁으로서 시작했다’고 정의했습니다. 입장이 바뀐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전쟁에 관한 글을 처음 쓴 것이 80년대 말과 90년 사이인데 그때는 아직 민주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이행기였습니다. 당시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역사적 기원 내지 조건이 무엇인지 뿌리를 추적하는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분석했기 때문에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그글을 96년 수정 보완할 때는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뿌리 내리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한국전쟁을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두 글이 톤이 다르고 강조점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글 속에 흐르는 민중적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첨언하였음

(7)『전쟁 초기 적지 않은 남한 주민들이 북한 인민군을 환영, 지지했다고 했는데 어떤자료를 근거로 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브루스 커밍스 저서에서 일부를 인용했는데 인용부호를 달지 않아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제 실수를 인정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저는 수정주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공산측에 책임을 물으려는 전통주의 논리에도 찬성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였음.

(8)『최위원장의 최근 저서에 ‘이승만 정권은 미 군정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부 수립 이후 정당성 문제에 직면한 반면 북한 분단정권은 민족해방세력의 지지를 받고 탄생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건국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라는 질문을 받자,
『“저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민주적 시각으로 역사나 체제를 인식하다 보니 기본적으로 전체주의 통제나 억압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북한체제는 저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체제입니다. 남한과 비교가 되지 않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이고, 또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분이었기 때문에 이런 분이 정부를 구성했다는 것 자체가 정통성을 충분히 가질 만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다시『그렇다면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이란 공동논문에서 해방 직후 신탁통치 찬성세력을 ‘민주진영’으로, 반대세력을 ‘반민주진영’으로 표현한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질문받자,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만약 그렇게 표기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공동논문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쓴 글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아 놓쳐버린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또『같은 논문에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 ‘인민민주주의 혁명’등의 용어를 쓰셨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까』라고 질문받자,
『지금 시점에서는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앞으로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라고 말하였음.

(9)『분단을 피하는 대신 통일된 공산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분단이 됐을 망정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부분적으로 실현되는 것 중에서는 어느 것이 나았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받자,
『지금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분단된 형태로나마 정부가 수립돼 여기까지 온 것이 훨씬 바람직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라고 대답하였음.

(10)『최위원장을 ‘좌파’라고 보는 사람이 많은데 스스로는 어떤 성향이라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이념적 성향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습니다만 굳이 말한다면 개혁적 자유주의나 진보적 자유주의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수적 시각에서 볼 때 이것도 대단히 급진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건국이념이 자유민주주의인데 자유민주주의는 폭이 퍽 넓습니다. 극우 냉전반공 보수주의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는 보수적·냉전적 자유주의와 개혁적 자유주의로도 구분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학계에서 허용되는 이념적 지평이 상대적으로 넓은 반면 정치와 언론 등 우리사회를 움직여 가는 영역에서는 이념적 경로가 대단히 협소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음.

(11)『최위원장은 노동자·농민 중심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민중민주주의아닙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데모크라티는 원래 ‘민중의 힘’을 의미합니다. 소수 엘리트 지배층이 아니라 대중이 중심이 되는 정치체제를 가리킵니다. 한국적 조건에서 민주화가 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을 통해 실현됐다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엘리트보다 매스파워성장이 기본동력이 됐습니다. 대중들은 계급이라는 말을 포함하는 더 큰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주화의 핵심은 일반 대중의 힘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제도화하느냐에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음.

(12) 위 (1), (8), (9)에 게재된 바 귀하의『말』에 대비하여,
1998. 11. 10.자 1차 질의서 1항 (2), (3), (4), (5),  6항 (2), (4), (5), (6), (7)에 기재된 귀하저서내용과 본 2차 질의서 7항 (1), (2), (3), (4)에 기재된 귀하저서 내용이 객관적으로 서로 모순됩니까, 아니면 모순되지 않습니까.

(13) 위 (4)에 게재된 바 귀하의『말』이나 그런 취지는 귀하의 여러저서 어느곳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혹시 그런『말』이나 취지가 써있는 저서가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위 (4)에 게재된 바 귀하의『말』에 대비하여,
1998. 11. 10.자 1차 질의서 2항 (1), (2), (3),  3항,  4항 (1), (2), (3), (4), (5), (6), (7),  5항 (1), (2), (3), (4),  6항 (8)에 기재된 귀하 저서내용과 본 질의서 4항 (2),  7항 (3)에 기재된 내용이  객관적으로 서로 모순됩니까, 아니면 모순되지 않습니까.

(14) 위 (3), (5)에 게재된 바 귀하의『말』중,
『한국전쟁을 보다 평화주의적이고 민중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려 시도했다』는 부분이 있는데, 침략당한 나라의 국민이 국토를 방위하는데 평화주의적이고 민중적인 시각의 접근은 무슨 뜻인가요.
또『이념적으로 남한사회가 양극화된 상황이 전쟁의 구조적인 원인을 이뤘다』고 말하는데, 남한내의 자유로운 토론과 언론자유 나아가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세력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전쟁의 구조적인 원인을 이뤘다고 보는 것입니까.
귀하 저서에서 인용되는『남한의 혁명세력』과 타협하지 못한 것이 전쟁의 구조적인 원인이라고 보십니까. 나라를 그렇게 방위하는 겁니까.
또『김일성의 전쟁 결정에만 초점을 맞춰서 본다면 김일성을 규탄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지만 전쟁의 의미를 거기에만 한정지을 수 없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6.25발발의 책임이 당시 대한민국이 방위력을 확고히하지 못한 잘못에 있다는 뜻인가요, 미제국주의자와 손을 끊고 민중적 시각에서 평화적 대처를 하지 못한 잘못에 있다는 뜻인가요.
또 무슨 다른 의미가 있습니까.

(15) 위 (6)에 게재된 바 귀하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동일한 전쟁을 놓고서 어느때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가 또 어느때는 차분하게 다시한번 바라보는 것입니까.
입장에 변함이 없는 것입니까.
또 민족의 비극인 6.25를 놓고 전쟁을 일으킨 측, 불시에 침공을 한 측과 침략을 당한 측의 구분을 분명치 않게 서술하는 학문적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16) 위 (2), (9), (10)에 게재된 바 귀하의『말』에 대비하여,
1998. 11. 10.자 1차 질의서 7항 (1), (2),  9항 (1), (2), (3), (4), (5), (6), (7)에 기재된 귀하 저서내용, 그리고 본 2차 질의서 1항 (1), (2), (3), (4), (5), (6), (7), (8),  2항 (1), (2), (3), (4),  4항 (4),  5항 (2), (3), (4), (5), (6), (7), (8),  6항 (1), (2), (3), (4), (5), (6), (7),  7항 (8), (9)에 기재된 내용이 객관적으로 서로 모순됩니까,
모순되지 않습니까.

(17) 귀하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우리헌법상의『자유민주적 기본질서』내용을 잘 알고 있으리라 믿어집니다.
그 전제에서 질문컨대, 귀하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 찬성하지 않는가요, 찬성하는가요.
귀하는 우리헌법상의『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충성하여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 충성할 생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10. 귀하는 1998. 11. 19. 게재 동아일보와의 대담에서

(1)『(논쟁의 촉발은)좁게 보면 제 개인에 대한 공격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그 타깃이 개혁이나 변화에 대한 도전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국전쟁과 현대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고 시도했던 논문들인데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나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슈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으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2)『“사상검증이라는 용어 자체를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내면의 가치판단이나 신념체계 종교 사상 등은 민주주의 발전의 기초였습니다. 이런데에 자유가 없으면 민주주의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특정 언론이 우리 사회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한 신념체계나 가치체계를 기준으로 특정인을 검증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대통령 주변에 획일적 사고를 가진 사람만 있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라고 말하였으며,

(3)『“제 논문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과 소동은 냉전체제로부터 탈냉전테제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의 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시각과 그룹의 저항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이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국민통합인데 이런 이념적인 논쟁은 너무 소모적입니다. 전쟁이라는 경험을 중심으로 논쟁하면 감정적이 됩니다. 국민통합을 통해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이런 것을 대승적으로 극복해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음.

또  귀하는 1998. 11. 19. 게재 중앙일보와의 대담에서

(4)『이번 일련의 사태에 대해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은 ‘학자로서는 허용할 수 있어도 공직자로서는 안된다’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비민주적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사상검증’이라는 표현은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상검증이 아니라 공직자로서의 능력이나 적성·경력을 검증하는 것으로 언론이 제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사상’이라는 말은 의미가 크게 다르며 특정 언론매체가 사상을 독점한다는 것은 폭력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는 사람이면 공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음.

또 귀하는 1998. 11. 26. 문화일보에 게재된 조찬강연에서

(5)『학자로서 문제가 없으면 공직자로서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말하였음

(6) 위 (1), (2), (3), (4), (5)에 게재된 바 귀하의『말』은, 헌법상 국민의 알권리와 동일시되는 신문의 자유(Freedom of Press)와 헌법상 공직자의 국민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런가요, 안그런가요.
조용히 학문하는 사람(교수의 자유와도 정확히는 같은 것은 아님)의 학문의 자유와 실천적 공직활동과 사이에, 귀하는 차이를 두는가요, 차이를 두지 않는가요.


11. 1998. 11. 10.자 1차 질의서 1항 내지 15항 각 질문에 대하여도 대답해주시기를 다시금 촉구합니다.


(이 서신은 국민 모두가 읽고 생각하는 여론의 광장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어서 제1차 질의서와 함께 공개됨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1998.        12.       11.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회   장     정    기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