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성명서

제목 최장집 정책기획위원장께
등록일 1998-11-06 조회수 1028

최장집 정책기획위원장께

귀하의 저서 및 논문이 대한민국의 존립근거와 정통성을 훼손하였느냐 여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헌법 제66조 제2항 정부조직법 제4조 대통령제 14667호에서 규정하는 바 같이, 귀하가 『대한민국의 영토 보존과 헌법 수호의 책무를 진』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여 『국가 목표의 설정과 국가 주요 정책에 관하여』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브레인 트러스트 일을 하는 정책기획 위원장이기 때문입니다.
헌법 제7조 제1항에 의하여 공직자에 대하여『알권리』를 가지는 국민의 일원으로서, 헌법을 공부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법률인들로서 『여론의 광장(Public Forum)』에서 의문나는 점들을 질문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대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귀하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 4(1997. 4. 30 제1판. 제8쇄)』중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에서
(가) 『정국의 혁명과 반혁명의 갈등이 한국전쟁으로 점차 귀결되는 과정을 파악하는 것이 해방8년사 이해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중들의 요구와 행동의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 이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된다 (13쪽)』고 쓰고
『올바른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올바른 역사의 맥락을 파악하는 일은 시급히 필요하다. 13쪽』고 쓰므로써
『올바른 역사 파악의 필요성』이 머리말의 전제로 하고 있음.
(나) 『혁명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측면에서 본다면, 일제하의 모순의 심화로 인하여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이 반제반봉건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동원되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처벌을 비롯한 식민 자재의 척결을 요구하는 애국적 역량과 토지개혁을 비롯한 봉건 잔재의 척결을 요구하는 계급적 역량이 동원됨으로써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15쪽)』라고 쓰는 한편
『한편 지주, 일부 한인 자본가 등의 지배계급과 친일경찰을 비롯한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은 해방 후에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에 직면하여 반혁명세력이 되었고, 이들은 미군정이라는 외세의 지원과 일제가 남겨놓은 강력한 관료체제를 이용하여 민중들의 도전을 물리적으로 진압하게 된다. (16쪽)』라고 쓰고 있음.
(다) 『미·소의 분할점령은 이러한 혁명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소련군의 후원에 힘입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미군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이러한 혁명이 미군정의 반혁명정책에 의해서 결국 좌절되었던 것이다. 결국 북한에서의 혁명의 성공과 남한에서의 반혁명의 성공은 남북한에 적대적인 두 정권이 수립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19쪽)』고 쓰고
『미군정은 반혁명을 위해서 국내의 지주 및 매판자본가들과 연대하는 한편 일제의 관료체제를 복구하고 친일파·민족반역자·친미파 등을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동자·농민 등의 민중들을 대변하는 좌익세력은 민중적 조직역량에 바탕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20쪽)』고 쓰며
『이와 같은 해방 정국의 구조 속에서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성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혁명세력은 노동자·농민의 기층민중들을 기반으로 하여 애족적인 모든 요소들과 연대하려 했으며,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등을 통하여 정치세력화되었다. 반혁명세력은 미군정을 중심으로 지주계급·매판적 자본가·친일친미파 등이 결집되어 있으며, 이들은 한민당·이승만세력 등을 통하여 정치세력화되었다. (20쪽)』고 끄고
『일제의 패망으로 곤혹스럽게 되었던 지주·자본가 등의 지배계급가 친일파·민족반역자 등의 반민족적 세력은 미군정의 실시로 새로운 구원자를 만나게 되었다. 21쪽)』쓰고 있음.
(라) 『1946년 10월 1일 대구항쟁으로부터 시작되어 12월 중순 전주항쟁으로 종결되었던 10월인민항쟁은 약 두 달 반 동안 전국에 걸쳐 전개된 민중들의 들불과 같은 항쟁이었다. (27족)』고 쓰고
『전체적으로 볼 때 10월인민항쟁은 반제반봉건의 제반 요구들이 해결되지 않고 나아가 식량난을 비롯한 생활난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대구에서의 9월총파업을 계기로 폭발·전개된 민중의 항쟁이라 할 수 있다. (27쪽)』고 쓰며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되어 약 1년에 걸쳐 제주도에서 전개되었던 4·3민중무장봉기는 반혁명이 분단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제주도민에 대한 육지의 경찰 및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항하여 민중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사건이다. 이 봉기 역시 중앙의 지시 없이 야기되고 사후 추인된 듯하다. 이 봉기는 국군과 경찰의 진압으로 약 1년만에 거의 종식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약 3만~8만의 양민이 진압군에 의해 살해되는 참극을 낳았다. (27쪽)』고 쓰고
『민중들의 가열찬 투쟁과 미군정의 폭력적 진압이 반복되면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27쪽)』고 쓰며
『제주4·3민중무장봉기에서도 그 지역적 투쟁성이 높았다 할지라도 중앙과의 연계, 시기선택, 투쟁 방식 등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당시의 민중들은 미군정의 반혁명과 조국의 분단에 대항하여, 비록 수많은 피해를 당했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저항함으로써 민중역량의 진정한 실체를 보여주었다. (28쪽)』고 쓰고 있고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의 민중투쟁과 마찬가지로, 무장투쟁에서도 ­예컨대 여순봉기에서처럼­좌익지도부의 지도와 통제는 불완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투쟁에 대한 지도부의 지도와 계획의 부재, 아니면 지도부의 모험주의적 시도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된다. (30쪽)』고 쓰고 있음.
(마) 『남한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혁명으로 귀결되었음에 반하여, 북한에서의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민중들의 혁명열기가 소련군의 후원이라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을 바라볼 때 북한 자체의 혁명의 진전이란 측면 이외에도 통일문제와 관련된 북한의 정책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통일문제에 있어 민주기지 노선으로 지칭되는 북한의 통일전략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한국전쟁까지 전개되는 북한의 통일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 (31쪽 31쪽)』고 씀.
(바) 위 (가)의 머리말을 전재로 한 (나)~(마)에 쓴바 귀하의 인식과 판단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7. 4. 30. 제1판 제8쇄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뀌었습니다. 바뀌었다면 바뀐 의견을 글로 써서 밝힌 일 있습니까.
2. 귀하는 같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 4』중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에서
(가) 『우선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필연성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되고, 다음으로는 구체적으로 전쟁이 촉발되는 원인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33쪽 34쪽)』라는 접근방법을 택하고 있음.
(나) 『혁명과 반혁명의 갈등은 이제 남북 국가권력 사이의 갈등으로 전화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에서의 무장투쟁과 38선상의 군사충돌로 나타났다. 즉 통일을 둘러싸고 남북의 정권이 무력으로 대치하는 상황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34쪽)』라면서
『요컨대 국내외적인 배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상황은 점차 한국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상황으로 나아갔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구조적 상황 속에서 한국전쟁이 촉발되는 원인과 과정을 살펴보자. 1949년 여름에 38선상에서는 남북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것은 주로 옹진반도를 중심으로 발생하였고, 충돌의 상당 부분이 남한측의 공격에 의해서 야기되었다. (34쪽)』고 쓰고
『한편 38선상의 충돌이 빈번해짐과 동시에 남한에서 무장유격대의 공세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무장유격대의 공세가 38선상의 남한의 압력을 완화시키기 위한 제2전선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세 자체의 목적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인지는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34쪽 35쪽)』고 쓰고 있으며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중점을 두었던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전쟁 발발 책임의 문제가 과대하게 고려될 필요는 없다. (36쪽)』고 쓰고 있음.
(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자원에 의하였든 강제징병에 의하였든 약 40만 명의 남한 청년들이 북한의 의용군으로 동원되었다 한다. (37쪽)』고 쓰고
『제1국면의 특징은 북한군이 파죽지세와 같은 공격을 하고 점령지역에서 급속하게 토지개혁을 비롯한 민주개혁을 수행했다는 점과, 미군이 신속하게 전면적인 개입을 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40만의 남한 민중이 자의이건 강제이건 간에 북한군에 참여함으로써 실제적인 전쟁의 양상은 미군 대 한국인 사이의 싸움이라는 모습을 띠게 만들었다. (37쪽)』고 씀.
(라) 『한국전쟁은 남한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은 경제적으로 남한이 세계자본주의체제 속에 편입되어 종속적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정치적으로 반공체제가 강력하게 구축되도록 만들었다. (43쪽)』고 쓰고 있음.
(마) 위(가)의 접근방법으로 (나)~(라)에 쓴바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7. 4. 30 제1판 제8쇄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한 의견이 바뀌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의견을 글로 써서 밝힌 일 있습니까.
3. 귀하는 같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 4』중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에서
『이러한 역사의 총체적 구조 속에서 이 역사의 과정을 기본적으로 추동했던 대립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급적·민족적 견지에서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려 했던 한국 민중들을 한 축으로 하고, 새로운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서 한반도에서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관철시키려 했던 미국의 이해를 또 다른 한 축으로 하는 대립이었다고 할 수 있다. (44쪽)』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러한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7. 4. 30 제1판 제8쇄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뀌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의견을 글로 써서 밝힌 일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