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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터뷰] 한국사람들 자유에 취해 눈·귀 먼 것 같아요
17년전 ‘美대통령 만났던 꿈’이 현실로
한국신문 아니었으면 北에 끌려갔을 것
부시에 뽀뽀 한미양 “엄마가 시켰어요”
▲ 지난달 28일 미국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만났던 탈북자 김한미양 가족. 인형을 품에 안은 한미양이 지난 3일 아버지 김광철씨, 어머니 이귀옥씨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부시 대통령 뺨에 뽀뽀를 했던 한미양은“엄마가 시켜서 했다”며 웃었다. /이명원기자 m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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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미(6)양 가족은 표정이 밝았다. 4월28일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난 이들은 지난 2일 서울로 돌아왔다. 3일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만난 한미양은 빨간색 점퍼에 작은 인형을 들고 연신 “까르르” 하고 웃었다.
―한미야, 부시 할아버지가 안아줬을 때 기분이 어땠어?
“할아버지 아니에요. 아저씨예요.”
의외의 대답이 야무지다. 부시 대통령 뺨에 뽀뽀는 스스로 한 것이냐고 물었더니, 유치원에 다니는 한미는 “엄마가 시켰어요”라며 엄마 체면을 조금도 안 봐준다. 한미는 부시에게 뽀뽀하면서 “사랑해요”라고 했고, 통역이 ‘아이 러브 유’라고 번역해줬다. 한미의 티없는 행동에 면담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전하는 아버지 김광철(32)씨에게 물었다.
―부시 대통령은 뭘 궁금해 하던가요?
“우리 가족의 탈북 과정을 물었어요. 1999년 처음 탈북했다가 2001년 3월 북한으로 끌려간 일, 2001년 8월 재탈북, 2002년 5월 선양(瀋陽)의 일본 총영사관에 들어간 일 등을 자세히 얘기했지요.”
김씨는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그날 우리는 부시 대통령께 호소문을 전달했다”며 A4용지의 복사본 두 장을 보여줬다.
“저희 가족을 백악관 집무실로 초청해 주신다는 소식을 어제 아침에 듣고 저는 가슴이 몹시 뛰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15살 때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꿈을 꾼 것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
호소문 맨 끝엔 ‘북한주민 2000만 해방과 30만 탈북자 구출을 위해, 한미 가족을 대표하여, 김광철 드림’이라고 돼 있다.
한미네 가족과 일본 피랍여성 메구미의 어머니 등과 만난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중 가장 감동적인 만남이었다”며 “미국 대통령으로서 인권과 자유가 없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끝까지 일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드는 둥 마는 둥하며 풀어놓은 한미네의 ‘탈북 스토리’는 몇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것 같았다.
―왜 탈북을 결심했나요?
“할아버지의 ‘성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어릴 때 우리 가족이 양강도(兩江道) 삼수갑산 부근의 동광(銅鑛)으로 추방된 적이 있습니다. 1년 뒤 회령으로 돌아왔지만, 1997년 아버지가 김정일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뒤 희망이 없어졌어요.”
회령 망양고등중학교를 나온 김씨는 우마차로 중국에서 들어오는 화물을 나르는 일을 했다. 그때 이귀옥(33)씨를 만나 결혼했지만 늘 탈북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부부는 1999년 7월 한미양을 임신한 채 국경을 넘었고, 2000년 1월 중국 땅에서 한미를 낳았다. 연변에서 1년간 숨어 지내다가, 2001년3월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거기엔 탈북자 길수 어머니와 외할머니도 포함돼 있었다.
―길수네와는 어떤 관계…?
“길수 어머니가 나의 외사촌 누나이지요. 아버지는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엄마 쪽으로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어요.”
몇 달간 조사를 받던 중 보위부원들이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를 내밀며 “이래도 부정할 거야”라고 소리쳤다. 북경으로 먼저 간 길수와 길수 할아버지 등 7명이 북경의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 공관에 뛰어들었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탈북자 ‘외교공관 진입’의 첫 사례였다. 그때 기자는 북경에서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려던 차에 이 사건이 터져, 10여일간 더 체류한 적이 있다.
―탈북자가 북한으로 잡혀가면 어떻게 되나요?
“죄질에 따라 총살도 당하지요. 저는 보위부 감방에 갇혔는데, 10평도 안 되는 감방에 50여명이 쪼그리고 앉아있지요. 이가 온몸을 기어 다녀도, 한겨울에 영하 35도를 견디려면 몸을 밀착시킬 수밖에 없어요. ”
광철씨는 몸이 쇠약해져 화대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 기회를 이용해 탈출했다.
“낮부터 물을 거푸 들이마셔 밤에 설사가 나게 했지요. 저녁 7시에 화장실 가고 9시에 가고, 10시에 또 갔지요. 지도원의 감시를 피해 미리 준비해둔 철사로 수갑을 풀고, 화장실 창문을 넘어 산으로 도망쳤지요.”
그 길로 회령에 도착해 먼저 석방된 아내와 한미를 데리고 중국 국경을 다시 넘었다. 연변에서 붙잡혀간 지 5개월 만이었다.
2002년 5월 한미네는 선양의 일본 총영사관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아내 이귀옥씨는 정문에서 공안에 붙잡혀 몸부림을 치고, 딸 한미가 영사관 안쪽에서 이 광경을 울먹이며 바라보는 장면이 전세계에 TV로 보도됐다. 중국 경찰은 영사관 안에까지 들어와, 진입에 성공한 광철씨 등 모두 5명을 잡아갔다.
―중국 감방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사형수 취급이지요. 감방 안에서조차 일반 수갑이 아닌 철 신발을 채우더군요.”(김광철)
“처음에는 푸대접이더니, 1주일쯤 지나자 라면도 주고 아이들 간식도 줘요. 대접이 너무 좋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잘 먹어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이귀옥)
보름 뒤 이들은 외교당국의 노력으로 한국측에 인도됐다. 김씨는 “한국 신문의 힘이 컸다”며 고마워했다.
이들은 전남 순천에 정착했다. 김씨는 정착지원금으로 컴퓨터 수리점을 열었지만,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우리는 문명세계에 들어온 미개인과 같아요. 갓 태어난 아기 심정으로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는 요즘 순천 기아자동차 대리점의 판매사원이다.
식당에서 일한다는 이귀옥씨는 “12평 아파트에 사는데 열심히 저축해 32평으로 옮기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이들 가족은 요즘 밤이면 TV 채널권을 놓고 다툰다.
“한미 아빠는 다큐멘터리 좋아하고, 저는 드라마 좋아하고, 한미는 만화영화 좋아해서, 자주 다퉈요. 호호호.”(이귀옥)
정리=신정선기자 violet@chosun.com
입력 : 2006.05.05 23:07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