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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에 관한 향군소신 不變"
“안보연구소 안보연구센터로 확대개편...인터넷기능도 강화할 것”
대한민국재향군인회(향군) 제31대 회장에 박세직(朴世直. 73세. 육사12기) 前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이 선출, 향군의 안보기능 강화가 예상되고 있다.
21일 서울 잠실 향군회관에서 열린 제52차 전국총회 결과 박세직 후보는 천용택 후보와 박빙이라는 예상과 달리 1차 투표에서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朴후보는 참석 대의원 359(재적 364명)중 204표를 얻었고, 천용택(千容宅) 후보는 113표, 노무식(盧武植) 후보는 42표를 얻는데 그쳤다.
北核 위기와 反美 확산 등 안팎의 안보위기 속에서 치러진 향군회장 선거는 초미(焦眉)의 관심사였다.
일부에서는‘박세직*천용택’경합에 향군의 안보활동 강화(强化)와 포기(抛棄)라는 공식을 적용해 해석했다. 안경본 활동 등 각종 안보운동을 주도해 온 박세직씨와 김대중 정권 하에서 국방부장관*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천용택씨의 최근 궤적이 판이(判異)했기 때문이다. 애국단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내면서 2002년 안기부X파일 등에 연루됐던 千후보 당선에 우려를 표시했다.
박세직 후보의 향군회장 출마는 국민 저변에 형성된 이 같은 위기감의 반영이었다. 국가보안법폐지를 둘러싼 향군과 정권의 갈등 양상 등 복잡한 상황에서 이뤄진 출마에 대해 박세직 회장은 “국가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고 참여했다”고 답했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국가의 건강은 안보입니다. 지금은 국가안보가 위험하고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부지불식간 대한민국 역사는 왜곡되고 미국이 주적이라는 식의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북한 핵무기는 2010년이면 50개로 늘어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판단입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북한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처지로 전락할 것입니다. 안보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면서, 나라 걱정하는 軍선후배 분들의 권유가 잇따랐습니다. 마지막 봉사, 국가에 마지막으로 봉사하자는 생각으로 향군회장에 출마하게 됐습니다.”
그는 안보를 지키는 다섯 개 보루로 “국군, 국가보안법, 주한미군, 한미동맹, 향군”을 들면서 “안보가 어려운 상황일수록 향군의 역할은 크다”고 말했다.
“향군法은 향군의 목적으로 회원 상호간 친목도모, 복지증진과 함께 안보활동을 들고 있습니다. 안보를 소홀히 하는 것은 향군의 임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안보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향군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朴회장은 안보기능강화를 위한 향군의 사업으로 “안보상황을 진단하고, 알리는 계도(啓導)기능을 확충할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안보연구소를 안보연구센터로 확대 개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朴회장의 비전에는 코나스(향군산하 인터넷안보신문) 등 인터넷기능강화도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모 후보가 회장이 되면 코나스가 폐지될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다는 기자의 질문에“코나스 폐지는 말도 안 된다”며“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사상전을 벌일 인터넷전사들을 10만으로 늘리는 등 인터넷기능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朴회장은 취임사에서 ‘정치적 엄정중립’과 ‘자유민주주의체제 수호활동’을 강조했었다. “정치적으로 엄정한 중립을 지키고 향군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모든 행위나 이를 자행하는 집단에 대하여는 全회원이 대동단결하여 강력하게 대처해나갈 것”이라는 요지였다.
기자는‘정치적 엄정중립’과 ‘자유민주주의체제 수호활동’이 충돌할 경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물었다. 정부산하 위원회가 共産혁명단체였던‘남민전’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는 등 정치권에 의한 안보침해가 잦고, 안보를 지키기 위해선 정치적 중립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朴회장은 이에 대해 “향군의 소신은 변함없다”고 말했다.
“정치적 중립은 향군법에 규정된 사항입니다. 향군은 개별회원들의 정당 활동에 간여할 수 없고 정당 활동에 중립을 지킬 것입니다. 다만 안보분야에서 향군의 소신은 변함없습니다. 안보가 병에 걸리면 나라가 건강을 잃게 됩니다. 사람도 건강을 위해선 먹기 싫은 것과 쓴 약을 먹어야 합니다. 향군의 주장이 정치적으로 쓴 약이 돼도 국가 건강을 위한 자양분으로 여겨주길 바랍니다. 향군은 특히 국가보안법은 최후방어선으로 여기고 이를 수호할 것입니다. 물론 집회에서 정권퇴진과 같은 과격한 언동은 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향군 선거 결과는 朴회장의 낙승(樂勝)이었다. 그러나 “선거 운동은 쉽지 않았다”는 게 朴회장의 설명이었다. 보직이 없는 후보자는 대의원을 만날 수 없다는 향군법 규정으로 朴회장은 다른 두 후보들보다 2~3개월 뒤에야 선거운동을 시작해야 했다. 반대 측의 흑색선전에 이어 돈 봉투를 뿌리는 일까지 생겼다. 어느 때보다 높은 선거 열기는 혼탁한 선거를 낳고 있었다.
“같이 일한 사람들에게‘우리는 뿌릴 돈도 없지만, 있어도 안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주어진 룰에 최선을 다하자, 정정당당하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선거는 스포츠입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어진 룰을 지키면서 이길 때 승리가 값진 것입니다.”
향군 하면 떠오른 것은 시청 앞 국민대회이다. 朴회장은 국민대회에 관한 향후 생각에 대해 “결정적 시기엔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反美촛불시위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체제를 지키겠다는 장외(場外)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세계인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이 나라는 뭐가 되겠습니까? 국민대회는 비용과 효과 면에서 최소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시기에는 국민의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88올림픽`86아시안게임 성공 이끈 박세직 회장
올림픽 성공으로 냉전종식, 한국은 중흥(中興)
81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예편한 朴회장(육사12기)은 총무처장관(85.2~86.1), 체육부장관(86.1~86~8), 국가안전기획부 부장(88.12~89.7), 서울특별시장(90.12~91.2)과 제14*15대 국회의원(92~94. 경북구미 신한국당*한나라당*자민련)을 지냈다.
朴회장은 88올림픽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86년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위원장, 88년 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를 거쳐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일생에 가장 뜻 깊은 일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단연“88년 서울 올릭픽”을 꼽았다. 당시 학생과 소위 재야세력들은 88올림픽을 12*12사태 후 등장한 군사정권의 유지*연장 수단으로 간주하며 반대했고, 시민들은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올림픽 유치냐’며 비난했다. 북한은 83년 아웅산 폭탄테러, 87년 KAL858기 폭파사건 등 테러를 자행하며 한국의 올림픽 유치를 방해했다. 안팎의 불안정으로 국제사회는 올림픽 개최지 변경을 논의할 정도였다.
그러나 88올림픽은 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84년 LA올림픽 같은 반쪽올림픽이 아닌 東西화합의‘완전올림픽’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12개로 종합4위에 올라 국력을 세계에 과시했다. 많은 시민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해 국민화합도 이뤄졌다. 북한은 테러를 자행하지 못했고, 올림픽은 안전하게 치러졌다. 올림픽 기간 중 예견됐던 태풍들은 일본과 중국 쪽으로 빠져나갔다. 세계인들은 화창한 날씨 속에서 한국의 경제적 성공과 민주화 이후 성취를 보며 경탄했다. 올림픽 성공은 대한민국 중흥(中興)의 전환점이 됐다.
세계사적으로도 88올림픽 후 동구 공산권 몰락과 냉전 종식은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朴회장은 2002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세계적 변화가 서울올림픽을 통해 시작됐다고 말했었다.
“86년 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회(ANOC) 제5차 총회가 한국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미수교국인 소련, 중공, 동구권 공산국가 등 150개국이 참석했죠. 소련의 그라모프 체육부장관과 KGB 요원들이 참여했는데 저는 그들에게 동대문*남대문 시장 등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 하에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장에 넘쳐나는 물건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올림픽 기간 중 TV를 통해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본 동구권 사람들은 먹는 문제도 해결 못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 후 89년 7월 평양축전을 개최했다. 그러나 오히려 공산주의 북한의 피폐한 실상이 세계에 알려졌다. 88올림픽과 89년 평양축전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한국의 성공과 공산주의를 선택한 북한의 실패를 극적으로 보여줌으로써 全세계인들을 자극했다. 이후의 결과는 세계사를 바꿔버렸다. 89년 11월9일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같은 해 12월 미*소는 냉전종식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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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욱기자 2006-04-27 오후 2:2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