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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北 지령받은 비밀 지하당 조직
사형집행된 김종태·이문규 北서 영웅화…생존 최고 간부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신영복의 하부선 박성준 성공회대 겸임 교수는 ‘반전평화’ 내세워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의 국무총리 지명으로 韓 의원의 남편 박성준 씨가 연루됐던 것으로 알려진 68년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통혁당 사건은 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통혁당은 김종태(金鍾泰)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김질락(金瓆洛)·신영복(申榮福) 주도의‘민족해방애국전선’과 이문규(李文奎)·이재학(李在學) 주도의‘조국해방전선’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통해 공산혁명을 획책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北지령받는 지하당이 분명”주범 김질락
통혁당은 북한과 연계된 지하당이었다. 주동자였던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越北)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통혁당 하부선이었던 이진영·오병헌은 68년 4월 22일 월북(越北)해 교육을 받던 중 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귀환하지 않았다.
김종태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 7만 달러, 韓貨 3,000만 원, 日貨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김종태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김종태를 구하라’는 특별지령을 받은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공작선은 68년 8월 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軍警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이관학, 송승환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김종태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백두일이라는 가명으로 북한정권 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인 김질락은 옥중유고에서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되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쓴 바 있다.
“통혁당은 국제공산당의 일원”
통혁당은 또한 공산혁명조직이었다. 김질락의 앞의 수기 중 65년 11월초 통혁당 결성 당시 김종태의 제안설명 중 일부를 인용해 본다.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反帝·反봉건·反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 우리의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 “남반부를 불법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중앙당(中央黨)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이 낭독됐던 것으로 같은 수기는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통혁당은 공산혁명을 목표로, 중앙당(中央黨)인 북한 조선로동당의 지휘를 받는 남한 내 지하당(地下黨)이었다.
통혁당의 성격은 68년 공판 당시 언론에도 보도됐다.
김질락은 68년 11월 30일 공판정에서 “反美·反제국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ABC이다. 나는 <청맥>의 지면을 통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의 反美·反괴뢰투쟁을 선동하였다”고 말했다.
김질락은 그러나 68년 12월 18일 공판정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큰가를 뉘우칠 뿐이며 정당함을 주장할 것이 없다”고 변호인 신문을 거부한 뒤 “그동안 공산주의를 위해 싸워 왔으나 이제는 공산주의자로서 죽고 싶지 않으며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고 참회했다.
北, 통혁당 연루자들 영웅화, 평양에 ‘김종태 거리’ 명성
통혁당 사건으로 북한에 건너가 로동당에 입당한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을 당했다. 신영복, 이재학, 오병철, 신광현, 정종소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박성준은 15년형, 김종태의 아내 임영숙은 1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기타 인물들은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 이후 연루자들에 대한 영웅(英雄)화에 나섰다. 69년 1월 25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종태가 69년 7월 10일 사형집행을 당한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69년 7월 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 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김종태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區분대·區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다.
69년 11월 6일 이문규가 사형집행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김질락은 북한정권으로부터 변절(變節)을 이유로 외면당했다.
살아 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를 받아 출감했다. 그는 89년 이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신영복의 하부선으로서 자신의 처 한명숙(현 국무총리 내정자), 박경호, 김국주 등을 포섭한 혐의 등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던 박성준 씨 역시 현재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민중신학자 안병무(安炳茂) 교수(작고)가 설립했던 신학연구소의 운영책임을 맡았으며 최근 종교공동체연대 등의 설립에 참여, 소위 반전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다.
통혁당 잔존세력 지하활동 지속...`主體思想` 받아들여 당 재건 기도
통혁당은 68년 조직원 대부분이 검거됐지만, 북한과 연계된 잔존세력은 이후에도 지하당 활동을 계속했다.
69년 8월에는 통혁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통혁당 선언·강령을 공식채택하기도 했다. 이 선언과 강령을 채택한 통혁당 중앙위원회의 실체(實體)에 대해 이론(異論)이 있다. 그러나 통혁당 잔존세력의 당재건 활동과 공안당국의 검거가 70년대까지 계속된다는 점에서, 통혁당 중앙위원회가 북한에 있다 하더라도 예하 지하당 조직 내지 잔존세력은 남한에서 계속 활동해 왔다는 게 공안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실제 통혁당 잔존세력의 당(黨)재건은 69~79년간 9차례나 검거됐다. 69년 경남 통혁당 재건 사건·71년 통혁당 구성 기도 사건·74년 경북 통혁당 도당 사건 등이 그것이다.
통혁당은 당 재건 과정에서 북한에서 체계화되기 시작한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69년 발표된 통혁당 선언·강령 역시 소위 “김일성 원수의 위대한 혁명사상,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선언은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맑스-레닌주의를 현시대와 우리 조국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主體思想)이다. 주체사상(主體思想)은 40여년간의 험난한 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완벽함을 과시한 우리 시대의 맑스-레닌주의이다”고 주장했다.
선언은 또 “우리당은 바로 이 위대한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리념으로 삼고 있기에 불패이다. 우리 당의 최고목적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인류의 세기적 숙명이며 최고리상이다”며 “미군침략군을 격퇴하고 괴뢰정권을 타도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인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김성욱기자 2006-04-05 오후 6:3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