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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무위원 紙上청문회]<下>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
1일 국회 본회의에 나온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왼쪽)가 웃으며 한 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유 내정자는 자신의 장관 지명에 대한 열린우리당 내부의 반발 움직임이 거세지자 공개적인 언행을 자제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 열린우리당에는 평소 공격적 언사와 독설로 곳곳에서 갈등을 일으켰던 유 내정자의 지금의 태도가 언제까지 갈지 지켜봐야 한다는 냉소적 분위기도 있다. 김동주 기자
《평양에 사는 전동현 씨는 지난해 말 ㄷ구역의 신축 아파트를 사면서 한참 고민했다. 이 아파트는 40평형대의 고급주택으로 가격이 2만 달러에 이른다. 북한에서 2000달러 이상의 고액거래는 주로 달러로 한다. 물론 국가 모 부서의 외화벌이기관 책임자인 전 씨에겐 큰돈이 아니다. 사두면 1년 안에 수천 달러의 시세차익도 기대된다. 하지만 전 씨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국가 검열을 우려했다. 자금 출처를 캐물으면 부정축재 사실이 드러나 처벌받기 마련. 전 씨는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결국 아파트를 구입했다. 자기보다 더 높은 간부들도 저마다 사는 것을 보고 그렇게 했다. 설마 노동당이 그들을 다 잡아가 제 발등을 찍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유시민(柳時敏)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는 세상에 처음 이름이 알려질 때부터 시비와 ‘논란’을 동반했다. 그가 서울대 재학시절 발생한 ‘서울대 민간인 린치 사건’이 시초다.
이 사건은 1984년 9월 17일 서울대 학생들이 타 대학생 등 4명을 정보기관원의 프락치로 오인해 10일 동안 감금 폭행한 사건이다.
임신현(48) 손형구(41) 정용범(47) 전기동(51) 씨 등 피해자들은 폭행과정에서 실신하거나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고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유시민 내정자 등 학생회 간부 6명이 폭행의 주동자로 지목돼 징역 10개월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구속됐던 학생회 간부 중에는 윤호중(尹昊重) 열린우리당 의원, 이정우(李政祐) 변호사, 백태웅(白泰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 등도 있다.
유 내정자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자 이에 불복해 항소했고 2, 3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재판 과정에서 유 내정자는 폭행 사실을 부인하며 항소이유서를 제출했고, 동아일보가 그 내용을 보도한 이후 ‘유시민 항소이유서’는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필독서처럼 읽히기도 했다.
선량한 민간인에게 린치를 가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운동권과 재야 등에서는 이 사건이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통했고, 유 내정자를 포함해 ‘폭행 주동자’로 처벌받은 사람들은 민주화운동투사로 간주돼 왔다.
그리고 22년이 흐른 지금 유 내정자는 현역 국회의원에 장관 내정자에까지 올랐다.
반면에 당시 억울하게 폭행당했던 피해자들은 아직도 폭행의 후유증을 호소하며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정치권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당시 폭행이 기본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였다는 점에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 폭행을 당하던 중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갔던 전기동 씨는 2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유 내정자는 직접 폭행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당시 상황에 깊숙이 개입했다”며 “그는 장관뿐 아니라 국회의원 등 모든 공직에 있어서 부적격자”라고 말했다.
전 씨는 당시 정신적 충격으로 지금까지도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가 하면 17대 총선 직전인 2004년 4월 12일엔 유 내정자를 허위사실 공표 혐의(선거법 위반)로 검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유 내정자가 선거홍보물에서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저를 조작으로 엮어 넣은 사건”이라고 기재한 것 등을 문제 삼은 것.
전 씨는 “지금까지 피해자에게 사과 한번 했다면 고소나 소송까지 갔겠느냐. 그게 화가 나는 것”이라며 “서울대 사건은 인권 유린이란 반민주화 운동인데도 민주화 운동처럼 활용하는 것을 참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유 내정자의 지인들은 “(서울대 민간인 린치 사건은) 유 내정자에겐 잊고 싶은 일일 것”이라고 말한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DJ-민주당-정동영과 ‘인연’이 ‘악연’으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의 정치 역정에는 ‘갈등과 반목’이 특히 많다.
그는 1988년 13대 국회 당시 평화민주당 소속이던 이해찬(李海瓚) 의원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평민당은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만든 정당.
그러나 이 의원을 고리로 한 유 내정자와 DJ의 인연은 1997년 대선 때 ‘악연’으로 변했다.
유 내정자는 대선을 7개월여 앞두고 ‘97년 대선게임의 법칙’이란 저서를 통해 ‘DJ필패론’과 ‘제3후보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대선 결과는 그의 예상과 달리 DJ의 승리로 끝났다. 그와 DJ 측의 간극도 되돌리기 어려웠다.
이후 유 내정자는 동아일보 칼럼니스트, MBC ‘100분 토론’ 진행자로 활동하다 2002년 8월 정치권으로 ‘컴백’했다. 그는 한나라당을 탈당한 김원웅(金元雄) 의원과 개혁국민정당을 만들어 그해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를 지지했다.
노 대통령과의 이런 인연은 그가 정치적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03년 4·24 경기 고양덕양갑 재선거에서 민주당은 자체 후보를 선출했으나, 이상수(李相洙) 당시 사무총장 등 ‘친노’계 신주류는 다른 당 소속인 유 내정자로 후보단일화를 밀어붙여 결국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다.
당시 민주당 신주류의 실세였던 정동영(鄭東泳) 현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은 유 내정자의 선대위원장을 맡아 덕양갑 선거구에서 살다시피 하며 전력 지원을 했다.
하지만 유 내정자는 이처럼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 민주당과 반목하게 됐다. 유 내정자는 “민주당은 망할 정당”이란 주장을 대놓고 하고 다녔던 것.
당시 유시민 캠프의 한 조직책(현 민주당 당직자)은 “‘망할 정당’이라던 민주당의 금전적, 물적, 인적 지원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민주당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하기도 하는 유 내정자의 모습을 보면서 도덕적 이중성과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의 선대위원장이었던 정 상임고문과의 관계도 파탄으로 끝났다. 유 내정자는 2005년 4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동영계는 폐쇄적이고 퇴행적”이라고 비난했고, 이후 양자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선 유 내정자의 이런 경력을 둘러싼 도덕성 시비가 제기될 전망이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