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국무총리가 3일 북중미 3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났을 때 세종시 수정안의 국회 부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면서 ‘사직서’도 함께 제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된 다음 날인 지난달 30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세종시 수정안을 설계했던 책임자로서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밝혔던 정 총리는 3일 이 대통령을 독대하러 갈 때 사직서를 품에 넣고 갔으며 실제 전달까지 한 것으로 안다고 여권 핵심 인사들이 11일 전했다.
이 대통령이 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청와대와 총리실 주변에선 “세종시 문제는 정 총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함께 같이 갑시다”라고 했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정 총리는 대화 내용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다. 다만 이 대통령은 정 총리의 사직서를 되돌려주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한 인사는 “정 총리의 사의 표명을 그 자리에서 ‘수락’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려’한 것도 아니다”며 “굳이 말하자만 ‘유보’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정 총리는 북중미 순방을 떠나기 전에도 이 대통령에게 “순방 도중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되면 제가 다 책임을 지겠다”고 했고 이 대통령은 “허허” 웃기만 했다고 또 다른 여권 인사가 전했다.
정 총리 거취 문제가 정리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이 대통령의 이런 알쏭달쏭한 태도에 기인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 대통령은 정 총리에 대한 인간적 정치적 신뢰가 두터우며 세종시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워 정 총리를 사퇴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말했다.
다만 집권 중후반기 새로운 국정 비전을 제시하고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차원에서 총리 교체까지 포함한 내각 진용 개편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런 속내를 읽고 있는 청와대 핵심 참모들이 최근 여러 채널을 통해 정 총리 측에 ‘이심(李心)’을 전달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 총리는 세종시 문제 때문에 교육 등 다른 국정 현안을 제대로 다룰 기회를 갖지 못한 데 일말의 아쉬움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사직서까지 제출한 것으로 볼 때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이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적극 협조하겠다는 태도인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안팎에선 이 대통령이 ‘대안 부재’ 및 국회 인사청문회 부담 등으로 정 총리를 당분간 유임시킬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지만 정 총리를 모양새 좋게 퇴장시키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최근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논란이나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을 둘러싼 여권 내 잡음 등도 정 총리 거취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조만간 주례보고나 별도의 기회를 통해 정 총리를 따로 만나 총리 교체 문제에 대한 최종 매듭을 지을 것으로 전망된다. 청와대의 한 핵심 참모는 7·28 재·보궐선거 이전에 개각이 단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정 총리는 교체될 경우 장관 제청 절차에 협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 대통령은 한나라당 전당대회(14일) 직후인 15일경 수석비서관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신설된 사회통합수석의 경우 이 대통령의 재가 여부에 따라 12일 먼저 발표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