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바보처럼 살았어요.”
1985년 독일 유학 당시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탈출한 오길남(68)씨는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한 정부출연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퇴직한 오씨는 술에 의존해 과거에 얽매인 채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1985년 독일 튀빙겐에서 유학하던 오씨는 평소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에 비판적인 발언들을 곧잘 하던 학생이었다. 이런 그를 눈여겨본 북한 기관원들은 오씨에게 다가가 간염을 앓고 있던 아내의 병을 낫게 해주겠다면서 좋은 직장도 내주겠다고 꾀었다.
“아내는 북한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나는 반대를 무시했죠.”
동독과 소련을 거쳐 이들은 평양에 1985년 12월 3일 도착해 산악지대의 군부대로 끌려갔다. 오씨는 “군부대로 끌려갔을 때에서야 비로소 아내의 말이 옳았고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아내의 간염 치료는커녕 이들은 수개월간 김일성의 교시들만을 반복학습해야 했다. 이후 대남선전 방송에서 일자리를 얻었지만, 북한 당국은 오씨에게 곧 독일로 돌아가 한국 유학생들을 포섭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물론 가족은 데리고 갈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내가 한국 유학생들을 데려오겠다고 하자 아내가 내 양심에 비춰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라면서 얼굴을 때렸어요. 북한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도 했죠. 교통사고로 이미 가족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북한당국의 지령을 받고 독일로 향하던 그는 결국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구조를 요청했고, 1992년에는 한국 대사관에 자수했다.
오씨가 북한을 탈출한 직후 그의 아내와 딸들은 체포돼 ’15호 수용소’로 이송된 것으로 전해졌다.
- ▲ 큰딸 혜원, 아내 신숙자, 그리고 작은딸 규원의 모습. 1991년 1월 20일, 윤이상이 가족의 육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 한 개와 함께 전달한 가족사진 여섯 장 가운데 하나다. 그곳에는 큰딸 혜원과 둘째 딸 규원의 짤막한 편지도 들어 있었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아빠! 나 혜원이야요. 며칠 전에 아버지와 함께 생일을 즐겁게 보내는 꿈을 꾸었어요. 아버지! 부디 몸 건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에 아빠라고 소리 내어 부르니 울음이 납니다. 아빠! 나는 규원이야요!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어요. 보고 싶어요, 아빠! 아버지와 만나는 날 나는 무엇을 선물할까요? 아빠, 안녕! 1991년 1월 11일 평양에서'
WP는 오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면서 악명 높은 ’15호 수용소’는 공개처형이 흔하고 구타와 강간이 횡행하며 수감자들은 굶주림과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으로 알려졌고 전했다.
또한, WP는 북한이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한국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6개의 수용소에 15만4천명을 투옥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