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리드 미국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가운데)가 22일 워싱턴 의사당에서 건강보험 개혁법안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갖기에 앞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건보 개혁안에 대한 상원의 최종 표결은 24일 실시될 예정이다. 왼쪽은 크리스토퍼 토드 상원은행위원회 위원장, 오른쪽은 맥스 보커스 상원 재무위원회 위원장이다. 워싱턴=AP 연합뉴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최우선 개혁과제로 내세운 건강보험개혁법안의 상원 통과가 눈앞에 다가왔다. 올해 미 의회에서는 최대 현안인 건보개혁을 둘러싸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치열하게 맞붙었다. 여야 의원들은 밤새 토론하고 휴일에도 의회에서 격론을 벌였다. 이들은 건보개혁을 놓고 “개혁”(민주당)과 “개악”(공화당)이라는 평행선을 달렸지만 첨예하게 대립한 상황에서도 물리적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다. 토론할 때는 상대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도 마지막 표결 결과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해머와 드릴이 난무하고 몸싸움이 다반사인 서울 여의도 국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미 의회에선 다수결 원칙과 승복의 정치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법안에는 반대하지만 법안 처리까지 반대하진 않는다.” 건강보험 개혁에 반대하는 미국 공화당 미치 매코넬 상원 원내대표(가운데)가 22일 공화당 동료의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면서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오전 8시 본회의를 열어 법안을 표결에 부치는 내용의 의사일정에 전격 합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 ○ 최고사령탑은 오바마 대통령
건강보험개혁법안을 진두지휘한 최고사령탑은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는 지난해 대선 때 건강보험 개혁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제시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후 건보개혁에 자신의 정치 명운을 걸었다. 개혁 작업이 암초에 부닥칠 때마다 오바마 대통령의 지원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달 하원의 건보개혁안 표결을 하루 앞둔 6일 오바마 대통령은 일요일이었지만 의회를 찾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민주당 의원들에게 “왜 의원이 됐는지를 생각해 보라.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역사에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다”면서 결속을 당부했다. 라디오와 인터넷을 통한 주례연설을 통해 그는 건보개혁을 저지하려 사활을 거는 보험사들을 정면 비판했다. 그는 건보개혁을 ‘환자의 권리장전’이라고 불렀다.
하와이 휴가 계획을 미룬 22일 “모든 미국 국민에게 건강보험을 제공하기 위한 희생을 상원의원들이 한다면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변에 남아서 격려를 하거나 필요한 마지막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소수당 의견 개진도 보장
21일 새벽 민주당 의원들은 만세를 불렀다. 상원에서는 아직 건보개혁법안이 표결에 부쳐지지도 않았지만 공화당 의원들의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를 종결짓는 표결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 표결로 공화당 의원들이 더는 표결을 늦출 수 없게 된 것. 미 의회에서는 다수당의 횡포를 막고 약자인 소수당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리버스터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여야 간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릴 경우 법안 토론을 계속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놓은 것이다. 이 토론을 끝내려면 상원 100석 가운데 60석을 확보해야 한다. 상원 의석 58석인 민주당이 필리버스터를 종료시키려면 민주당 의원 전원에다 공화당 이탈 표를 기대하든지, 무소속 의원 2명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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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은 법안 심의 과정에서 필리버스터 전략을 톡톡히 활용했다. 16일 상원 토론 때 공화당의 톰 코번 의원(오클라호마)은 의사진행 특권을 발동해 무소속인 버니 샌더스 의원이 내놓은 건보 수정안을 상원서기가 소리 내 읽도록 요구했다. 이에 앞서 2074쪽의 민주당 건보개혁법안 전문을 통독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공화당이 사사건건 발목 잡기로 일관하자 정작 협상 테이블에서는 여당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결과를 빚었다. 민주당은 결사반대를 외치는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무소속 의원들을 포섭해 60석을 확보하는 전략을 썼다.
○ 소신파의 이탈 표
민주당 지도부는 내부 표 단속에 나서면서도 공화당과 무소속 의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0월 14일 상원 재무위원회에서는 공화당 소속 메인 주 출신의 3선 의원인 올림피아 스노 의원이 당론을 어기고 찬성한 덕분에 찬성 14표, 반대 9표로 맥스 보커스 재무위원장이 주도한 재무위안이 가결됐다. 이어 11월 7일 하원 표결에선 찬성 220표, 반대 215표로 가결 정족수 218표를 가까스로 넘겼다. 진보 성향의 민주당 하원 의원들이 39명이나 법안에 반대해 민주당 지도부의 속을 태웠지만 공화당의 안 조지프 가우 의원(루이지애나)은 당론을 어기고 찬성표를 던져 판세를 반전시켰다. 흑인 밀집지역으로 민주당의 초강세 지역인 자신의 지역구인 루이지애나 제2선거구에서 건강보험 개혁은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1일 새벽 실시된 상원의 토론 종결을 결정짓는 투표에서 당론에 맞서 건보개혁 법안을 반대해 온 벤 넬슨 의원(네브래스카)을 설득하기 위해 민주당 지도부와 백악관 참모들은 무려 13시간 동안이나 마라톤협상을 했다.
○ 표결 결과엔 승복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들이 입법 과정에서는 치열하게 토론했지만 일단 표결 결과가 나오면 군말 없이 승복했던 점도 돋보였다. 의회정치가 용인하는 범위 안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였지만 장외투쟁을 하거나 비합법적인 의사방해는 일절 없었다. 법안 내용을 놓고 토론할 때는 새벽까지도 치열하게 맞붙었지만 단상을 점거하거나 토론을 방해하려고 문을 걸어 잠그는 행동은 없었다.
지난달 7일 하원의 건보개혁법안 처리 과정은 이런 승복의 미학을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었다. 20여 시간에 이르는 마라톤 심의 과정에서 양당 의원들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치열한 논리대결을 펼쳤고 토론이 끝난 뒤에는 질서정연하게 표결했다.
표를 모으는 과정에서 매표(買票) 시비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의원의 사익보다는 지역구 숙원사업을 로비하는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존 베이너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는 표결 결과를 공개한 직후 “결과를 받아들인다”면서 “향후 상원 표결 과정과 상하원 단일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당의 뜻이 관철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미국 정치인들이 정당한 표결 절차에 승복할 줄 아는 것은 지역 주민들의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며 “지역 주민들은 정치인들이 토론 과정에서 어떤 발언을 했는지를 표결 결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소수당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법안의 관문인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야당 몫으로 넘겨 쟁점법안 심의 때마다 법사위원장의 사보타주(고의적인 지연행위)로 법안 심의가 겉도는 한국 상황과는 대비되는 정치문화다.
워싱턴=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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