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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제목 [인터뷰]41년전 이승복 학살 증인 김익풍 씨 (KONAS)
글쓴이 이현오기자 등록일 2009-12-11
출처 KONAS 조회수 1606

다음은 KONAS  http://www.konas.net 에 있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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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41년전 이승복 학살 증인 김익풍 씨



1968년 울진-삼척 생포 무장공비로서 당시 상황 생생하게

 

 

설명 ..."이승복 조작은 말 자체가 되지 않는 한심한 것"

 

 


  1968년 12월9일 저녁 평화스럽기만 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도사리 산기슭 이승복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기는 해도 강원도 12월의 추위는 여지없이 겨울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1968년 12월9일로부터 만 41년째가 되는 2009년 12월9일 정오 강원도 용평면 노동리 이승복 기념관 내 계방산 기슭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4기의 묘역 앞에서는 41년 전 이 날 비명에 숨져간 어린 넑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추모제가 군악대의 장중한 주악 속에 엄숙하게 거행되고 있었다.

 ▲ 이승복 군 41주기 추모제가 열린 강원도 평창군 계방산 기슭 고 이승복 군 묘 앞에서 분향을 하고 있는 김익풍씨. 그는 이 날 참회어린 마음으로 묘 앞에 섰다. ⓒkonas.net

 이 날 추모 순서에 의해 헌작(獻爵 : 제사 때에 술잔을 받들어 올리는 일)과 첨작(添酌 : 제사 때에 종헌으로 드린 잔에 다른 제관이 다시 술을 가득히 채워 붓는 일)이 이어지고 고인을 조상(弔喪)하기 위하여 조총(弔銃兵)의 조총이 발사된 데 이어 진행을 담당한 박병훈 이승복 기념관장의 안내에 따라 바바리 코트를 받쳐입은 남루한 복장의 한 남자가 묘역으로 올라왔다.

 그는 다름 아닌 1968년 10월부터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하며 1950년 6·25전쟁 이후 다시 한번 북한 공산주의의 만행이 어떤 것인가를 전 국민에게 느끼게 한 울진-삼척 무장공비의 일원으로 남파됐던 무장공비 출신 김익풍(69세. 구리 거주)씨였다.

 남파 당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부대 소속 정치부소대장(중위)으로 무장공비 120명중의 일원으로 조원 15명을 대동하고 동해안으로 침투한 김익풍씨는 얼마 되지 않아 아군에 발견돼 끈질긴 추적을 받은 끝에 조원 14명은 모두 사살되고 김씨만 생포되었다.

 이승복 군 묘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묵념에 잠기던 김씨는 조용하게 술잔을 올리고는 참석한 250여명의 추모객 들에게 깊숙하게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앞좌석에 앉아 있는 고 이승복 군의 형인 이학관(55세)씨와 손을 맞잡았다. 이어 그 옆에 서있던 학관씨의 부인에게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렸다. 이 날 울진-삼척으로 침투했던 생존 무장공비와 그 무장공비로 인해 네명의 가족이 학살되고 할머니와 아버지마저 정신분열증으로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던 한 가족이 41년 만에, 그것도 학살된 그 날 우연한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이 날 추모행사가 끝나고 기자는 이 날 추모행사를 공동으로 주관하고 지난 11년 동안 어느 기관 단체가 크게 알아봐 주지 않는 가운데서도 이승복군의 거룩한 반공 희생정신을 오늘 우리사회 안보교육의 상징이자 또 다른 지표로 삼아야 한다며 추모제에 참석하고 최근 들어서는 '이승복 역사 복원'을 주창하고 있는 권오강 대한민국 육·해·공군·해병대 영관장교 연합회장과 자리를 마주했다.

 이 날 권오강 회장은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서 평창으로 오는 차량 안에서 김익풍씨가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 회원들에게 알리고 회원들의 모금을 통해 모인 성금 100만원을 행사장에서 본인에게 전달하는 인정을 베풀기도 했다.

다음은 이 날 함께 대화식으로 나눈 인터뷰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임.     

▲ 이승복 추모제를 영관장교 연합회가 11년째 해오고 있다. 하나의 역사복원 운동인데,  행사를 하게 된 계기는?

- 우리 영관장교 연합회는 31주기인 11년 전부터 이승복 묘소를 찾아 참배해 왔지만 40주기 이전까지는 찾아오는 사람도, 다녀간 사람도 별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기념관장도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고, 눈 쌓인 묘소 행 돌길과 제단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때 우리 학생들에게 반공교육의 상징이었던 이승복 사건이 어느덧 흘러간 이야기로만 되어가듯 그를 생각하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사라져가고 있음을 볼 때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워온 우리 노병들은 잊혀져 가는 이승복 역사 되찾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김익풍씨가 묘 앞에서 잠시 묵념에 잠기고 있다. ⓒkonas.net

▲ 이승복 역사복원 운동의 필요성은?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친 이승복군의 반공정신은 초등학생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아온 반공교육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우리사회의 일부에서는 남북 화해협력 분위기에 매혹되어 '우리민족끼리'니 하며 친북 좌파세력들의 시대착오의 환상과 맹목적인 추종이 우리사회에 깊숙이 침투하면서 표면화돼 국민의 안보의식을 약화시키고자 친북 좌경세력들이 온갖 책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승복 군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며 공비에게 항거하다 학살된 사건이 허위, 날조, 조작된 사건이라고 언론에 보도하고 심지어는 대중 집결장소인 지하철역과 부산역 광장에서 이 기사와 관련한 내용이 거짓이라는 '오보전시회'를 열면서 우리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복 관련 기사가 진실임이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돼 허위 보도한 관련자들에게 민·형사상 처벌을 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실된 이 역사와 과거 정권에서 삭제되거나 배제되었던 교과서에 이승복 반공희생정신을 다시 수록하고 교정에서 사라진 동상을 세우고 장학사업 발전과 기념관을 많은 관람객이 찾을 수 있도록 지난날 희석된 것들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 이 역사 복원을 위해 오늘도 결의대회를 하고 이전에도 관련 기관에 이 운동의 확산을 여러차례 건의한 걸로 아는데?

- 이승복 역사 다시 살리기 운동은 강원도가 중심이 돼 전 국민이 함께 하는 운동으로 강원도는 물론 청와대, 국무총리, 교육과학기술부장관 등 정부 관련 주요 부처와 전국시도 교육감, 국회와 정당대표, 언론·방송은 물론 시민사회단체 등 1,500여개 기관에 이 내용을 알려 왔습니다.

이승복 역사복원 운동은 잘못된 세력에 의해 잘못 오도되고 조작, 왜곡되었던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는 운동입니다. 반드시 이 역사복원 운동이 조기에 성공하여 역사에 길이 보전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고향과 당시 소속과 계급은?

- 평안북도 선천이 고향으로 아버지는 군 당위원장을 하셨다. 중류 이상의 가정이었다. 민족보위성 정찰국 정찰국 124군부대 소속으로 당시 중위였다. 정치부 소대장인데 북에서는 소위였지만 남파되면서 중위를 달았다. 북에서는 대체로 위장계급을 주는데 남파 시에는 일 계급을 더 준다.

▲ 많은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내려올 당시의 목적은?

- 각종 정보를 파악하고 일개 가옥(가족)이나 집단을 포섭하는 것과 요인을 납치해 대동 월북하는 것이었다.

▲ 이승복 학살과 연관이 있는가? 왜 산골 농부를 포섭할 이유가 있나?

- 북에서는 그런 교육을 받는다. 포섭에 가장 용이한 자가 농촌이나 산 속에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북에서 강원도 울진 삼척은 대한민국에서 못사는 지역 사람으로 보고 이북을 지지하는 계층으로 본다. 구성원들이 또 드믄 드믄 산다는 것도 있고, 신고를 안 한다는 장점도 있었고, 전투가 일어나도 무장공비가 유리하고 판단했다.

▲ 당시 울진-삼척으로 120명이 침투했다. 어떻게 넘어왔는지?

- 120명이 왔는지 인원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당시 나는 15명이 1개조로 편성한 조장이었는데 8개조가 넘어온 것으로 본다. 원산에서 (1968년)11월2일 모선인 공작선을 타고 넘어왔는데, 처음에는 우리 조 15명이 1개조로 탔는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배를 타고 보니 지하층에 또 다른 1개조 15명이 있었다. 육지에 상륙해 모선이 떠나고 난 다음에 보니 국군이 우리를 발견했다.

그 때 심정은 더 먼저 발견하지 왜 모선이 떠나고 난 다음에 발견하나 하는 마음이었고, 계속 추격을 받으면서 우리의 임무수행이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에서 또 다른 공작원들을 만났는데 (전체)인원수가 얼마인지는 알지 못했다.

▲ 지난 10월 처음 이 곳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 유족들과 처음 대면인가? 어떤 말을 했는지.

- 내가 직접 맞닥뜨린 것은 아니지만 와 보고 싶었다. 가슴이 아팠다. 오늘 처음 유가족들을 만났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내가 아니었으면 동료들이 죽인 아이 앞에서 착잡했다. (유족에게) "미안합니다. 건강하게 잘 사십시오" 했다. 내 마음이 그렇다. (이 때 그의 얼굴에는 회한이 서리는 듯 했다)

▲ 자신이 지나온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김익풍 씨. 남파된지 41년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 우리사회는 자유의 소중함을 너무도 잘 모르고 있다고 따끔한 충언도 잊지 않았다. ⓒkonas.net

▲ 안보강사로도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당시와 지금의 우리사회 상황은?

- 10여 년 동안 전국을 돌며 반공, 안보교육을 했다. 당시는 남한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투철했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보면 심한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서울 시내가 평양거리인지 어디인지 이북과 비슷한 상황들이 많고, 빨갱이 같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

▲ 이승복 사건에 대해 조작된 것이었다는 말이 많았다.

- 말 자체가 되지 않는 한심스런 것이다. 간첩이 가서 어떤 일(말)을 했을 때 어린이가 좋다고 하거나 환영을 했으면 죽이겠느냐? 이북이 좋다고 했다면 절대 죽이지 않는다. 먼저 포섭을 하고자 하지 죽이려 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무언가 싫다고 했으니까 '아, 이것은 우리를 신고할 대상이구나'해서 죽인 것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조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 당시 자폭을 생각지는 못했는지?

- 남파되었다가 자폭한 동료들의 가족 부모는 일계급 다 올라간다. 김신조도 만났지만 그 가족은 사형이다. 그게 현실이다. 내가 갈 길도 자폭밖에 없었다. 자폭 못한 이유는 먹지 못하고 쫒겨 다니다 생각이 마비되고 말 정도였다. 권총을 댕겼는데 총이 녹이 슬고 흙이 총구를 메워 결국 자살도 하지 못했다. 

▲ 안보의식과 관련해 한마디 한다면?

- 북한 사람은 다 아는데 우리 국민은 적화통일이 되면 과연 남한 사람이 몇 명이나 살게 될 것인가를 잘 모른다. 북한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와 틀리다. 신문이나 TV를  보면 산에 가면 절이 있고, 또 교회도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적화가 되면 남한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국민이 알아야 한다. 이런데 기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 감사합니다. (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written by. 이현오
2009.12.11 09:01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