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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제목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이승복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까! (KONAS)
글쓴이 이현오기자 등록일 2009-12-11
출처 KONAS 조회수 1575


다음은 KONAS  http://www.konas.net 에 있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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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이승복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까!



41년전 120명의 무장공비 중 생포된 당시 김익풍(69세)씨가 추모제 참석 용서 빌어.."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온 국민을 불안 속에 떨게 하고 이 나라를 온통 어지럽게 만들었던 1968년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초등학생 이승복 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며 항거하다 무장공비에게 학살당했던 1968년 12월9일 밤 그때의 슬픔과 맺힌 한은 41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계방산 중턱 주변을 하얗게 장식한 눈 쌓인 잔디 위로 간간이 싸래기 눈이 내리고, 군악대의 장중한 주악이 흐르는 가운데 41년 전 분단의 비극이 낳은 아픔을 온 몸에 안은 채 북에서 남파된 무장공비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쳤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무참하게도 살해돼 이 산에 잠들어 있는 고(故) 이승복 군의 41주기 추모제가 이승복 기념관이 위치한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현지 묘역에서 거행됐다.

 ▲ 이승복 군 41주기가 되는 9일 정오,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이승복 기념관에서 이승복 군을 기리는 추모제와 이승복 역사 복원 결의대회가 열렸다. 사진은 이승복 기념관 내에 소장된 이승복 초상화. ⓒkonas.net

추모제는 이승복 군의 9살(당시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생일이자 그의 생애 마지막 날이기도 한 9일 정오 이승복 기념관(관장 박용훈)과 대한민국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영관장교 연합회(회장 권오강, 예. 대령, 이하 영관장교 연합회) 공동으로 엄숙하게 거행됐다.

또 추모제에 이어 이승복 동상이 있는 기념관 경내에서는 영관장교 연합회 주관으로 '이승복 역사 복원 결의대회'가 열려 이승복 군의 반공희생 정신을 각 학교기관에서 안보교육으로 되살리고 장학사업의 발전과 동상 재 건립이 이루어지도록 힘을 기울여 나갈 것을 결의했다.

특히 이번 41주기 추모제는 공식적으로 갖는 첫 번째 추모제라는 점에서 의의가 더욱 큰 것으로 다가왔다.

즉, 지금까지는 이승복 기념관이 1975년 10월 대관령에 '이승복 반공관'으로 최초 설립되었다가 1982년 10월 현재의 이승복 생가가 위치한 진부면 도사리 인근인 용평면 노동리 현 위치로 이전 개관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성격으로 이듬해인 1983년 10월부터 매년 10월 셋째주 목요일에 추모행사를 거행해 왔다. 그러면서 지난 10월에도 기존 추모제를 추모식으로 변경 거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41주기 기일이 되는 9일을 맞아 기일 추모제로 복원하여 갖게 되기에 이른 것이다.  

 ▲ 이승복 군의 형인 이학관씨가 동생 묘역에 술잔을 올리고 있다. 왼쪽으로는 부인과 아들. ⓒkonas.net

또 추모제 행사에 앞서는 영월문화메신저 땅울림 공연팀의 살풀이춤이 거행돼 의미를 더했다. 이와 관련해 박용훈 기념관장은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가 있다는 말과 함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의 진위를 두고 오랜 기간 법정공방이 오간 사실을 언급, "진실규명 과정과 법정공방을 거쳐 대법원의 사실 확인 확정판결이 났음에도 아직도 조작설을 입에 담는 부류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일소시켜 보자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추모제에서 초헌관으로 나선 박용훈 기념관장은 술잔을 올린 뒤 "이번 41주기 추모제는 공식적인 행사를 갖는 첫 해가 된다"며 "매년 10월15일에 해오던 추모식도 앞으로 교육행사로 존속하면서 계속하게 됨을 고한다"고 밝히고, 특히 "그동안 대관령에서 속사초등학교, 기타 지역으로 전전하던 동상을 원래의 분계장에 세우게 됨을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관장은 이어 "앞으로 기념관에서는 님의 정신을 재조명하고 위상을 확립하는 홍보활동을 적극 벌여나가겠다"며 "영면하심을 기원한다"고 합장했다.

이어 학살 당시 15살 나이로 공비들의 칼게 36군데를 찔렸음에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승복 군의 형인 이학관(55세)씨 부부의 아헌이 이어졌다.

 ▲ 권오강 영관장교 연합회 회장(앞줄 안경쓴 이)이 임원들과 함께 분향 후 묵념. ⓒkonas.net

종헌관인 권오강 영관장교 연합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먼저 "1968년 12월9일 밤 그 때의 슬픔과 맺힌 한은 41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권 회장은 이어 "용감했던 고인의 반공정신과 그 마지막 절규가 자라나는 학생들과 우리 국민에게 반공교육의 상징이 되어 왔으며, 학생들의 반공의 횃불이 되어 온 나라를 비쳐주는 반공교육의 태양으로 떠올랐다"고 추모한 뒤, 지난 14년에 걸친 일부 좌파세력들의 언론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를 적시하면서 "대법원의 최종 확정으로 그 때 그 사건이 진실임이 밝혀져 고인의 거룩한 희생은 이 나라 반공교육의 상징으로 다시 역사에 빛을 보게 되었다"고 추모의 정을 표했다.

그러나 권 회장은 안타까운 점도 강하게 피력했다. 지난 김대중 정부 이후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이승복 군 사건이 초등학교 교재에서 사라진 점이나 동상 철거, 장학사업의 미비, 기념관장의 직급이나 기념관 관리관청의 하향 조정, 기념관 관람객의 급격한 축소 등을 하나하나 열거 한 뒤 "역사는 진실이라 누가 만들 수도 없고, 지워버릴 수도 없는 것이므로 고인의 역사는 이 나라와 함께 영원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이승복 역사복원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임을 강조했다.

이어 이승복이 다녔던 속사초등학교 교장을 비롯한 지역 주민 대표의 첨작에 이어 고인을 위한 조총 발사 등이 이어졌다.

추모제가 끝난 후 영관장교 연합회 회원들은 이승복 동상 앞에서 '이승복 역사 복원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회원들은 박우식 해병대 부회장이 낭독한 결의문을 통해 앞으로 벌여 나갈 운동에 대해 다짐과 함께 관계 당국에도 분명한 목소리로 촉구하기도 했다.

 ▲ "이승복 반공역사의식을 회복하라". 회원들이 박우식(우측 뒷모습)해병대 부회장의 결의문에 맞춰 구호를 외치고 있다. ⓒkonas.net

한편 이 날 추모제에 앞서서 뜻 깊은 광경이 있었다. 지난 1968년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 120명의 무장공비(118명 사살) 중 생포된 당시 공비인 김익풍(69세)씨가 추모제에 참석해 고인의 묘소에 참회의 술잔을 올린데 이어 유가족인 이학관씨 내외에게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하며 화해를 나눴다.

또 영관장교 연합회도 김 씨가 어렵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이 날 행사에 참석하는 도중 차량에서 전 회원들이 1백만원의 성금을 모아 결의대회에 앞서 전달해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훈훈함을 더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이 날 '역사복원 결의대회'가 열리는 동안 추모제에 참석한 평창군 교육장 등 인근 지역 학교 관계자들이 자리를 비워 영관장교 연합회 회원들로부터 빈축을 사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 날 행사에는 권오강 영관장교 연합회장을 비롯한 회원과 최갑석(예, 소장)전쟁문학회장, 김도명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이 지역 방위사령관, 군가 '휘날리는 태극기'의 작사 및 작곡가 정동주, 강봉호 평창군 교육장, 심춘택 속사초등학교 교장 등 관내 학교장, 박재홍 50동우회장, 차덕환 용평면장 등 지역주민, 지역 군부대장 등 각계 대표 250여명이 참석했다.   

그런데 영관장교 연합회는 전 정권의 냉대속에 방치되다 시피했던 이승복 군의 애국적인 반공정신을 되살리고자 그의 31주기가 되던 1999년부터 용평면 계방산 현지 묘역을 찾아 참배, 추모하면서 그의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을 비롯한 정부 각 기관과 국회, 전국 교육위, 강원도 각 학교기관, 언론사, 안보단체에 이승복 역사 복원을 위한 관련 공문과 자료를 송부하면서 이 운동의 확산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다음은 이 날 '역사 복원 결의대회'에서 밝힌 결의문 전문임.(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결   의   문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그해 12월9일 아홉 살의 어린 초등학생 이승복 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절규하며 무장 공비에게 항거하다가 무참히도 학살당한 오늘 그의 제41주기일을 맞아 우리 다함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북한은 선군정치로 핵을 보유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데, 30년간 지속해온 이승복 사건의 북한무장공비 만행 역사가 일부 세력들에 의해 교과서에서도 삭제되었고 그의 동상도 사라져가고 기념관 방문객도 줄어져 가니 온 국민의 분노로 이를 규탄하며 이승복 사건의 역사를 다시 살리고자 다음과 같이 결의 한다.

하나, 국회와 정부 그리고 교육정책 당국자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교육정책을 확고히 하라.

하나, 각 분야 교육 담당자들은 좌파세력들에 의한 좌편향 교육정책을 지양하고 일선 교육현장으로부터 좌편향 교육을 하루속히 발본 색원하라.

하나, 북한이 변할 때까지 학생들의 반공안보의식 교육은 절대 지속강화되야 하며, 이승복 사건의 엯는 반드시 복원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승복 사건의 역사를 초등학교 교재에도 다시 싣게 하고 그의 동상도 전 초등학교 교정마다 다시 세워야 하며 이승복 기념관 방문객도 줄을 잇게 해야 한다.

하나, 우리는 오늘 이승복 제41주기 기일을 맞이하여 고인의 명복을 비는 자리에서 이승복 역사 복원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켜 국민 모두가 함께 하는 이승복 역사 다시 살리기에 앞장서서 전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한다.

                                                2009년 12월9일

                   대한민국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영관장교 연합회 회원 일동  

 ▲ 만세삼창을 하고 있는 참석자들. ⓒkonas.net

 

 ▲ 참석 내빈들의 묵념. ⓒkonas.net


 ▲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로 남파되었다가 생포된 김익풍씨가 이 날 추모제에 참석, 허리를 숙이며 유족인 이학관씨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익풍(당시 중위)씨는 평창군으로 이동해 활동하기 전 아군에 의해 생포됐다. ⓒkonas.net


 ▲ "미안합니다". 용서를 구하고, 화해의 마음을 담고서. ⓒkonas.net


 ▲ 이승복 생가 모형. 실제로는 이곳으로부터 5km 떨어진 계방산 노동리 계곡에 있었으며, 그 지역에도 당시의 집으로 복원해 기념관에서 관리하고 있음. 통나무를 쌓아 만든 전통적인 산간지붕 집구조로 되어 있음. ⓒkonas.net


 ▲ 방안 내부. 흙벽돌로 내부가 되어 있고 천정에는 밤을 밝히는 등일 매달려 있고 작은 장롱이 산골 벽지의 가난하지만 소박한 한 가정을 연상케 한다. ⓒkonas.net


 ▲ 조선일보의 보도가 사실이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 사진 맨 왼쪽이 경향신문 사진기자임이 드러나 조선일보 현장취재가 입증됨. ⓒkonas.net


 ▲ 지난 해 10월 공군에 의해 이승복 기념관 경내에 전시된 공군 F-5B 전투기. 이 비행기는 영관장교 연합회의 적극적인 활동과 국군기무사령부의 후원으로 전시돼 안보 학습장으로서 이 곳을 찾는 학생 시민 등 관람객들에게 적극 활용되고 있다. ⓒkonas.net


 ▲ 추모제 행사에 앞서 식전 공연으로 살풀이춤을 추고 있는 영월문화미신저 땅울림 단원들. ⓒkonas.net




written by. 이현오
2009.12.09 21:4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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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KONAS  http://www.konas.net 에 있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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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풍과 이승복

이승복 군의 사연을 조작이라며 막무가내로 믿고 주장한 세력들,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만 골라 옳다고 주장한다

 


 

  울진 삼척에 침투했던 북한 무장공비의 한 사람 김익풍 노인. 그가 이승복 군의 묘지를 찾아 그 형 학관 씨에게 속죄의 인사를 했다. 그는 진심어린 참회를 했고, 학관 씨는 담담한 용서로 화답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안의 일부가 이승복 군의 사연을 조작이라며 막무가내로 믿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일부는 그것을 보도한 조선일보의 당시 기사를 허위보도라며 매도했었다. 대법원은 최근 조선일보에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부 세력은 진실과 사실보다는 자기들이 보고 싶은대로 보고, 자기들이 믿고 싶은대로 믿고, 자기들이 말하고 싶은대로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주장한다. 이승복 군이 아무리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부르짖다가 처참하게 살해당했어도,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조선일보가 허위 조작 보도를 했다"고 말했다. 이게 그들의 실체다.

 

 

 일부는 또한 대한민국 61년사에 얽힌 사실과 진실 전체에 대해서도 그런 주관주의적 잣대에 따라 자기들이 보고 싶은대로만 보고, 자기들이 해석하고 싶은대로만 해석한다.

 

 

 예컨대 그런 부류는 인촌 김성수 선생 같은 분들이 일제치하 때 상해(上海) 아닌 국내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학교를 운영했다는 사실 자체를 친일 민족반역 행위라고 보고 싶어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 건국 세력을 매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혹했던 전시(戰時) 일제말기의 그런 분들의 공석상의 발언 몇 마디를 “증거‘랍시고 내세우며 그의 인생 전체를 먹칠해 버리려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그런 불가항력의 발언은 슬그머니 '숙청 명단'에서 빼준다. 제멋대로다.

 

 

 일제 때 민족 구성원 하나 하나가 다 한용운 선생처럼 딸의 호적조차 하지 않아 그녀가 초등학교에도 가지 못한 식으로 살았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악관 20대의 박정희 청년이 상해, 만주, 연해주의 항일 무장부대로 직행하지 않고 만군 대령도 아닌 고작 중위가 된 것을 들어 “그러니까 그의 인생은 민족반역”이라고 통째로 색칠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방식의 매도가 과연 적실(適實)하고 적정(適正)한 것인가?

 

 

 멋대로 보고 싶으면 보랄밖에.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보든 말든 박정희 대통령은 오늘날 압도적인 다수에 의해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한국을 세계유수의 발전된 국가로 만든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식이라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다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이승복 군의 사실과 진실을 부정한 자들은 그렇다면 무슨 이름의 인명사전에 올려야 할 것인가? 강호제현의 작명(作名) 아이디어를 공모한다.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written by. 류근일
2009.12.10 13:52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