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총 강경투쟁 14년만에 첫 완패…
노동 현장 큰 흐름 바뀔 듯
12월 총파업 등 '민노총 투쟁동력' 약해질 듯
8일간 파업을 벌여 온 민주노총 공공운수연맹 소속 철도노조가 3일 사측의 양보를 전혀 얻어내지 못한 채 파업을 전면 철회했다. 사실상 '백기 투항'을 한 것이다.
쌍용차 사태 같은 대규모 폭력 저항도 없었고, 사측으로부터 민·형사상 면책을 약속받지도 못했다. 경기개발연구원 최영기 선임연구원은 "1995년 민주노총 출범 이래 이렇게 참담한 패배는 없었다"고 말했고, 익명을 요구한 노동계의 한 관계자는 "민노총이 처음 맛보는 완벽한 백기투항"이라고 했다. 강경 노동운동의 흐름을 주도해온 민주노총식의 투쟁적 노동운동에 변화가 온 것일까.
김기태 철도노조 위원장은 이날 오후 경찰 체포조를 피해 은신해 있던 민주노총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파업 철회를 선언하는 담화문을 발표한 뒤 4일 오후 3시까지 전원 업무에 복귀하겠다고 밝혔다.
철도노조의 파업은 전개과정에서도 과거의 철도 파업이나 쌍용차 등 민노총 대형 노조의 파업과 달랐다. 철도노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준법' 투쟁을 강조했다. 8일간의 파업 기간 중 파업 비참가자에 대한 폭력행위나 위협 등도 없었다. 철도 역사를 점거하거나 코레일(한국철도공사)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지도 않았다. 철도노조는 오히려 사측이 법을 어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먹' 대신 '법'으로 사측과 싸워보려 한 것이다.
파업 철회 기자회견에서도 김 위원장은 "불법적인 정부와 철도공사에 당당히 맞서는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철도 현장으로 복귀한다"며 "철도공사는 성실하고 합리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노동계 전문가들은 이번 파업 철회를 '법과 원칙'의 승리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철도노조가 예상외로 빨리 파업을 접은 것은 ▲대량해고를 감수하고서라도 원칙대로 대응하겠다는 정부의 '레이건 모델' 전략이 먹혔고 ▲공기업이 철도를 볼모로 잡았다는 비판여론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최영기 연구원은 "대통령까지 나서 법과 원칙을 강조하니 철도노조도 '법을 어기면 국물도 없다'는 경계심을 갖게 된 것"이라며 "철도노조가 파업을 무리하게 한 것은 틀림없지만 절차 등에서는 전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말했다.
물론 철도노조가 스스로 항복을 선언한 것은 아니다. 김 위원장은 "불법적인 정부와 철도공사에 당당히 맞서는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철도 현장으로 복귀한다"며 "철도공사는 성실하고 합리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잠시 현장으로 돌아가 3차 파업을 준비하자는 명령을 내리고자 한다"며 "파업 대오는 잠시 풀었지만 투쟁 대오는 강고히 유지할 것을 명령한다"고 말했다.
철도노조의 '백기투항'은 민노총의 투쟁동력 쇠퇴를 더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민주노총의 양대 핵심축은 금속노조와 공공노조인데, 금속노조는 이미 균열 징후를 보여왔다. 지난 9월 금속노조의 핵심인 현대차 노조위원장에 민노총에 비판적인 이경훈 후보가 당선됐다. 77일간의 쌍용차 노조 파업도 노조의 '참패'로 마무리됐고 급기야 쌍용차 노조는 지난 9월 민노총을 탈퇴했다.
이번 철도노조의 전격적인 파업 철회는 또 다른 축인 공공노조도 타격을 받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노동계는 분석한다. 노동부 관계자는 "공공노조의 주력은 철도노조인데 파업이 성과 없이 마무리되면서 민노총의 리더십은 상처를 입게 됐다"며 "민노총이 예고한 12월 총파업을 비롯해 공공부문 투쟁 동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노총의 위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올 초부터 인천지하철 노조, KT 노조를 비롯해 산하 주요 노조가 "민노총 지도부가 정치투쟁에 빠져 있다"며 탈퇴했다. 민노총의 위기는 지도부 내부에서도 감지됐다. 임성규 민노총 위원장은 쌍용차 노조가 탈퇴한 직후인 지난 9월 한 인터넷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위기를 치유하지 못하면 민주노총이 망할 수도 있다"고 밝혔었다.
민노총은 이에 대해 "내부의 위기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적(反語的) 표현"이라고 밝혔지만 노동 전문가들은 투쟁 외의 운동방식을 모르는 민노총이, 투쟁을 하지 않으면 도리어 더 빨리 무너질 수 있는 '투쟁의 역설'에 갇혀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다 노조전임자·복수노조 문제를 놓고 12월 연대 총파업을 공언했던 한국노총이 투쟁 노선에서 대화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민노총은 외톨이 신세가 됐다. 철도노조 파업 철회를 계기로 민노총의 투쟁 노선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결국 국민들의 눈높이를 외면한 채 정치이념에 빠진 노동 운동은 더 이상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