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42세이던 1967년 과학기술처 초대장관에 발탁된 김기형(84) 박사는 최근 “60년대 후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이공계 대학원 우수인력에 대한 병역특례 문제를 건의했는데 ’전체 병력충원에는 문제없다’며 그 자리에서 승인했다”고 회고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개발도상국에서 과학기술개발이 어려운 이유의 하나는 정책 입안자들이 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인데, 박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개발이야말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학대통령’으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은 과학기술 정책의 체계적인 제도화로 모아진다고 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박정희 정부는 공업화 과정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저력을 배양하기 위해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과 병행해 제1차 과학기술진흥5개년계획을 수립, 과학기술을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직접 연관시킨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로써 정부는 과학기술정책이 종래의 교육정책적 차원을 넘어 국가경제발전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추진력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1961년 7월22일 과학기술전담 행정기구로서 경제기획원 내에 기술관리국을 우선 설치했고 1964년 2월 1일 정책기구로서 경제과학심의회를 뒀으며 다음 단계로 종합공업연구기관의 설립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과학기술진흥의 장기전망 검토가 시작됐으며 기능인력을 위주로 하는 인력개발계획이 수립됐다.
이는 과학기술처 발족(1967년), 과학기술진흥법 제정(1967년), 한국과학원(현 KAIST) 설립(1971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설치(1973년), 기술용역제정법 제정(1973년), 대덕연구단지 개발 착수(1973년), 한국선박해양연구소 발족(1976년), 자원개발연구소 개편(1976년) 등으로 이어졌다.
1966년 산업기술개발의 핵심체로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은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공업기술이 체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인프라가 전무했던 우리나라는 KIST 설립으로 그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후 KIST는 과학기술 발전의 중심적 역할을 모범적으로 수행했다.
KIST는 1960∼70년대에 국내 산업 활동의 기초조사와 중화학공업의 정책수립에 공헌했고, 1980년대에 산업 발전의 핵심기술을 모방ㆍ개량했으며, 1990년대부터 첨단 원천기술 개발을 선도하고 있다.
KIST는 많은 수의 우수한 과학기술자를 배출했고 국내 연구기관의 산파역으로 연구개발 활동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KIST의 40년 역사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40년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해왔다.
이 KIST 설립자가 다름 아닌 박 전 대통령이고 이제, 그간 KIST에 몸담았던 4천여 과학자들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서울대 박효종(정치학) 교수는 최근 칼럼에서 “근대화의 열매는 따 먹으면서 정작 그 결실을 가능케 한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뿌리가 꺾인 채 화병에 놓인 꽃을 보는 참담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박 전 대통령을 기리는 동상은 커녕 기념관조차 없는 데 대해 질타한 바 있다.
이와 관련, 기초기술연구회 민동필 이사장은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박 대통령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과학기술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국가지도자로서 먼 장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과학기술을 육성하고 우수한 인재를 양성했다”고 평가했다.
민 이사장은 “오늘날 우리의 번영은 물론이고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기술 분야의 자산과 우수 인력이 당시에 그린 국가대계의 결과”라며 “우리 모두는 과학기술이 그로부터 40∼50년이 지난 오늘에도 변함없이 국가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이번 과학기술계의 움직임이 10년째 표류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에 추동력으로 작용할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