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4일
'블루하트'(blue heart)라는 作戰名으로 7월 22일을 D-day로 잡고, 미 육군 제1기갑사단을 기용하려고 했지만 迎日 작전이 위급하여 기병사단을 그리로 급파해야 했기 때문에 一時 中止되었다.
7월 23일 세 "地域"의 상륙작전계획서(仁川, 郡山, 注文津)을 워싱턴에 보고하면서 (그 후 仁川으로 決定) 美海兵 第1師團, 美陸軍 第7步兵師團, 韓國軍 一部 그리고 英國軍 旅團을 참가토록 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인천상륙작전계획을 구체화하여 '워싱턴'에 보고한다. '워싱턴'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확인 토의하기 위하여 '콜린스' 장군과 '서먼' 제독을 특사로 결정하여 극동사령부에 파견한다.
8월 23일 맥아더 사령부의 특별기획 참모단이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함으로 토의가 시작되었는데, 마지막에 맥아더 장군은 약 한 시간동안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타당성 설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강한 의지를 보이는 결론을 맺는다.
"만일 나의 판단이 빗나가 승리 할 수 없는 방어로 돌입한다면, 나는 몸소 그 곳에 나아가 상륙군이 피나는 좌절을 맛보기 전에 철수시킬 것이다. 그 때 유일한 손실이란 나의 직업적인 명예뿐일 것이다. 그러나 인천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仁川은 成功한다. 그것은 10萬名의 生命을 救할 것이다."
훗날, 콜린스 장군은 그 연설은 '감동적인 연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차에 걸쳐 '워싱턴'과의 서신 교환이 있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한다.
이때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상륙작전부대 편성을 위한 조치로서 '데이브드슨 라인'(Davidson line)(蔚山-密陽-馬山선 : 대략 경상남도의 절반)을 구상하여 決戰防禦에 對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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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글 제공 : 김순욱(6·25 진실 알리기 운동본부 본부장 papa33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