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北) 조문단 가자마자 '북(北) 잡는' 골드버그 방한
골드버그 "금강산 관광 등은 유엔 제재와 무관" 밝혔지만 한미(韓美)공조 흔들릴라 내심 우려
전문가들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南北) 신뢰 구축 먼저해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실상 '대남 특사' 역할을 한 조문단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남북관계 개선' 메시지를 전하고 돌아간 다음날인 24일 미국의 대북 '채찍'을 상징하는 필립 골드버그(Goldberg) 대북제재조정관이 한국의 주요 당국자들을 잇따라 접촉했다. 국제사회의 제재 그물망 속에서 '남북관계'라는 줄을 잡고 나오려는 북한과 이 그물망을 더욱 조이기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단속을 벌이고 있는 미 제재팀이 한국 당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부딪힌 것이다.
골드버그 조정관은 이날 6자회담 한국측 수석대표인 위성락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면담하고 이어 한국의 대북 제재 이행을 총괄하는 오준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과 업무 협의를 가졌다. 그는 기획재정부와 국방부, 한국은행 등 제재 관련 부처 관계자들과도 만나 안보리 대북 결의 1874호의 이행 상황을 점검했다.
그는 이날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여전히 "우리가 현재 집중하는 것은 제재의 이행, 완전한 이행"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북한의 잇단 대미·대남 유화적 제스처에 대해 "비핵화를 위한 것이라면 좋은 것"이라면서도 "핵 개발 등과 관련한 북한 기업이나 인물들에 대한 금융 제재를 비롯한 안보리의 대북 제재는 계속 이행될 것"이라고 했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측은 북한이 유화적으로 나오는 것은 국제사회의 확고한 공조체제에 균열을 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며 "이런 면에서 한국의 협조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 ▲ 골드버그에 쏠린 눈과 귀 필립 골드버그 미 국무부 대북제재조정관이 24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남북 간 대화 국면이 시작된 시점에 이뤄진 그의 방한이 남북관계 개선과 한·미 공조의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는 우리 정부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골드버그 조정관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북한과 교류사업 재개에 합의한 뒤 논란이 됐던 '금강산 관광의 결의안 저촉' 여부에 대해서는 일단 면죄부를 줬다. 그는 "안보리 결의도 인도주의, 개발 목적 등을 예외로 하고 있다"며 "금강산이나 개성 관광 등은 이런 맥락에서 안보리 결의와 무관하다는 게 나의 평가"라고 했다.
하지만 골드버그 조정관이 "현재로서는(at the moment) 그렇다"며 여지를 남겨뒀듯이 이 같은 평가가 미국의 본심이라고 보기는 무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은 대북 관광사업 등이 북한의 주요한 '달러 박스'이며, 이 돈이 핵이나 미사일 개발에 전용됐다는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왔기 때문이다. 과거 미 행정부의 대표적인 협상파였던 크리스토퍼 힐(Hill)조차 금강산 관광에 대해서는 "북한 정부에 돈을 주기 위해 디자인된 것 같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었다. 정부 당국자는 "문구상으로는 결의안에 저촉되지 않을지 몰라도 정치적 해석으로는 미국이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고 했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처럼 남북관계 개선과 국제 공조라는 '두마리 토끼'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상황이 계속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국제사회의 비핵화 공조 노력의 범위를 넘는 남북관계 접근방식을 자제해야 한다"며 "북한의 정치적 의도에 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가 지금까지 보여준 '원칙'을 계속 고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성한 고려대 교수는 "남북 현안 중 '현금'과 관련된 것은 뒤로 미루고 인도주의적 사안, 즉 이산가족 상봉 등을 먼저 다루며 신뢰를 구축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우선순위를 정해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접근해야지 모든 현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풀려 하면 오히려 꼬일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