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金大中 씨의 訃音에 붙이는 글 1970년대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가리켜 세상 사람들은 ‘3金時代’라고 일컬었다. 1971년에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朴正熙 대통령이 이끄는 民主共和黨의 장기집권 저지에 나선 民主黨의 후보지명전을 휩쓴 구호는 ‘40대 騎手論’이었다. 당초 民主黨의 ‘40대 騎手’는 金泳三, 金大中, 李哲承 등 3명이었다. ‘40대 騎手(기수)’의 先頭走者는 金泳三이었지만 1971년 민주당 후보 지명전의 승자는 金大中이었다. 3파전이었던 전당대회 1차 투표의 결과는 金泳三, 金大中, 李哲承의 순서였지만 2차 결선투표에서 민주당 안에서 같은 新派에 속했던 李哲承이 金大中에게 그의 표를 몰아줌으로써 그에게 逆轉勝(역전승)을 안겨주었다.
1971년4월27일 실시된 제7차 대통령선거에서 金大中은 朴正熙에게 90만표의 표차로 패배했다. 그리고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에서는 직선제 대통령선거 실시가 한동안 중단되었다. 1972년 10월의 維新體制(유신체제) 출범과 더불어 대통령선거는 장충동 실내체육관에서 실시되는 間選(간선)으로 바뀐 것이다. 維新體制는 1979년10월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 의한 朴正熙 대통령 弑害(시해)로 무너졌지만 대통령 직접선거의 復歸는 1987년 盧泰愚 民主正義黨 후보의 6.29선언을 全斗煥 대통령이 수용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1987년12월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 때부터 직선제가 부활되었다. 이렇게 부활된 직선제 대통령선거의 주역들은 더 이상 ‘40代 騎手’가 아니었다. 이제는 60代의 ‘3金時代’로 바뀐 것이다. 李哲承이 뒤로 처지고 그 대신 金鍾泌이 加勢한 金泳三, 金大中, 金鍾泌의 3파전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1987년의 제13대 대선에서 ‘3金’은 모두 함께 출마하여 합계 1400백여만 표를 득표했지만 이 표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800만표를 얻는 데 그친 盧泰愚에게 승리를 넘겨주어야 했다. 金鍾泌이 缺場(결장)하여 사실상 金泳三ㆍ金大中의 兩金과 鄭周永의 3파전이 된 1992년의 제14대 대선에는 金泳三이 190만표의 표차로 金大中을 눌러 3金 가운데 가장 먼저 大權을 거머쥐는 先頭走者가 되었고 이때의 충격으로 金大中은 일시적으로 政界를 隱退(은퇴)하는 受侮(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金泳三ㆍ金大中이 겨룬 제13대와 제14대 대선은 문자 그대로 嶺南 표와 湖南 표의 지역 싸움이었고 嶺南 표가 湖南 표를 압도한 선거였다. 그러나, 金大中은 大權에의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1997년의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정계은퇴 결정을 번복하는 한편 3金의 3번 走者인 金鍾泌의 양보를 얻어 ‘野圈候補 單一化’에 성공함으로써 金鍾泌이 몰아준 忠淸 표의 도움으로 李會昌ㆍ李仁濟와 벌인 3파전에서 李會昌을 42만표 차이로 따돌리고 大權을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3金 가운데 兩金(金泳三ㆍ金大中)은 그들의 평생의 집념이었던 大權慾(대권욕)을 충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3金 가운데 大權에의 꿈을 실현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한 1金은 金鍾泌이었다. 金鍾泌은 1997년 그의 도움으로 大權 장악에 성공한 金大中과 소위 ‘공동정부’를 구성하여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그의 정치인생을 ‘권력의 2인자’로 마감하는 길을 택했다.
金大中이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37일간의 투병생활 끝에 8월18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이승에서 지난 30여 년간 국민에게 때로는 희망을 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절망을 안겨주기도 했던 ‘3金’ 사이의 이승에서의 집요한 大權 경쟁에서 先頭走者가 最年少者인 金泳三(82세)이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그 金泳三이 여전히 老益壯의 건강을 과시하고 있는 가운데 '3金‘ 중의 最年長者였던 金大中(85세)이 그들 가운데 이승을 하직하는 先頭走者가 됨으로써 그 아이러니는 해소(?)되었다. ‘3金’ 가운데 유일하게 大權에의 꿈을 이루지 못한 金鍾泌(83세)은 최근 건강의 악화로 인하여 金大中의 殯所(빈소)로 직접 弔問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언론은 전하고 있다. 金大中의 생애에서 筆者는 빛과 그림자가 交織(교차)된 파노라마를 본다. 그의 정치적 생애는 한 마디로 波瀾萬丈(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그는 大權 街道의 중간 기착지였던 국회 진입도 四顚五起로 이룩해야 했고 大權의 꿈도 3修 끝에 네 번째의 挑戰에서 겨우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의 이 같은 七顚八起에는 원인이 없지 않았다. 그에게는 自力으로는 大權에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의 치명적인 弱點이 있었다. 지지기반이 湖南 일변도라는 지역적 약점, 청년기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그를 따라다녔던 ‘親北ㆍ左傾’ 시비로 인한 이념적 약점, 그리고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은 있어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고 스스로 군색하게 해명해야 했던 신뢰성의 약점이 그것들이었다. 1997년 제15대 대선 때 그는 이 가운데 지역 및 이념의 약점을 金鍾泌의 도움으로 극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때 金鍾泌과 이룩했던 ‘내각책임제’ 改憲 합의를 파기함으로써 신뢰성의 문제는 풀기는커녕 그의 아킬레스 筋으로 남겨 둔 채 이승을 하직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장례기간이 시작되면서 언론은 故人의 足跡에 대한 갖가지 美辭麗句를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아마도, 어쩌면, 지난 번 自殺로 그의 인생을 마감한 故 盧武鉉 씨의 장례 때의 狂亂劇(광란극)이 이번에도 再演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 같은 狂亂劇이 에스컬레이트 되기 전에 필자는 故人의 生前의 업적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첫째는 故人의 가장 큰 업적의 하나로 언론이 美化하는 데 여념이 없는 ‘남북화해’에 관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지적되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말썽 많은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이 그 결실이지만, 그가 ‘남북화해’를 추구한 것은 맞지만 그가 추구한 ‘남북화해’는 북한 동포들을 억압하는 暴政(폭정)의 책임자로 東西古今을 통해 가장 最惡의 獨裁者인 金正日과 그가 이끄는 북한 공산정권과의 ‘화해’였지 2300만 명의 고통받는 북한 동포들과의 ‘화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가 추구한 ‘남북화해’는 ‘북한사회의 민주화’를 내용으로 하는 북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사회의 容共化ㆍ聯共化’를 내용으로 하는 남한 사회의 변화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生前에 이제 2만 명에 육박하는 남한 사회의 ‘脫北 同胞’들에게도 단 한 번 ‘連帶(연대)’는커녕 ‘同情’의 손길을 내민 사실이 없었다.
그 둘째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의 故人의 기여와 관련한 문제다. 그는 自他가 공인하는 것처럼 그의 평생을 대한민국의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민주화’라는 슬로건을 위해 그의 평행을 바쳐서 ‘투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정치 생애를 통하여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이행한 사실이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後世 史家들의 냉정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金大中 정권 기간 중 정부와 朝ㆍ中ㆍ東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어 IPI(국제언론협회)가 한국을 ‘언론자유 감시대상국’ 명단에 올려놓고 있을 때 한국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IPI 사무총장이 필자에게 털어놓은 感想(감상)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언론 자유 문제 때문에 한국에 자주 오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깨우친 것이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민주화’에 관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表象하는 일련의 가치체계를 내용으로 하지만 ‘민주화’는 정치인들이나 운동가들의 구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와 보니 ‘민주주의’와 ‘민주화’가 완전히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실제로 故 金大中 씨와 많은 야당 및 재야 세력 인사들이 과거의 군사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민주화’ 투쟁이라고 命名했고 또 일반적으로 그 같은 명명이 통용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故人이 靑瓦臺의 주인이었던 시절의 국정 운영은 물론 그가 야당을 수도 없이 만들고 부수고를 되풀이하고 또 이끄는 과정에서 과연 그가 실제로 얼마나 ‘민주주의’를 고지식하고 성실하게 실천ㆍ이행했는지는 좋게 말하더라도 의문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 故 盧武鉉 씨의 國民葬을 치르는 과정에서 보여준 언론의 모습은 181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테가 流配 중이던 엘바 섬을 탈출하여 베르사이유 宮으로 귀환하여 皇帝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野獸(야수), 우리를 탈출', '나폴레옹 보르도에 상륙', '전 皇帝 리옹에 入城(입성)', '皇帝, 베르사이유에 凱旋(개선)으로 헤드라인을 계속 바꿨던 프랑스의 신문들이 보여주었던 炎凉世態(염량세태)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이번에 故 金大中 씨의 장례 기간 중 이 나라 언론은 어떤 모습을 보여 줄 것인지 궁금증을 느끼기에 앞서 두려움을 금하기 어렵다. 故人에 대한 禮遇(예우)는 生前의 榮辱을 함께 아우르는 균형감각을 살리는 데서 正道를 찾는 지혜가 아쉽다. 이제 故人에 대한 장의절차를 놓고 國葬論이 거론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이에 관해서도 정부 당국은 炎凉世態에 휩쓸림이 없이 균형감각의 토대 위에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올바른 결정을 하는 것이 옳다. 모쪼록 이제 幽明을 달리 한 故人의 경우에서 많은 사람들이 깨우침과 함께 敎訓을 찾았으면 좋겠다. 마침 지금 막 TV 스크린에서는 북한의 독재자 金正日이 故人의 別世에 대해 심심한 哀悼의 뜻을 전해 왔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弔問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金正日도 지난 번 고 盧武鉉 씨의 他界에 이어진 이번 故 金大中 씨의 訃音을 통해 人生無常의 진리를 터득하고 그야말로 生前에 改過遷善의 기회를 포착할 수는 없을 것인지,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공연한 기대를 잠시 가져 본다. 이제 ‘투쟁’으로 살아 온 평생을 마감한 故人의 冥福을 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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