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영욕의 세월… 역사 속으로
IMF극복 '조기졸업' 성과 퇴임후 '평화 전도사' 역할 반(反)이명박 정치 활동 논란
한반도문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생에 걸쳐 천착해온 과제이다. '햇볕정책'을 빼놓고 김 전 대통령을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그는 집권하자마자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대했고,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그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 때문에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남북 화해와 통일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편에선 '원칙이 결여된' 대북 유화정책과 정상회담 성사 과정에서 북에 제공된 5억달러 등이 북한의 핵무장을 도왔다는 정반대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청와대 시절의 명암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자' 시절이 없었다. 'IMF 환란(換亂)'의 와중이라 당선 다음 날부터 사실상 대통령으로서 경제위기 극복을 지휘해 나갔다. 대기업 '빅딜', 금융사 통폐합 등 경제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2001년 8월 IMF에서 빌린 돈을 모두 갚아 '조기 졸업'을 이뤄냈다.
IMF문제 못지않게 DJ가 역점을 두었던 분야는 남북관계이다. DJ가 남북문제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정국 때 몽양 여운형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그는 1971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도 미·일·소·중 4대국에 의한 한반도 평화보장론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고, 통일정책으로 '남북연합→연방제→통일국가'를 골자로 하는 '3단계 통일론'을 내거는 등 남북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3단계 통일론은 남북 정상회의를 최고 의사 결정기구로 하는 남북연합을 첫 단계로,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성숙하면 연방제를 만든 다음 통일국가를 이루자는 내용이다. 이 같은 행적과 주장 때문에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색깔론과 사상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 ▲ 2000년 남북정상회담 둘째 날인 6월 1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그는 마침내 2000년 6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분단 반세기 만에 첫 남북 최고지도자의 만남이었다. 13일부터 15일까지 2박3일간의 평양 방문에서 그는 김 위원장과 '6·15 공동선언'을 합의, 발표했다. 이 공적 등을 인정받아 그해 12월 그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은 대규모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적인 성과도 이루었고, 개성공단이라는 남북한 경제 협력 모델도 진행시켰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현대측이 5억달러를 북에 제공한 사실이 퇴임 후 알려지고, 햇볕정책을 통해 북에 전달된 각종 현금 지원이 북의 핵 개발자금으로 이용됐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김 전 대통령의 대북 정책도 재평가 대상이 됐다. 그 공과를 둘러싼 보수·진보 진영 간의 격렬한 논란은 남남(南南) 갈등이라는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유화적인 대북 화해 협력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2006년과 2009년 잇따라 핵실험을 하면서 그의 햇볕정책과 통일론은 빛이 바랬다. 결국 남북문제에 대한 그의 공과는 역사가 평가할 몫으로 남았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으나 총선결과는 한나라당에 뒤지는 제2당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다.
2002년 초부터 잇따라 터져 나오기 시작한 홍일·홍업·홍걸 세 아들과 권노갑씨 등 측근들의 잇단 비리는 노(老)대통령의 임기 말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신장 투석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도 나빠졌다.
김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평화적 정권 교체에 이은 정권 재창출에까지 성공한 것이다.
청와대를 나와 자연인으로 돌아간 김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중 처음으로 전용 사무실 겸 도서관인 '김대중도서관'을 개관했다. 그는 퇴임 후에도 세계 평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을 위해 유럽, 중국, 말레이시아 등 세계 각국을 방문하고 국내외 주요 언론들과 인터뷰하는 등 '평화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멈추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과 같은 진보 성향의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정치적으로 침묵했지만 2008년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수차례 언론 인터뷰, 공개 강연 등을 통해 현 정부의 대북 강경 노선을 강하게 비판했다. 지난 5월 검찰의 '박연차 리스트' 수사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DJ의 '반(反)이명박 정부' 활동은 정점에 달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독재자에 아부하지 말고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해 큰 정치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 자살로 큰 충격을 받아 이후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졌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이처럼 생전 그에게는 '불굴의 민주투사' '민족의 지도자' '남북 화해 협력의 전도사' '인권운동가'라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대북 퍼주기 대통령' '지역·측근 정치의 원조'라는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 그의 거대한 생애에 대한 평가는 '3김시대'에 대한 평가와 함께 역사의 몫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