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北) 경유 천연가스 도입 에릭슨 15억달러 투자… 정부·청와대 한건주의 산물
청와대 참모와 일부 경제 부처의 조급한 실적주의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외교'가 번번이 차질을 빚고 있다. 이 대통령의 해외 순방이나 정상회담이 있을 때 청와대와 정부 부처가 설익은 투자 유치나 해외자원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가 대통령이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현 정부의 과도한 성과주의 때문"이라는 지적과 함께 대통령 참모들의 충성 경쟁이 빚은 부작용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정상간 경제외교에서 단기 업적주의에 집착할 경우 자칫 국가 신뢰에 금이 가고 우리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조급한 실적주의
유럽을 순방 중이던 대통령이 스웨덴에 머물던 지난 12일 청와대와 방송통신위원회는 '에릭슨이 한국에 15억달러(2조원)를 투자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요지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하지만 이틀 뒤인 14일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국 정부의 발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보도를 했다. "한국 정부 발표에 놀랐다. 에릭슨 회장이 이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는 에릭슨 한국 대표의 인터뷰 기사를 실은 것이다.
-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2일 오전(현지 시각) 스웨덴의 통신장비업체인 에릭슨을 방문해 한스 베스트베리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두 사람의 면담이 끝난 후 청와대와 방송통신위원회는 에릭슨이 한국에 15억달러를 투자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에릭슨은 한국 정부에 정확한 투자 규모를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이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러시아 순방길에 발표한 '북한을 경유한 천연가스 도입' 발표도 성급했다는 지적이다. 당시 청와대와 지식경제부는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을 경유하는 가스배관을 통해 러시아 천연가스 도입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북한은 러시아와 가스배관 설치에 합의한 사실이 없다. 가스공사 관계자는 "북한을 통한 가스배관이 어려우면 바다를 통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들여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난 2월 이라크와 유전 개발사업에 합의했다는 발표는 국제적 망신거리가 됐다. 당시 이 대통령은 방한 중인 탈라바니 이라크 대통령의 요청으로 이라크 남부 유전 개발과 이라크 SOC(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연계하는 사업에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하지만 두 달 뒤에 이라크 정부는 유전 개발사업에 한국 기업들의 참여를 배제시키겠다고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이들 기업이 쿠르드 자치정부와 불법 유전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정부는 이라크가 비공식으로 제시한 투자금액(35억5000만달러)을 외부에 흘렸다가 이라크 정부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부처간 한건주의 경쟁
국가간 각종 계약은 합의가 있은 뒤 양측이 시점을 정해 동시에 발표하는 것이 외교 관례다. 하지만 현 정부에서 설익은 발표가 반복되는 것은 청와대와 부처들의 한건주의 욕심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번 에릭슨 투자 해프닝은 방송통신위원회가 에릭슨 실무진과 얘기하다 나온 비공식 투자금액을 성급하게 청와대에 전달한 게 화근이었다.
북한을 경유한 러시아 천연가스 도입 발표도 섣불렀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에 배관을 설치해 천연가스를 공급받다가 북한이 일거에 배관을 끊을 경우 에너지 안보에 충격을 줄 수 있고, 북한 참여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과거 정부도 수 차례 검토하다 포기했던 사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식경제부는 당시 사업 규모가 1000억달러가 넘는 초대형 프로젝트임을 강조하면서 "이 대통령 취임 이후 7개월여간 심도있는 논의를 거친 자원외교의 최대 성과"라고 홍보했었다. 청와대도 "남북경제 협력의 새로운 모멘텀(전기)이 될 수 있다"고 가세했다. 주무 부처가 아닌 참모조직인 청와대측이 국제 협력 사업을 브리핑하는 것도 어색하다는 지적이 많다.
◆정상 발표는 신중해야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는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면 눈 앞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정부 부처 사이에 퍼져 있는 것 같다"며 "성과주의 위주의 경제외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조명현 고려대 교수는 "사익(私益)을 위해 대통령에게 과잉 충성하는 참모들 때문에 빚어지는 일일 수 있다"며 "정치적 목적으로 국익(國益)이 달린 사안을 정부가 지나치게 앞서 발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