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총의 세번째 큰 조직 예상못한 압도적 찬성률
노동계 투쟁의 변화 예고
1995년 11월 한국통신(현 KT) 노조가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에 합류했다. 지지부진하던 민주노총 창설을 급물살에 올려 놓은 결정적 흐름이었다.
당시 한국통신 노조는 조합원 수 5만명으로 국내 최대의 노조였다. 한국통신 노조의 합류 이전까지 민주노총 준비위는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통신 노조의 가세는 한국노총에 대적할 새로운 노총의 건설에 핵심적 동력(動力)으로 작용했다.
그 14년 뒤인 17일, 조합원 수 2만8434명으로 민주노총에서 세 번째로 큰 기업 노조인 KT노조가 조합원의 95% 투표, 95%의 찬성으로 민주노총 탈퇴를 결의했다. 이로써 민주노총은 1995년 창설 이후 최초로 산별(産別) 연맹 중 하나(IT 연맹)가 사실상 붕괴되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특히 KT노조 찬반 투표의 '95% 투표, 95% 찬성'이라는 결과를 놓고 노동계에선 "예상 이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같은 투표율·찬성률은 KT 노조는 물론 역대 다른 노조의 조합원 투표에서도 유례가 드문 일이다. 민주노총의 정치·이념투쟁 노선에 대한 노동 현장의 반감을 나타내주는 수치라고 노동계 관계자들은 말했다.
이날 KT 분당 본사 투표장에는 아침 9시부터 투표를 하려는 직원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투표소 관계자는 "오후 2시쯤 이미 투표율이 80%를 넘어섰다"며 "이만큼 투표율이 높을 줄은 집행부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전국 지부별로 설치된 투표소에서 KT 노조 조합원 2만8434명 중 2만7018명(95%)이 투표에 참가, 2만5647명(95%)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미 KT와의 통합을 결의한 KTF 노조(조합원 1700명)도 KT 투표 결과에 따라 별도의 투표 없이 민주노총을 탈퇴하게 된다. KT 노조는 성명에서 "새로운 노동운동을 열망하는 조합원들의 엄중한 선택이었다"며 "민주노총의 과도한 정치투쟁에 염증을 느낀 조합원들이 보다 실질적이고 주체적인 노동운동을 벌일 것을 요구하는 희망의 목소리"라고 밝혔다.
KT노조의 탈퇴로 민주노총은 1995년 창설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민주노총 역사상 처음으로 16개 산별 연맹 중 KT가 가입한 IT연맹이 사실상 붕괴될 사태가 왔기 때문이다.
IT연맹 산하에는 총 18개 사업장 노조가 있으며, 이 중 통합 KT 노조의 조합원 수는 3만134명(KT 2만8434명, KTF 1700명)으로, IT연맹 전체(3만2307명)의 93%를 차지한다.
여기에 아직 남아 있는 KT 관련사 노조들이 탈퇴할 경우 IT 연맹은 사실상 형해화(形骸化)하는 결과를 맞게 됐다. KT 계열사인 KT데이타시스템 이철희 노조위원장은 이날 "민주노총 탈퇴에 대해 조합원들에게 여론을 수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IT연맹이 와해될 경우 민주노총이 창립 때부터 목표로 내세웠던 산별 노조 건설의 꿈은 크게 후퇴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지난 2004년 민주노총에서 제명당한 것을 제외하면, KT노조의 탈퇴는 민주노총이 창설된 이후 최대 규모의 이탈 사례다.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수 65만명(2008년 말 현재)의 4.6%에 해당하는 조합원이 일거에 빠져나가는 데다, KT 노조가 IT연맹과 민주노총에 납부해오던 월 6800만원의 조합비(맹비)도 당장 끊기게 됐다.
민주노총 내부의 역학(力學) 관계에도 큰 변화가 불가피하게 됐다. KT노조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를 좌지우지하는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
KT노조의 민주노총 대의원 수는 39명으로 전체 대의원(968명)의 4%가 넘는 비중을 차지해왔다. 이 때문에 KT노조는 역대 민주노총 선거 때마다 위원장 선거를 가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민주노총 위원장들을 번갈아 배출해 온 국민파(우파)와 중앙파·현장파(좌파) 사이에서 KT노조가 판세를 결정짓는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아직 탈퇴는 안 했지만 민주노총의 강경투쟁 노선과 거리를 둬 온 다른 노조들에게도 이번 KT노조의 탈퇴는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KT노조 개표가 완료된 후 발표한 성명에서 "민주노총은 인천지하철 등 몇몇 노조의 탈퇴로 흔들리지 않았다"며 "KT노조의 탈퇴로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이란 것은 희망에 가깝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