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탄 난 '노무현 정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적(政敵)을 공격하거나 자신들의 무능이 비판받을 때,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둘렀던 '도덕성 정치'가 파탄을 맞고 있다. 재임 중 일부 측근들이 비리 혐의로 수사를 받을 때도 "깜도 안 되는데 소설 쓴다"며 부정했던 노 전 대통령이지만, 박연차 회장 수사로 그의 형과 핵심 측근들은 물론 자신에게까지 수사망이 좁혀지자 이번엔 말문을 닫고 있다. 그의 지지자들조차 "마지막까지 믿었다. 그런데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결국 이런 것이었냐"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 재임 시절 도덕성을 정치적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웠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조카사위에게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돈 500만 달러가 흘러들어 간 정황이 포착되면서,‘ 박연차 태풍’의 핵에 서게 됐다. 사진은 지난해 말 세종증권 비리 의혹이 확대될 당 시 노 전 대통령이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자택을 방문한 관광객들과 대담시간을 갖던 중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후보 시절부터, 검은돈으로 얼룩진 기성 정치권을 공격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그는 "낡은 정치의 핵심은 돈" "검은돈 받으면 검은 정치 하는 것 아니냐"며 정적들을 공격했다. 노 전 대통령을 둘러싼 운동권 인사들은 항상 도덕적 우월성을 무기로 삼았고, 그런 식의 '낡은 정치' 공격은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 이후에는 "청탁하면 패가망신시키겠다"며 기세를 올렸다. 전직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버스 타고 다니다 갑자기 택시 타고 출퇴근하는 청와대 직원이 있으면 바로 민정수석실의 감시 대상이 될 정도로, 돈 문제 하나는 깨끗했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노 전 대통령은 그의 형 건평씨의 인사청탁 의혹이 불거지면 "힘없는 시골 노인에게 머리 조아리지 마라"고 했고, 그의 측근들 수사에 대해선 "소설을 쓴다"며 보호막을 쳤다. 임기 말 국정운영의 난맥상이 드러난 만신창이가 됐을 때도 노 전 대통령은 "부동산 외에는 꿀릴 게 없다"며 여전한 자신감을 드러냈고,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참여정부는 도덕성 측면에서 역대 그 어떤 정권보다 깨끗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연차 회장 수사를 통해 '힘없는 촌로'였던 건평씨는 회사 인수·합병에 개입해 검은돈을 받는 차원을 떠나 여당 선거 후보까지 조율하고, 박 회장의 불법자금을 중재·배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386 측근인 민주당 이광재·서갑원 의원이 박 회장의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거나 수사를 받고 있다. 박정규 전 민정수석,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을 비롯해 다른 그의 측근들도 줄줄이 수사 선상에 올랐다. 마침내 박 회장의 돈 50억원이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에게 들어간 것으로 밝혀지면서, 검찰 수사가 노 전 대통령의 목 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퇴임 후 정치재개 시도가 화 불렀나
"무능하지만 깨끗했다"는 지지층들의 평가도 "무능하면서도 부패했다"는 비난으로 변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 보호막으로 기대했던 민주당마저 '성역 없는 수사'를 외치며 그를 외면하고 있다. 민주당 박병석 정책위의장은 3월 31일 "현 정권이건 전 정권이건 누가 됐든 분명한 진실 규명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노영민 대변인도 "의혹이 있다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수사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민주당은 이광재·서갑원 의원 등에 대한 수사는 '표적수사'라며 반발하면서도, 유독 노 전 대통령 문제에 대해선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청와대 자료 유출 사건, 자기 홈페이지를 통해 인터넷 정치를 해 온 것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것도 민주당의 외면에 한몫했다. 노 전 대통령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야권 주변에선 노 전 대통령이 친노세력을 규합해 정치활동을 재개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전직 대통령이 집에 청와대 자료를 가져오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일일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며 "대선 패배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무슨 염치로 정치에 개입할 생각을 하느냐"고 했다.
일각에선 노 전 대통령 주변에 대한 현 정권의 강도 높은 수사가 그의 정치재개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조카사위에게 흘러간 박 회장의 50억원이 결국 노 전 대통령의 정치재개 종잣돈 아니었느냐는 말까지 야권 주변에선 나오고 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측은 "50억원 문제는 우리가 확인해줄 사항은 아닌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