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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제목 김현희 씨, 다구치 가족 면담 앞두고 어제 날짜 日신문에 편지/다른 기사들 (동아닷컴)
글쓴이 동아닷컴 등록일 2009-03-06
출처 동아닷컴 조회수 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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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국제   2009.3.6(금) 02:59 편집


 

김현희 씨, 다구치 가족 면담 앞두고 어제 날짜 日신문에 편지

 



“우여곡절 끝에 곧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다구치, 자식 보고싶어 흘린 눈물 얼마나 많았을까”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 씨(47·사진)가 최근 산케이신문에 편지를 보내 다구치 야에코 씨 가족과의 면담을 앞둔 심경을 밝혔다. 5일자에 소개된 편지는 5장 분량이다. 다음은 편지 요약.

지금까지 노무현 정권하에서 긴 피난생활을 해왔다. 한일 양국 정부의 주선으로 다구치 씨 가족과의 만남이 다가오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실현을 앞둔 이 만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다.

이 만남은 개인적 기쁨을 넘어 양국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공간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 이번 면담은 북한 탓에 헤어진 양국의 이산가족에게 가족은 국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 하늘 밑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다구치 씨는 이 소식을 모를 것이다. 한 살배기 아들을 두고 북한에 납치된 그녀는 성인이 된 아들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만 그렸을 거다. 헤어진 자식을 만나고 싶어 30년간 흘린 눈물은 얼마나 많았을까. 그 아들이 성장해 자신의 구출운동을 하고 있고, 엄마 이야기를 들으려 나를 만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녀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흘릴 거다. 그리고는 아들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살아갈 거다.

나도 북한에 그리운 부모나 형제가 있지만 생사조차 모른다. 이대로 가족과 생이별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엔 세상이 너무도 한스럽고 가혹하다. 다구치 씨의 아들이 그렇듯 나도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

현재 한국과 일본에는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 가족이 있다. 일본 정부의 노력에도 2002년 9월 이후 납치피해자 송환은 저조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한다. 일본 정부가 북한 당국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드디어 다구치 야에코가 가족을 만나게 됐다’는 1면 기사가 보도되기를 기원한다.

2009년 3월 초순 김현희


동영상 제공: 로이터/동아닷컴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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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국제   2009.3.6(금) 02:59 편집


“한살 때 빼앗긴 어머니를 돌려주세요”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 이르면 다음주 김현희 씨 만나
 

1978년 납북 ‘김현희 일본어선생’ 다구치 씨 아들 ‘눈물의 사모곡’

《“스물한 살이 돼서야 친엄마가 누구인지 알게 됐습니다. 지금도 북한에 살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김현희 씨를 만나면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직접 듣고 싶습니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북한명 이은혜) 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32) 씨는 엄마 얘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붉혔다.

이르면 다음 주 한국에서 김 씨를 만날 것으로 알려진 그를 4일 일본 도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범인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김 씨는 북한에서 다구치 씨에게 일본어를 배우면서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다.》

“‘네 엄마는 따로 있다’아버지로 알았던 외삼촌 스물한살 때 진실 알려줘 / 엄마의 기억 하나 없지만 31년전 빛바랜 가족사진 늘 가슴속에 품고 살아 / 숨졌다는 北주장 안믿어 한국 가서 金씨 만나면 엄마 얘기 실컷 듣고 싶어”

 

 

이혼 후 혼자 두 자녀를 키우던 다구치 씨가 종적을 감춘 것은 1978년 6월. 이즈카 씨와 두 살 위인 그의 누나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그의 나이 한 살 때였다. 이즈카 씨는 외삼촌 이즈카 시게오(飯塚繁雄·현재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 씨의 양자로 입적됐고, 누나는 이모(다구치 씨의 언니)가 맡았다.

외삼촌은 그가 양자라는 사실을 숨겼다. 어린 나이에 충격을 받을 것을 염려해서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외삼촌 외숙모 고모 사촌 등 온 식구가 함구했다. 무려 20년 동안.

누나는 어렴풋한 기억이 남아 있어 친엄마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지만, 누나조차 그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

진실은 스물한 살 가을에 갑자기 찾아왔다. 1998년 미국 출장을 위해 여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호적등본에 ‘양자’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던 것.

“충격이었습니다.”

그 직후 외삼촌은 “사실 네 엄마는 따로 있다. 북한에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가 친엄마다”라고 말해줬다.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그가 세상을 향해 “내가 다구치 씨의 친아들입니다. 납치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십시오”라고 외치기까지는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그동안 남모를 눈물을 흘리며 설움을 삭이고 또 삭였다.

사실 그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 사진이나 김현희 씨의 책을 통해 엄마를 접한 게 전부다. 그래서 김 씨와의 만남을 무척 기대하고 있다. 엄마가 그를 뱃속에 품고 있던 때에 만들었던 모자 건강수첩과 탯줄도 함께 갖고 가겠다고 했다. 자신과 엄마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헤어진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그는 엄마가 납치되기 수개월 전에 함께 찍었던 빛바랜 가족사진을 늘 품에 안고 있다.

그는 엄마가 1986년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북한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북한이 제시한 교통사고 조사서에는 엄마 이름도 없고 절반이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귀국한 납치 피해자 중에는 1986년 이후 엄마를 본 사람도 있다”는 게 그 이유다.

2004년에야 ‘엄마의 아들’임을 밝힌 데 대해 그는 “6자회담에서 납치 문제가 진척이 안 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에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때부터 그는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개 활동에 적극 나섰다.

그해 김현희 씨를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일본 외무성을 통해 부치기도 했다. 하지만 편지가 김 씨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는 “헤어져 살아야 하는 납치 피해자 가족의 애환에 귀 기울여 달라”며 한국 국민의 관심을 촉구했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동영상 제공: 로이터/동아닷컴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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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정권초 김현희씨 만나고 싶다고 수차례 편지…전달 안돼”



다구치 야에코 씨의 오빠 이즈카 시게오 씨가 지난달 26일 도쿄에 있는 납치피해자가족회 사무실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다구치 씨가 실종된 뒤 다구치 씨의 아들을 입양해 키워왔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인터뷰]다구치 오빠 이즈카 시
 
게오 씨
 
 

《북한에 납치돼 김현희 씨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씨의 오빠 이즈카 시게오(飯塚繁雄·70) 씨는 “부모님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다구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눈을 감으셨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26일 도쿄에 있는 납치피해자가족회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과 김 씨의 만남이 국제사회가 납치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일본의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를 맡고 있다.》

“다구치 아들은 내가, 딸은 이모가 양자로
아들 성인될 때까지 온가족이 비밀 지켜
‘언제 돌아오려나’ 마음 고생하던 어머니
17년 ‘통한 세월’ 눈물로 지새다 돌아가셔
다구치 아들 고이치로가 친엄마 느끼게
金씨에게 동생 北생활 생생히 듣고싶어
한국 정권 바뀐뒤 납치문제 해결할 의지
日정부와 긴밀 협력해 구체적 조치 기대”

―다구치 씨에 대한 기억은….

“동생은 명랑하고 밝았다. 이혼한 이후 바(bar)에서 일하며 아들딸을 키울 정도로 생활력도 강했다. 북한 공작원이 김 씨의 일본어 선생을 물색하다 결혼 경험도 있고 젊은 데다 일본 잡지를 통해 최신 유행도 잘 아는 다구치를 점찍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피랍 이후 가족생활은….

“처음엔 실종사건인 줄 알고 전국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머니는 14년 전, 아버지는 25년 전 돌아가셨다. 살아생전 내내 딸 걱정을 했다. 언제나 돌아올까 눈물 흘리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납치 사실을 끝내 몰랐고 어머니는 생전에 들었다.”

―다구치 씨의 자녀는 어떻게 자랐나.

“아들(고이치로, 당시 1세)은 내가, 딸은 이모(다구치 씨의 언니)가 키우기로 하고 양자로 입적시켰다. 고이치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양자라는 사실을 모르게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충격을 받아 방황할까 봐 염려했다. 내 자식도 3명이 있는데, 이들에게도 절대 ‘진실’을 입 밖에 내지 말도록 입단속을 시켰다. 20년 동안 온 가족

이 비밀을 지켰다.”

―고이치로 씨가 ‘납치 피해자의 아들’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반응은 어땠나.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가족사진을 처음 본 것도 그때다. ‘따뜻한 엄마’라며, 직감적으로 친엄마를 알아보더라.”

―피랍 당시 상황은….

“1978년 6월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다. 당시 다구치는 22세였다. 그런데 동생의 방에 유서나 메모 같은 게 전혀 없었다. 단순 실종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갈 동생이 아니다.”

―북한에 납치됐다는 걸 언제 알게 됐나.

“1991년 일본 경찰이 김 씨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이은혜’가 다구치라고 결론 내렸다.”

―당시 일본에서의 반응은….

“처음엔 정부나 사회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납치 피해자들이 스스로 북한에 간 것 아니냐는 의심도 일부 있었다. 정부도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1997년 가족회가 결성된 이후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북한은 다구치 씨가 198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요코다 메구미(橫田惠)의 유골도 유전자(DNA) 분석 결과 거짓으로 드러났다. 북한 주장은 거짓이다. 교통사고 관련 사진도 제대로 없다. 납치 피해자의 사망진단서도 복사한 것처럼 모두 같은 모양이었다.”

―다구치 씨가 북한에서 한국인 납치 피해자와 결혼했다는 설도 있다.

“귀국한 납치 피해자한테서 2005년에 그런 얘기를 들었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 씨를 만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데….

“노무현 대통령 초기인 6년 전에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몇 번이나 보냈으나,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김 씨의 NHK 인터뷰를 보면 편지를 안 본 게 드러난다.”

―김 씨에게서 무슨 말을 가장 듣고 싶나.

“고이치로가 친엄마를 느낄 수 있도록 다구치의 북한 생활의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 얼마나 불쌍하게 살았겠느냐. 자녀와 부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일본에 돌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듣고 싶다.”

―한국의 납치피해자가족회를 알고 있나.

“전에는 연대 활동도 했다. 나도 한국에 건너가 납치 피해자 문제 해결을 호소하기도 했다. 지금은 연락이 뜸하다. 한국은 납치 피해자 489명으로 가장 큰 피해국이다. 정보공유 등 연대 활동을 하고 싶다.”

―양국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한국의 정권교체 이후 양국 정부가 협력해 납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앞으로 구체적 조치를 기대한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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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賢姫元工作員 本紙への手紙全文

2009.3.5 00:12
 
 

 【ソウル=黒田勝弘】北朝鮮による日本人拉致被害者の一人、田口八重子さんの家族と近く面会することになっている、金賢姫元工作員(47)はこのほど、産経新聞ソウル支局にその心境をつづった手紙を寄せてきた。横書きの便箋(びんせん)5枚に丁寧なハングルで書かれ、田口さんの名前や自らの署名など一部に漢字が使われている。金元工作員が日本のメディアに自筆の手紙を寄せるのは初めて。以下にその全文を紹介する。

 

 数日前、花壇の片隅にスミレに似た、不釣り合いな黄色い野の花が咲いていました。かがみ込んでみたところ、冬の厳しい寒さを耐えしのび、温かい陽光を楽しんでいるその姿はいっそう美しく、崇高にさえ見えました。花々が花を咲かせる春3月が戻ってきました。今年は春の開花は例年より10日ほど早いそうです。

 

 (黒田支局長に)お会いしてから20年近くになると思います。山河が2度も変わるほどの長い月日が、川の流れのように流れました。おぼろげで長い歳月が過ぎましたが、私を記憶していただき、気にかけていただいていることに感謝いたします。

 

 その後、KAL(大韓航空)機事件に関し書かれた記事を読ませていただき、最近も産経新聞に私に関する記事を掲載してくださったと聞きました。私に対しいつも関心を持っていただき、声援していただいていることに感謝いたします。

 

 私はこれまで盧武鉉政権の下で長い避難生活をしてきましたが、韓日両国政府のすすめで私と田口八重子氏の家族との出会いが近づいております。日本のマスコミはこの出会いに大きな関心を持っていると聞いています。

 

 紆余(うよ)曲折の末、ついに実現することになったこの面会を考えるとき、私の心はあふれんばかりです。この出会いが個人的な喜びに終わるのではなく、韓日両国がお互い理解し協力する空間に拡大することを信じています。

 

 また今回の面会は、北韓(北朝鮮)によって離ればなれになった両国の離散家族にとって、家族とは国家におとらず大切で貴重な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を教えてくれる時間になることでしょう。

 

 しかし、北韓のどこかの空の下で苦しんでいる田口八重子氏は、夢にまで見た彼女の子供と自分が、彼女に代わって会うのだということを知らずにいます。

 

 1歳になる息子をおいて北韓に拉致された彼女は、30歳を超える成人になった息子、飯塚(耕一郎さん)のしっかりした姿を、これまで想像の中で描くしかなかったでしょう。彼女が30年間、別れた子供に会いたいと思いながら流した涙はどれほどだったでしょう。

 

 以前から彼女の兄、飯塚繁雄氏と息子、飯塚耕一郎氏は、拉致された人たちの送還のための救出運動を展開してきました。

 

 今、その息子が成長し、母の救出運動をしているという事実を彼女が知れば、そして彼が母の話を聞こうと韓国で私に会うという事実を知ったなら、彼女は喜びのあまりその大きな瞳から、また涙を流すことでしょう。

 

 そうして彼女は新たな希望を抱き、子供に会える日を首を長くしながら、生きていくことでしょう。

 

 私もまた北韓に懐かしい父母や兄弟がいます。しかし私の家族の生死を知ることはできません。私が家族との生き別れを運命だとそのまま受け入れるには、この世はあまりにも恨めしく、過酷です。田口氏の息子がそうであるように、私が母に会いたいという心情は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のです。

 

 現在、韓国と日本には北韓による数多くの拉致被害者家族がいます。特に日本政府の努力にもかかわらず、2002年9月以降、拉致被害者の送還は低調というのが実情です。本当に、どうすれば北韓当局の体面を生かしその心を動かすことがのできるでしょうか。

 

 「至誠感天(真心であたればその思いは天に通じる)」といいます。私が田口氏の家族との面会を前にしているように、日本政府が北韓当局の閉ざされた心の門を開かせ「ついに田口八重子がその家族と会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という1面記事が、マスコミに報道されることを祈っております。

 

2009年3月初旬 金賢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