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中 개혁개방 30년]<上> 성장의 빛과 그늘 (동아일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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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아일보 | 등록일 | 2008-12-17 |
출처 | 동아일보 | 조회수 | 1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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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국제 2008.12.16(화) 02:59 편집 |
확 키운 덩치…수출 獨제치고 1위 전망
체질이 문제…빈부격차 극심해져
《중국의 ‘개혁개방’이 18일로 30주년을 맞는다. 이날은 중국 공산당이 1978년 역사적인 개혁개방을 선언한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를 개막한 날이다.
중국은 그동안 순조롭게 비약적 성장을 거듭하면서 경제 대국이자 국제사회의 핵심 주역으로 우뚝 섰다. 말 그대로 ‘삼십이립(三十而立)’인 셈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도전은 결코 만만치 않다. 산업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 재도약을 꿈꾸는 중국은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갖가지 난관에 직면해 있다.
중국은 이런 파고(波高)를 넘어 개혁개방의 최종 목표인 ‘전 국민이 잘사는 현대화된 사회주의 국가’를 이뤄 낼 수 있을 것인가. 개혁개방의 성과와 과제, 미래 전망을 3회에 걸쳐 조명한다.》
외환보유액 2조달러 세계 1위… 세계 무역 7% 차지 ‘경제공룡’
5분기 연속 성장률 급감 ‘빨간불’… 농민공 실직해결도 숙제
○미국과 겨룰 경제대국으로 우뚝
현재 중국 가정의 ‘싼다젠(三大件·3대 재산)’은 아파트와 자가용, 컴퓨터다. 개혁개방 초기인 1980년대 냉장고, 컬러TV, 비디오카메라였던 중국의 싼다젠은 1990년대 휴대전화, 에어컨, 음향기기로 변하더니 최근엔 한국과 다를 바 없어졌다.
중국 건국 초기인 1950년대 싼다젠이 손목시계와 자전거, 녹음기였다는 점에 비춰 보면 중국의 변화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개혁개방 이후 30년간 중국이 이룩한 경제 업적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다. 지난 30년간 중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9.8%. 고속 성장했던 한국과 일본의 성장률을 능가한다.
1978년 224.3달러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역시 지난해 2482.4달러로 늘어 초보적인 ‘샤오캉(小康·그런대로 먹고살 만한) 사회’로 진입했다.
절대빈곤층 역시 크게 줄었다. 1978년엔 전체 농민의 30.7%인 2억5000만 명이 기아에서 허덕였지만 지난해엔 농민의 1.6%인 1479만 명으로 감소했다.
중국의 지난해 수출은 1조2180억 달러로 독일의 1조3265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올해는 1조4000억 달러를 넘어 1위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전체 무역액은 2조1738억 달러로 1978년 0.8%였던 중국의 세계무역 비중은 지난해 7.7%까지 올라갔다.
30년 전 1억67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올해 9월 말 현재 1조9055억6000만 달러로 단연 세계 1위다. “10년 후 미국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국가는 중국뿐”이라는 경제전문가들의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빈부격차 등 넘어야 할 과제도 산적
지금까지는 순조로웠지만 앞으로 도전은 만만치 않다. 당장 경제성장률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2분기 12.6%까지 최고조에 올랐던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5분기 연속 하락해 올해 3분기 9.0%를 나타냈다.
내년엔 8% 성장도 어렵다는 예측이 많다. 심지어 5%대로 전망하는 기관도 있다. 중국이 30년간 비약적 성장을 이룩했다지만 지난해 중국의 1인당 GDP는 세계 209개국 중 132위에 불과했다. 1978년엔 175위였다.
게다가 빈부 격차는 세계에서 가장 심한 편이다. 최근 중국의 경제는 연착륙보다는 경착륙에 가깝다. 중국 경제의 경착륙은 전 세계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농민공 대량 실직 ‘발등의 불’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적 집단이자 중국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계층은 ‘농민공(農民工)’이다. 농민공이란 도시에서 일하는 농민 출신 노무자를 말하는 것으로 1984년 사회과학원의 장위린(張雨林) 당시 교수가 사용한 후 일반화됐다.
현재 중국 전역의 농민공은 도시 농민공 1억2600만 명과 향진(鄕鎭)기업 농민공 1억 명을 포함해 2억26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이 도시로 나온 이유는 농촌에 잉여 노동력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중국의 노동집약적 기업들이 잇따라 도산하면서 사회 최하계층인 농민공이 직격탄을 맞았다.
올해 들어 실직해 고향으로 돌아간 농민공은 자그마치 1100만 명. 전체 도시 농민공의 8.7%에 이른다.
농민공의 대량 귀향은 농민 수입의 감소와 직결된다. 중국 농민 수입의 49%는 외부 노무활동에서 벌어들인 것이다. 특히 최근 농민 수입 증가분의 70%는 농민공의 월급이다. 농민공의 귀향은 여전히 1억5000만 명의 잠재 실업자를 갖고 있는 중국 농촌에 또 다른 부담이 된다.
중국런민(人民)대 노동인사학원 정궁청(鄭功成) 교수는 “농민공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게 개혁개방 30주년을 맞는 중국이 당면한 최대의 전략적 과제”라고 말했다.
광저우·둥관·정저우=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 “개혁-개방은 역사적 필연이었다” ▼
[1] 문화대혁명 반감
[2] 경제 낙후 자각
[3] 사회주의 위기의식
■ 中공산당 최근 분석
덩샤오핑(鄧小平)을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고 부르지만 ‘죽의 장막’ 사회주의 중국의 역사적 물줄기를 크게 뒤바꾼 개혁개방은 그의 머릿속에서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중국 공산당 산하 중앙당교가 발행하는 주간 ‘학습시보’ 최근호는 “개혁개방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역사적 필연’으로 여기엔 크게 3가지의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다”고 전했다.
가장 직접적인 배경은 문화대혁명의 좌경적 오류에 대한 반작용이다. 문혁 10년간 중국은 약 5000억 위안(약 100조 원)의 국내총생산(GDP)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중국 건국 이후 30년간 투자한 기초 인프라 건설비의 80%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다.
두 번째는 중국의 경제와 과학기술이 크게 낙후됐다는 자각이었다. 건국 초기에 세계 40위권이었던 1인당 GDP 역시 175위까지 떨어졌다.
특히 당시 중국의 무역액이 1950년대 중국 산둥(山東) 성의 경제규모와 비슷했던 한국의 무역규모에도 뒤처졌다는 사실은 지도부를 분발케 했다.
세 번째는 중국 공산당이 지금 개혁을 하지 않으면 중국의 사회주의는 장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이 제기한 정책은 굳건히 옹호해야 하고 마오의 지시는 시종일관 따라야 한다’는 이른바 ‘량거판스(兩個凡是)’의 사회 기류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던 당시로서 물꼬를 바꾸기 위한 작업은 쉽지 않았다.
이에 따라 덩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은 마오의 지시 여부가 아니라 실천이 돼야 한다는 사상 해방의 문제를 제기했다.
예젠잉(葉劍英), 이셴녠(李先念), 천윈(陳雲) 등이 덩의 사상해방을 지지하면서 개혁개방은 점차 세력을 얻기 시작했다.
1978년 6월부터 덩은 강연할 때마다 개혁개방을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개혁개방이 실질적으로 결정된 것은 1978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격렬한 토론을 거듭한 중국 공산당의 중앙공작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는 당의 업무 중점을 계급투쟁보다 경제건설에 두며 진리의 표준은 실천이라는 개혁개방의 핵심 내용이 채택됐다.
덩은 중앙공작회의 폐막일에 개혁개방을 정식으로 제기했다. 이에 따라 중국 공산당이 개혁개방을 선언한 제11기 3중 전회 이전에 중국 29개 성 가운데 27개 성이 사실상 개혁개방 지지를 선언했다.
실제로 역사적인 3중 전회가 폐막한 뒤 발표된 ‘공보(公報)’엔 ‘개혁개방’이라는 네 글자는 없었다. 하지만 내용을 종합 정리하면 핵심 키워드는 바로 ‘개혁개방’이었다.
중국 개혁개방 30년 일지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 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 개혁개 방 선언
1980년 8월 선전(深(수,천)), 주하이(珠 海) 경제특구 지정
1984년 4월 상하이(上海) 등 동남 부 14개 연안도시 개방
1989년 6월 톈안먼(天安門)사태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 실각
장쩌민(江澤民), 당 총서기로 취임
1992년 1~2월 덩샤오핑, 남순강화 (南巡講話)
1992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14차 전 국대표대회, 사회주의 시장경제 공식화
1997년 2월 덩샤오핑 사망
2001년 12월 중국, 세계무역기구 (WTO) 가입
2002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 3개 대표론 당장(黨 章) 삽입 후진타오(胡錦濤) 당 총서기 취임
2004년 3월 사유재산권 보호조항 헌법에 삽입
2005년 6월 상하이 푸둥(浦東)신구 종합개혁시험구 지정
2007년 3월 제10기 전국인민대표 대회 제5차 전체회의. 물권법 통과, 사유재산과 국유재산 똑같이 보호
2008년 8월 베이징(北京) 올림픽 개최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