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지고 AIG에 정부의 구제금융 투입 조치에도 불구하고 증시가 폭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진 9월17일 오후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헨리 폴슨 재무장관에게 전화를 했다. 버냉키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무뚝뚝했다.
버냉키는 폴슨에게 의회에 가서 광범위한 구제금융에 대한 승인을 얻을 때가 됐다고 촉구했지만 이를 꺼려왔던 폴슨은 당장 답을 주지 않았다. 폴슨은 다음날 아침에서야 버냉키에게 전화를 해 의회에 가서 공적자금을 요청할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10일 이런 일화를 소개하면서 지난 9월 리먼브러더스의 몰락을 전후해 폴슨과 버냉키가 금융위기 대응에서 겉으로는 일치된 행동을 보였지만 막후에서는 리먼의 운명과 구제금융 방안 등을 놓고 종종 논쟁을 벌였고 각자의 권한에 대한 한계 탓에 서로가 더 나서도록 몰아세웠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이들의 견해 차이는 위기에 대한 정부의 접근법을 규정하는데 기여했지만 신뢰회복이 최우선이었던 시기에 한동안 혼란과 비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FRB와 재무부는 각자 수장의 특성을 반영해 FRB는 학술 세미나와 같은 토론 스타일로 운영되고 재무부는 폴슨이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지휘.통제 방식으로 운영되는 등 스타일이 크게 다르기도 하다.
재무부와 FRB는 리먼브러더스의 몰락 이전에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도 견해 차이를 보였다. 폴슨 장관은 리먼을 정부의 지원을 통해 살리는 것에는 선을 긋고 시장에서 해법이 찾아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뉴욕 연방준비은행 티모시 가이스너 총재를 비롯한 일부 FRB 관계자들은 이 같은 폴슨의 입장이 탐탁치 않았다. FRB 관계자들은 폴슨이 리먼을 살릴 준비가 돼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3월에 몰락 위기에 처한 베어스턴스를 JP모건체이스가 인수할 때처럼 리먼도 임자가 나타나면 FRB가 지원할 준비를 했으나 결국 리먼은 임자를 찾지 못해 파산보호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리먼 몰락 이후 7천억달러의 구제금융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의회에 신속히 요청할 것을 원한 버냉키와는 달리 의회가 구제안을 거부할 경우 더 큰 혼란이 올 것을 우려해 머뭇거렸던 폴슨은 결국 의회에 금융기관의 부실자산을 인수하는 내용의 구제금융법안을 들고 갔다.
버냉키는 부실자산을 인수하는 것도 유용한 수단이라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재무부가 은행에 자본을 직접 투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폴슨도 내부적으로는 자본투입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얘기는 했지만 의회 청문회 등 공개석상에서는 이를 선택할 가능성을 배제한 입장만 밝혔다.
이렇게 의회에 제출된 구제금융안은 9월29일 하원에서 부결돼 시장을 더 큰 혼란에 빠드렸고, 구제금융안이 10월3일 의회에서 통과된 이후 미국은 유럽이 금융위기에 대응해 은행에 자본투입을 하는 것을 보면서 결국 자신들도 은행에 자본 투입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폴슨과 버냉키의 이런 내부 갈등은 왜 베어스턴스와 달리 리먼을 그냥 무너지게 놔뒀는지, 왜 이들이 의회에 보다 빨리 달려가지 않았는지, 은행에 자본을 직접 투입하는 것을 반대했던 폴슨이 결국은 얼마 뒤에 이 방안을 받아들이게 됐는지 등 그동안 의문으로 남았던 결정의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다.
신문은 이런 혼란의 와중에 정책 입안자들은 중요한 시간을 놓쳐 폴슨과 버냉키가 의회에 달려간 9월18일에서 구제금융법안이 통과된 10월 3일까지 미 증시는 1조5천억달러의 가치를 잃었다고 전했다.
입력 : 2008.11.11 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