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weekly chosun] '후계자 김정철' 띄우기 군부가 전면에 나섰다 (조선닷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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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선닷컴 | 등록일 | 2008-10-26 |
출처 | 조선닷컴 | 조회수 | 2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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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건강 이상설로 북한의 후계구도가 주목받는 가운데 김정일의 차남 김정철(27)이 북한 군부의 지지를 받으며 후계자로 급부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탈북한 인민군 장교 출신의 한 소식통은 “인민군 고위 장성급 군인들 사이에서 ‘김정일의 후계자는 김정철’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정철은 현재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실질적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고위층 내부에서 김정철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는 ‘후계자로서 부적합’ 쪽에 가까웠다. 특히 당 조직부의 내부 평가는 “장남 김정남에 비해 조직 장악력이 떨어지고 후계자로서 강력한 리더십이 없다”는 것으로 1차 결론이 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장남인 김정남(37)의 경우 김정일 눈 밖에 나 오랫동안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그래도 후계자로서 자질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고위탈북자에 따르면 노동당 조직부는 김정남에 대해 △권력 장악력이 우수하고 배짱이 있으며 △김정일을 닮아 욱하는 성격도 비슷해 △권력을 맡을 경우 체제 유지는 가능하다는 분석을 했다고 한다.
군 핵심 실세 현철해·김영춘 중심
김정철에 대한 충성 맹세 마무리 단계
하지만 이러한 후계자 경쟁 구도는 최근 군부의 개입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북한 내부에 정통한 한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 군부 핵심에서는 김정철에 대한 충성맹세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으며 김정일도 군부에 김정철을 당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김정철의 뒤에는 군 핵심 실세인 현철해(인민군 총 정치국 부총국장)와 김영춘(인민군 총 참모장)이 버티고 있어 김정철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는 거의 굳어져가고 있다는 것이 대북 소식통의 분석이다.
이런 후계자 부상 과정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하는 과정에는 당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노동당의 지시로 당 하부 기관에서 지지 운동이 시작돼 후계 구도가 완성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을 제치고 군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대북 소식통들은 이번에 김정철이 후계자로 내정된다면 당 하부 기관이 아닌 일선 군부대부터 후계자 지지 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철을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북한 군부로서는 나름대로 속셈이 있다. 북한은 지금까지 김정일 1인 독재 권력이 모든 것을 지배해 왔다. 여기에는 군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군부는 김정일의 꼭두각시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왔다. 10만 군인을 통솔하는 군단장이라고 해봐야 김정일에게 10분 단위로 행적이 보고될 정도의 극심한 감시 속에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북한 수뇌부는 군부의 입김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상대하기 버거운 김정남보다 김정철이 후계자로 더 적당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인자인 김정일 매제 장성택이 변수
김정남 등 중심으로 反旗 들 가능성도
물론 변수도 적지 않다. 가장 주목할 것은 북한의 2인자로 군림하던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의 선택이다. 그동안 장성택은 김정일의 극심한 견제로 중책을 맡지 못하고 권력 외곽에서 떠돌았지만 당과 군부를 함께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후계구도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에서 김정일이 급사하는 변고가 발생할 경우 그가 군부의 뜻대로 김정철을 선택하느냐가 향후 권력 구도의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 입국한 한 고위탈북자는 “장성택 부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북한 권력 중심부에서 직책에 관계없이 활동하며 당과 군대의 간부들과 두터운 인맥을 쌓아왔기 때문에 김정일에게 급변 사태가 벌어질 경우 장성택에게 권력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정철이 군부에 의해 옹립된다고 해도 김정일이 급사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김정남과 장성택이 군부와 김정철에게 반격을 가하는 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군부의 야심가들이 군 수뇌부의 후계구도 결정에 반기를 들 가능성도 있다. 이럴 경우 북한은 ‘형제의 난’과 군부 내의 분란으로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건강 이상설이 나도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북한이 후계 구도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김정일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그동안 북한에서 후계자 지명 문제는 누구도 감히 거론하지 못하는 함구령의 대상이었다. 군부의 충성파가 후계 문제만 거론되면 “장군님(김정일)이 살아계시는데 무슨 후계자냐”고 들고 일어나는 상황에서 후계 문제는 곧 충성도와 결부되는 극도로 민감한 사안이었다.
“후계자 되면 중국식 개혁개방 하겠다”
김정남 경거망동하다 김정일 눈 밖에
김정일 스스로도 후계자를 지금까지 지정하지 못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김일성 생전에 권력을 장악해 아버지를 꼭두각시로 만든 경험이 있는 김정일로서는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워 권력을 나눌 경우 벌어질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아들 셋 가운데 믿고 맡길 만한 재목이 없다는 현실적 이유도 작용했을 법하다. 북한의 권력 구도가 김정일 사후 노동당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로 자연스럽게 변할 것으로 관측하는 사람도 있지만, 김정일은 여전히 ‘김씨 왕조’를 완성시키려는 야욕에 젖어있다고 보는 게 옳다. 김씨 왕조를 이어갈 최적의 핏줄이 없어서 고민했을 따름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북한에서 그동안 물밑 후계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남 김정남의 경우 물밑 후계 경쟁에서 상당히 앞선 적도 있다. 김정남은 1990년대 후반 국가안전보위부를 맡아 운영했고 노동당 조직부에서 경험을 쌓기도 했다. 한 고위탈북자는 “김정남이 한때 측근을 동원해 ‘기쁨조’를 만들어 아버지(김정일)와 똑같은 파티를 하며 권력 기반을 닦아왔다”고 말했다. 호방한 성격으로 평양 고려호텔을 들락거리며 손님들과 마찰을 빚는 등 곳곳에서 그를 목격했다는 사람들도 많다. 당시 그는 북한에서 김정일에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김정남에 대해 “아버지보다 한 술 더 뜨는 망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남은 2000년 초 평양의 고급 호텔에서 노동당 고위층 자녀들을 모아놓고 “내가 후계자가 되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겠다”고 발언한 것을 계기로 권력 중심부에서 멀어졌다. 당시 김정남의 발언에 대해 김정일은 호된 비판을 가했고 김정남을 중책에서 쫓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후 김정남은 해외 비자금을 지키기 위해 일본과 마카오, 중국 등을 떠돌면서 해외생활을 하는 처지가 됐다. 장기간의 해외 생활이 반대파의 견제 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정남은 2001년 일본에서 추방당하는 망신을 당하는 등 위상에 손상이 가는 사건도 많이 겪었다. 어머니 성혜림이 모스크바로 쫓겨나 있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이모인 성혜랑 부부가 외국으로 망명했으며, 이종사촌인 이한영도 남한으로 망명했다가 피살당했다.
수년 전에도 군부 중심으로 후계 경쟁
김정철 생모 고영희 사망으로 잠잠해져
실제 김정일은 김정남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는 관측이 많다. 후계자로 지명된 후에도 아버지 김일성에게 아부와 충성을 바쳐온 자신과 달리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개혁개방’을 대놓고 거론하는 김정남에 대해 효심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김정남의 출생 성분도 김정일이 못마땅해 하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김정남은 유부녀 성혜림의 아들로 출생 당시 사생아처럼 그의 존재가 비밀에 부쳐지기도 했었다.
반면 김정철은 모친 고영희(김정일의 전처로 2004년 6월 사망)의 위세를 업고 후계 경쟁에서 김정남을 앞서기 시작했다. 김정철과 3남 정운의 모친인 고영희가 살아있을 때 군 부대를 중심으로 ‘우리 어머니 따라 배우기 운동’이 전개되다가 중단된 적이 있다. 당시 고영희에 대한 군부의 칭송 작업은 그의 아들 김정철에 대한 후계자 내정을 염두에 두고 군부의 김정철파가 벌인 것이었다. 당시 군부는 ‘김정일은 백두산 정기를 받았고 고영희는 고향이 제주도이기 때문에 백두와 한라의 정기가 합쳐진 김정철이 수령의 후계자로 적격’이라며 본격적인 선전에 들어가려 했지만 고영희의 사망으로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영희가 살아있을 당시 장남인 김정남은 수난 시절이었다. 고영희의 치맛바람으로 그의 아들들인 정철과 정운 가운데 후계자가 지명되는 듯했으나 고영희의 사망으로 후계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후 김정일의 강력한 지시로 후계 문제는 수면 아래로 들어가 잠잠해졌지만 ‘김정일 건강 이상설’과 함께 다시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1974년 32세 때 후계자 공식 지명
삼촌·동생 등 경쟁자 대대적 숙청
북한의 후계 문제가 불거지면서 김정일이 과거 후계자로서 권력을 잡은 과정에 다시 눈길이 가고 있다. 오랜 후계 수업을 거쳤지만 김정일 역시 최고 권력자로 올라서는 과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일성 생전에 후계 문제는 1971년 6월 처음 거론됐다. 김일성이 사회주의청년동맹 6차 대회에서 후계자 문제를 처음 언급한 것이었다. 당시 김정일은 29세였다. 이후 김정일은 노동당 선전부 등에서 활동하다가 32세 때인 1974년 2월 후계자로 공식 지명됐다. 하지만 이후 김정일은 경쟁자들을 숙청하며 처절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
우선 강력한 후계 라이벌이었던 삼촌 김영주는 양강도 산골로 추방했다.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 완성된 이후 삼촌을 평양으로 다시 불러들였지만 김영주는 이후 아무런 권한도 없는 원로로 외롭게 살았다.
김일성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던 이복동생 김평일을 견제하기 위해 김평일의 친모인 김성애와 남동생 김성갑(평양시당 책임비서)에 대한 숙청도 단행했다. 이른바 ‘곁가지 사건’이다. “김일성과 김정일 외에 모든 사람은 그가 수령의 아들이나 부인이라 할지라도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논리가 강요됐다. 김정일 경호원 출신의 한 탈북자는 “김정일이 김성애를 격리시키기 위해 젊은 여성을 들이밀며 김일성을 안심시켰고 부인인 김성애는 거의 격리하다시피 했었다”고 말했다. 이후 김평일의 측근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숙청되기 시작했다. 김평일과 사진을 찍었다는 ‘죄’로 김평일의 주방장까지 수용소로, 시골로 추방 조치됐다.
| 김정일 건강이상설과 북한 동향 |
중병설 급속 확산… ‘입 단속’ 특별감찰
체제 붕괴 위기감, 후계자 작업 발등의 불
현재 김정일 중병설은 외부에서보다 북한 내부에서 더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다.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는 최근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문이 내부에 급격히 확산돼 체제가 불안해지자 이를 단속하기 위한 대대적인 감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국경을 넘은 인민군 군관(장교) 출신의 한 탈북자는 “김정일 건강이상설은 이미 7월경부터 군대 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공화국 창건 60돌(9월 9일)을 기념해 인민군에서 차출된 수만 명의 군인이 군사 퍼레이드를 준비하다가 9월 9일을 두 달 앞둔 시점에 전격 취소되면서 건강이상설이 나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고위 군인들은 김정일이 행사장에 나오지 않을 것으로 이미 예상했고 실제 이 무렵 김정일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북한 내부에 확산되고 있는 김정일 중병설을 방치할 경우 체제 와해와 같은 급격한 변화가 예상된다고 판단, 주민들의 입 단속을 위해 발언의 최초 진앙지를 캐는 한편 김정일에 대한 발언을 일절 금지시키고 있다고 한다. 후계자를 내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김정일에게 변고가 생길 경우 체제 붕괴에 이를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김정일 최측근들까지 다급하게 만들고 있다. 후계구도를 빨리 마무리 지어 체제를 안정시키지 않으면 자신들의 생존도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