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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된다" 밀어붙인 박정희의 '대예술작품'
하면 된다" 밀어붙인 국토 대(大)동맥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25] 경부고속도로 건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8.07.11 03:05 / 수정 : 2008.07.11 06:43
- 그것은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오직 "하면 된다" 정신으로 밀어붙인 '박정희 감독작(監督作)'이나 다름없었다. 1968년 2월 1일, 대통령 박정희는 지금의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근처에서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굉음과 함께 바위산이 쪼개지며 길이 열렸다. '조국 근대화와 경제개발의 상징'이 될 경부고속도로가 기공되는 순간이었다.
1964년 서독을 방문했던 박정희에게 충격을 준 것은 확 트인 아우토반이었다. 귀국 뒤에도 틈만 나면 종이 위에 도로망을 낙서하던 그는, 1967년 대선 공약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 건설'을 내놓았다. 고속도로? 그런 말조차 생소하던 한국에서는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일어났다. "부유층의 유람로를 만들려느냐." "1인당 GNP 142달러인 나라에서 그게 왜 필요하냐." 박정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기공식 석 달 전부터 예산 한 푼 없이 육군 공병단을 투입, 서울~오산 구간의 건설에 들어갔던 것이다.
노선, 공정 계획, 추진 방식을 모두 대통령이 결정했다. 상공부장관 김정렴은 훗날 "대통령이 마치 전쟁처럼 직접 '전투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은 공식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카이저 지프를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가장 어려운 대전~대구 구간 중에서도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은 지형적으로 험난한 '마(魔)의 구간'이어서 숱한 고초를 겪었다. 2년 5개월의 공사기간 동안 77명이 순직했다.
- 1970년 7월 7일, 총연장 428㎞(현재는 직선화 등으로 416㎞), 305개(현재 353개)의 교량과 12개의 터널을 포함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됐다. 계획보다 1년이 앞당겨진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의 완공이었다. 대통령은 "가장 싼 값(1㎞당 약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大)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고, 샴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렸다. 전국이 비로소 '1일 생활권'이 됐으며,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가 열리게 됐다. 한국도로공사는 이 도로의 경제적 편익을 연간 13조5500억원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고속도로에 집착한 나머지 철도의 복선화·고속화와 기존 도로의 확장을 상대적으로 경시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