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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제목 “北대남공작 ‘현지본부’ 서울에 있다?!” (프리존뉴스)
글쓴이 프리존뉴스 등록일 2008-07-02
출처 프리존뉴스 조회수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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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대남공작 ‘현지본부’ 서울에 있다?!”

 

“조선노동당 서열 20번째 내외 거물책임자 서울 상주”


‘한국논단’ 전직정보요원 증언 바탕 특집기사서 언급

 

 

 

 

 

김필재 기자 2008-07-01 오후 11:39:38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 ‘1부 현지본부’가 서울에 설치되어 매일·매시의 활동 지침과 결과보고가 서울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예상된다.ⓒ 한국논단
김정일 정권의 대남공작 조직 ‘1부 현지본부’가 서울에 설치되어 “매일·매시의 활동 지침과 결과보고가 서울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예상된다.

보수성향 월간지인 ‘한국논단’(발행인 이도형)은 최신호(7월호)에서 익명을 요구한 전직 정보요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특집기사를 통해 “남한에서 활동 중인 하급공작원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느라 북(北)으로 갔던 시대는 지나갔다”면서 이 같이 밝혔다.

전직 정보요원들은 구체적으로 북한의 대남공작은 김정일→로동당 대남담당→당 대남 연락부 비서→통일전선부 작전부→중앙당 35호실이 분담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한국민주전선중앙위원회→남조선문제연구소 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또 북한의 대표적 대남공작 조직인 통일전선부에는 한국사정조사 연구에 수십 년 종사해온 골동품 같은 전문가들이 3,600명 이상 있어 남쪽사정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1990년대 들어 남파공작원들이 북한 공작부와 교신한 무선전화는 하루 10만 건 내외였으나 김대중 시대에 와서는 한 때 하루 50만 건을 넘다가 노무현 시대에 와서는 1만 건 이하로 감소했다고 증언했다.

무선전화를 통한 공작원들의 대북접촉이 이처럼 줄어든 이유에 대해 전직 정보요원들은 “인터넷을 통한 e-메일의 활용과 함께 남한 현지 지휘본부가 서울에 설치되고, 북한 정권에서 서열이 20번 내외쯤 가는 거물책임자가 서울에 상주하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이어 1975년 남베트남 패망당시 북베트남 대남공작부가 현지 지휘부를 수도 사이공에 두었던 점, 90년대 초 독일통일 직전까지 서독정부 산하에 1만 명의 동독공작원들이 있었던 점 등을 예로 들면서 “남한의 사정은 월남이나 독일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행정·입법·사법·언론·문화 등 각 분야는 물론 심지어 군부와 정보기관에도 (공작원들이) 침투해 있다”면서 이들이 안주하고 있는 곳은 “각 기관, 시민단체 등 광범위하며 그동안 혁명과업 수행에 바빴다”고 언급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작원들이 안주하고 아지트로 삼고 있는 소위 시민단체는 대체로 XX통일, XX연합, XX통일, XX민족청년, XX문제연구소 운운의 간판을 내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 아닌 정부, 정부 아닌 공작요원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현직 정보요원들과 밀접하게 협조해온 미국 CIA외에는 잘 모르고 있다.”

전직 정보요원들은 “미국의 CIA나 군 정보부대는 김영삼 시대 초까지 긴밀하게 협조해오던 한미 정보교환을 포기했다”고 밝힌 뒤, 미국을 대신해 “경계의 대상이던 중국공산당 공작원들이 김대중 시대 이래 더러 정보를 교환하는 사이가 됐다”고 증언했다.

프리존뉴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아래는 ‘한국논단’ 최신호에서 전직 정보요원들이 언급한 김일성 사망의 내막.
김일성은 외국 원수와의 만남 외에는 모든 일을 김정일에게 맡기고 있다고 김영삼과의 회담에 쓸 잔꾀를 구상하며 한가로이 평양에서 지방으로 차를 달리고 있었다.

어느 산촌 길에서 소변을 본 김일성은 마침 언덕위로 가는데 초라한 초가가 보여서 들어갔더니 어두컴컴한 부엌의 냄새가 났다.

솥뚜껑을 열어보니 보리쌀알과 함께 이름도 모르는 채소(흔히 있는 잡초)가 삶아지고 있어 찌그러진 방문을 열어보니 초라한 여인이 누워있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솥에 끓이고 있는 것이 여인의 저녁 식사란 소리를 듣고 그래도 백성을 위한 양심은 남았었는지 김일성은 놀라서 전화로 김정일을 불렀다.

“너는 내가 전권을 맡길 때 인민을 배불리 먹이겠다고 약속했지. 그런데 이게 뭐야 여기 산골의 어느 농가에 들어가 보니 인민이 굶고 있지 않아?”

울화통이 치민 김일성은 즉시 차를 평양으로 돌리며 배신감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측근 호위가 심장전문의사를 차가 가는 방향으로 보내라고 하자 김정일은 주치의 출발을 일부러 늧췄다.

헬리콥터의 도착이 늦어지니 심장병은 더 악화되어 평양 궁전에 도착한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에게 심장의 고통을 참으며 “너를 믿은 내가 잘못이다. 인민들이 다 잘살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보고하더니 현지 인민들은 저렇게 굶고 있어. 너 가지고는 안 되겠다 너의 동생 평일이를 불러 들여야겠다”면서 떠들었다.

김정일은 아비를 진정시키며 심장병을 고쳐드리기보다 오히려 말대꾸를 되풀이하니 궁전의 밀실에서는 부자간의 말싸움이 벌어지다가 주치의의 치료도 보람이 없이 아비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