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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여인’ 박근혜도 울린 ‘크로싱’ 시사회
[취재파일] 피하고 싶던 그 곳의 진실…北주민 삶 그대로 재현
[ 2008-05-29 14:09 ]
27일 오후 영화 ‘크로싱(감독 김태균)’의 시사회가 열린 국회의원 회관 대회의실로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들어섰다. 많은 관객들로 북적이던 행사장 안에서 빈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아주머니들의 말투에 순간 시선이 쏠렸다.
“철웅이, 너 살 많이 쪘구나. 그래, 학교는 잘 다니고?”라며 남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주머니의 말투에서 북한식 억양이 묻어나왔다. 이날 시사회에는 정치권 인사뿐만 아니라 탈북자 및 북한인권 NGO 관계자들도 상당수 초청됐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이는 듯 분주하게 인사를 나누던 탈북자 일행은 객석에 불이 꺼지고 ‘CROSSING’이라는 글자가 스크린에 펼쳐지자 숨죽인 채 화면을 바라봤다. 탈북자가 보는 영화 ‘크로싱’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의 첫 화면에는 주인공인 북한 노동자 용수(차인표 역)의 집과 탄광, 그리고 마을의 모습이 등장했다. 그러자 옆 자리에 앉아있던 탈북자 일행은 “맞다, 맞다, 비슷하게도 해놨네”라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영화가 끝난 후 탈북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크로싱’은 지금까지 북한을 소재로 만든 영화중에 가장 근접하게 북한을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가 상영된 지 20여분쯤 지났을까. 보위부가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던 용수의 친구 집에 들이닥치는 장면에서 탈북자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이후에 등장하는 북한군의 모습과 총성에도 놀라는 듯했다. 특히 주인공 용수가 두만강을 넘는 장면에서는 객석 전체에 긴장감이 흐르기도 했다.
이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객석은 말 그대도 ‘눈물바다’를 이뤘다. 정치권의 오랜 풍파를 견뎌 온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마저도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 듯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아픈 아내의 약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는 용수와 아들 준이(신명철 역)의 헤어짐. 엄마의 죽음으로 홀로 남은 준이가 ‘꽃제비’로 떠도는 장면. 중국 공안을 피해 도망치는 용수의 절박한 몸부림. 이 모든 장면들이 탈북자들에게는 단순히 영화 속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은 듯했다.
준이가 우여곡절 끝에 중국-몽골 국경의 철조망을 건너는 장면에서는 절로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언제 잡힐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에서 벗어난다는 안도감이 어떤 것인지 이들은 서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크로싱’이 탈북자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이 2008년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는 것만이 아니라 굶지 않고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것도 그들에겐 전쟁이자, 전투라는 사실을 말이다.
누군가는 차마 피하고 싶은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단정 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가 가져야 할 흥행 요소가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탈북자들 뿐 아니라 시사회에 온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북한의 참담한 현실 앞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친북 성향의 단체에서는 연일 남북관계를 떠들고, 통일에 대해 얘기하지만 정작 그들의 외침 속엔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은 담겨있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는 적어도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생생히 숨 쉬고 있다.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 속에는 담기지 못하는 북한 사람들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영화를 만든 김태균 감독은 말한다. “500만 명만 이 영화를 본다면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고. 김 감독 자신도 10년 전 우연히 꽃제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 이 이야기를 영화화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길거리에 떨어진 국수를 시궁창 물에 씻어 먹는 어린 아이의 얼굴은 지금까지도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충격과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본 수많은 관객들도 극장을 나설 때는 이와 비슷한 부채의식을 가슴 속에 안게 될 것이다. 그 숫자가 500만 명이든, 100만 명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던 북한의 맨얼굴이 고스란히 공개되는 순간 과연 한국의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비록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지라도 피하지는 말자. 영화 ‘크로싱’의 개봉이 손꼽아 기다려진다.
[양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