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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이런 사람들을 납치했다"
"사회 각계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인사들"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KWARI, 원장 이미일)은 30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KWARI 포럼’을 개최, 6·25전쟁 당시 납북문제를 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주제발표에 나선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6·25 때 납북된 사람들을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대부분의 납북자들은 ‘반동분자’로 규정된 인사들이거나 전문직 종사자, 또는 북한으로부터 ‘의용군’으로 징발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인민군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했던 우익인사 등 이른바 ‘반동분자’들을 北으로 끌고 갔다. 이들은 北에 끌려간 후 각종 정치교육장으로 내보내져 세뇌교육을 받았으며, ‘전향’이 되지 않는 경우는 아오지 탄광 등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다고 한다.
또 인적자원 확보를 위해 전문직 종사자들을 조직적으로 납북했다. 한글타자기를 개발한 공병우 박사(공안과 개설)도 그중 한 사람이는데, 그는 끌려가는 도중 탈출에 성공했다.
이밖에 인민군(의용군)에 강제징집된 젊은이들이 있는데, 이들중에는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처벌이 두려워 자진월북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공산당에 협력한 것이므로 피해자라 할 수 있다.
정 교수는 6·25전쟁 와중에 이같이 피랍된 사람들이 “이름과 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인원만 8만 2959명(KWARI 통계)이라고 밝혔다. 이와함께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자료에서는 피랍자를 116만 8,849명으로 집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납북문제 뿐 아니라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몸서리치는” 학살사건도 다뤄졌다. 이와 관련해 정 교수는 먼저 “지나간 정권이 ‘국군·경찰·우익에 의한 학살’에 대해 국가예산으로 철저한 조사를 전개했다”며 “이에 견주어 (북한이 저지른) 과거사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관련자료(공보처 통계국 등)를 통해 확인된 바에 의하면, 전쟁당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학살된 인원은 5만 9,964(12만 8,936명이란 통계도 있다)명에 달한다. 이중 호남지역에서 가장 많은 학살(전체의 82%, 4만 9,114명)이 자행됐으며, 특히 전남 영광에서는 2만 1,000여명이 학살됐다.
정 교수는 “수도권에서는 끌고간 인원이 많았던 반면, 학살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다”며 “다른 지역에 비해 호남지역에서 집단학살이 집중된 이유로, 후퇴로가 확보되어 있지 않아 보복에 대한 심리적 공포감이 무차별 학살로 이어졌다는 증언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인민군이 퇴각한 후에 산으로 도주한 빨치산 세력이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피해가 지속됐다”는 말도 부연했다.
주제발표가 끝난 후에는 납북자가족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6·25피랍자인 이길용 기자(자유신문사,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의 셋째 아들 태영 씨(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 전 중앙일보 국장)는 “6·25를 먼 옛날의 사상대립이나 무력충돌로만 기억하려는 젊은 세대에게 6·25의 참상을 다시한번 전해주고 싶다”며 “역사의 원한은 강물에 흘려버리라고 하지만 그래도 진실은 밝혀져 야 한다. 이것이 역사의 준엄한 명령”이라고 말했다.
이길용 기자는 절친한 동지(고 이관구 씨, 훗날 경향신문 주필 역임)로부터 피신하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당당하게 살겠다”며 거절했다가 결국 북으로 끌려가 불귀의 객이 됐다고 한다.
태영 씨는 북한이 아버지를 끌고간 이유에 대해, “민주당 조직부 차장으로 정계투신을 준비하고 있을 때”라며 “이러한 정치활동 때문에 (北으로부터) 요시찰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분석했다.
역시 피랍인 김유연 목사의 장남 성호 씨(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명예이사장)는, 인민군의 서울함락에도 불구하고 “서울사수”를 결의하며 남아있던 아버지를 비롯한 당시 교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공산치하에서 끝까지 남아있다 납북된 김 목사는, 北에 끌려간 후에도 지하교회를 지도하다 보위부에 끌려갔다(이후의 일은 전해진 바 없다).
한편 이날 행사를 주최한 이미일(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장은 “전시 납북자들도 엄연한 국민으로 정부가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다”며 “그럼에도 지난 10년간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전시 납북자’의 존재조차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용, 사전계획 하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지식층 및 지도층을 비롯한 청년들만 선별해 조직적으로 납북해 가거나 전선에 투입했다”며 “이 분들중 상당수가 사회 각계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기 때문에 납북된 것”이라고 강조했다.(Konas.net)
김남균 코나스 객원기자(http://blog.chosun.com/hile3)
written by. 김남균
2008.04.30 17:34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