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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제목 정의구현 사제단의 허위 폭로 사례 (조갑제닷컴)
글쓴이 조갑제닷컴 등록일 2007-11-18
출처 조갑제닷컴 조회수 1396

다음은 조갑제홈페이지 http://www.chogabje.com 에 있는 "정의구현 사제단의 허위 폭로 사례" 중에서 일부임. ----------------------------------------------------------------- 정의구현 사제단의 허위 폭로 사례 1987년 선거의 컴퓨터 부정개표 주장과 KAL 폭파 의혹설 주장은 다 허위로 밝혀졌다. 월간조선 외 편집자 注: KAL 858기 폭파사건 조작 의혹을 반박하는 月刊朝鮮 2002년 1월호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제하의 기사다〕 과연 누구를 위한 正義인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KAL 858편 사건에 의혹을 제기 컴퓨터 조작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는데도 사과가 없었다. 安企部 발표문·수사자료·재판자료만 읽어도 거의 해명되는 「金正日 지령 테러범죄」에 대해서 사제단이 새삼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상상의 집」이 아닌 「진실의 집」을 지으려면 사실확인이란 기초 工事가 튼튼해야 한다. 사제단의 「정의의 칼끝」은 金正日을 향해야 하지 않을까?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왜 이 시점에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가 답답한 일이다. KAL 858편 폭파사건 조작 의혹을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게 기자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귀찮은 일이다. 상식으로 생각하면 진실이 보이는데, 상식을 뒤틀어 보는 일부의 시각 때문에 KAL 858편 폭파사건과 관련된 기사를 또 작성해야 한다니 참으로 귀찮은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때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일컬어졌던 「진리에 살고 진리에 죽는다」는 신부님들의 모임에서조차 의혹 제기에 나섰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동안 KAL 858편 폭파사건 조작 의혹과 관련, 일부 단체와 시민들의 문제제기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 나섰다. 사제단은 2001년 11월23일 천주교인권위원회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이른바 「대한항공 858편 사건 관련 7大 의혹」을 제기했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해인 1987년에 일어난 「수지 김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KAL 858편 폭파사건 역시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기자로서는 정말 이런 의혹 제기를 하는 측이 KAL 858편 폭파사건이 조작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정말 조작이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서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피해자 가족들은 사건 발생 후 지금까지 14년 동안 줄곧 의혹을 제기해왔다는데 왜, 이제서야 피해자 가족들의 목소리에 닫았던 귀를 열고 대신 입을 열어 외쳐 주는 걸까. 피해자 가족들이 사제단에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진정서를 냈다고는 하지만 진정을 낸 사람들은 피해자 가족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다. 피해자 유족회 집행부는 『「대한항공 858편 폭파 희생자 유족회」라는 단체 이름으로는 KAL 858편 폭파사건에 조작 의혹이 있으니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진정을 사제단에 한 바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제단과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KAL 858편 폭파사건의 조작 의혹을 제기한 데 이어서 통일연대 등 일부 재야·사회 단체들이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다며 2001년 12월 초 「김현희 KAL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를 발족시켰다. 사제단은 통일연대의 소속단체로 참여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제기한 의혹의 대부분은 안기부 발표문, 검찰의 공소장 등 관련 기록을 검토하면 해소되는 의혹이라는 데 있다. 시민대책위가 2001년 11월29일 국정원에 보낸 공개질의를 보면 세 번째 문항에 이런 내용이 있다. <수사발표時 김현희의 아버지는 「현재 앙골라주재 북괴 무역대표부 수산대표」라고 했으나 안기부는 1988년 3월호 일본 문예춘추에 확인중이라고 바꿔 말했습니다. 그러면 미확인사항을 발표한 이유는 무엇이며 확인결과는 무엇입니까?> 1988년 1월15일에 발표된 안기부 수사발표문 4쪽에는 김현희의 아버지 김원석씨의 직책과 관련해 이렇게 씌어 있다. <아버지 김원석은 1962년에서 1967년까지 쿠바주재 북괴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근무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그후 소련주재 북괴대사관에서도 근무한 바 있고, 현재는 앙골라 주재 북괴 무역대표부 수산대표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확인중에 있습니다> 분명히 안기부는 수사 발표 때부터 『확인중에 있습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의혹을 제기하기에 앞서 최소한의 사전준비라고 할 수 있는 안기부의 수사발표문조차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상상의 집」을 지을 때는 기초공사가 필요 없지만 「실제의 집」을 지으려면 튼튼한 기초공사는 기본이다. 사제단은 천주교 인권위원회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천주교 인권위원회는 KAL기 유족들의 진정을 접수하고 KAL기 사건에 대한 再검토 및 관련자료를 토대로 확인과정을 마쳤습니다』 컴퓨터 조작설 내놓고도 사과 없는 사제단 사제단은 과거에도 「신중치 못한 처신」을 한 前歷이 있다. 1987년 大選 컴퓨터 조작설이 그것이다. 1987년 12월16일 大選 직후 당시 金泳三 후보와 金大中 후보는 盧泰愚 후보의 당선에 불복했다. 金大中씨를 대통령 후보로 낸 평민당은 같은 해 12월29일 「12·16 선거의 5大 의혹을 고발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5大 의혹」 가운데 하나가 컴퓨터 조작이다. 당시 在野도 평민당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조작설 등을 제기하며 1987년 大選은 부정선거라는 입장을 펼쳤다.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난 1988년 1월16일 당시 사제단 대표 金勝勳 신부와 천주교 공정선거 감시단 吳泰淳 신부는 대법원에 「대통령선거 무효소송」을 제기했다(대법원은 이 소송에 대해 1989년 5월11일자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대통령 선거 무효소송을 낸 한 달 후인 1988년 2월16일 사제단과 천주교 공정선거 감시단은 「12·16 선거 컴퓨터조작 증거포착」이라는 자료를 공개했다. 자료를 공개하면서 두 단체는 성명서를 통해 『개표가 진행되면서부터 나돌기 시작한 컴퓨터 조작설에 대한 조사 결과 조작설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증거를 다수 포착하였다』고 주장했다. 開票상황을 보도하는 텔레비전 화면 등의 증거자료를 함께 제시하면서 사제단 등은 『12·16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사전 계획된 지역별 후보별 득표별 조작에 맞춘 TV방영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선관위의 집계는 시차를 두고 TV 집계에 접근시켜 결과에 합법성을 부여하려 했다는 의혹을 씻을 수 없다』고 밝혔다. 사제단 등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컴퓨터 조작설은 선거 부정을 자행한 정권의 퇴진과 대통령 당선자의 사퇴 등 헌정의 중단을 초래할 정도의 「파괴력을 갖는 폭로」였다. 때마침 13代 국회 구성을 위해 1988년 4월26일에 치러진 總選은 헌정사상 최초로 집권당의 의석이 야당 의석보다 적은 與小野大 국회를 탄생시켰다. 與小野大의 13代 국회는 1988년 7월8일 「兩大선거 부정조사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특별위원회는 1990년 7월14일까지 2년여 동안 컴퓨터 조작설을 조사했다. 그 결과 조작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나타난 후보들의 득표 집계와 선거관리위원회의 개표상황과 차이가 난 것은 방송사들의 속보경쟁으로 인해 초래됐다는 사실 등이 밝혀진 것이다. 선거관리위원회가 표를 검산하는 동안 방송사들이 채 검산되지 않은 집계 결과를 방송사로 송고하면서 빚어진 해프닝인 것으로, 요즘도 선거개표 방송時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컴퓨터 조작이 사실이라고 믿었다면 사제단 등은 컴퓨터 조작설과 함께 再개표를 요구했어야 했다. 사제단과 金大中 측은 再개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 등이 국제적으로 확인한 사건 기자는 再개표 요구를 왜 안 했는지를 묻는 질의서를 사제단에 보냈다. 기자가 보낸 질의서에는 KAL 858편 폭파사건 조작 의혹 주장과 관련된 질의도 포함됐고, 12월13일까지 답변을 요청했다. 사제단 측은 『13일까지 답변은 어렵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사제단 지현만 사무국장은 『당시 컴퓨터 조작설을 제기한 신부님들이 해외에 나가 있는 등의 이유로 현재로서는 답변이 어렵다』는 입장을 전해 왔다. 컴퓨터 조작설은 國政의 낭비와 불신풍조 조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제를 제기했던 사제단은 그 결과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사과도 없었다. KAL 858편 폭파사건 역시 컴퓨터 조작설 같은 무책임한 의혹제기로 국가적 낭비를 초래하게 될 우려가 크다. 기자가 무책임한 의혹제기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근거는 지극히 상식적인 데서 출발한다. 「사건 후 김현희의 얼굴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 널리 알려졌는데도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북한 이외의 지역에서는 왜 가족은 물론 심지어 같은 마을에 살았다는 사람, 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사람조차 안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그 첫째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만의 주장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사실이 공인된 사건이다. 미국과 일본, 바레인, 미얀마, 인터폴 등 이 사건 수사에는 여러 나라와 국제기관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기 前 이 사건을 독자적으로 조사했다. 이 조사에서 미국은 ▲金賢姬가 머물렀다는 東유럽 소재 북한 관리의 집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金賢姬와 金勝日 두 공작원이 소지했던 청산염 앰플을 분석한 결과 과거에 체포된 북한 공작원들이 소지했던 앰플과 화학적으로 동일하다는 등의 결론을 내렸다. 이 조사결과는 1988년 2월4일 美 하원 외무위의 「아시아 태평양 소위」 주재 「KAL 858편 폭파 청문회」에서 발표됐다(자세한 내용은 月刊朝鮮 2001년 11월호 145쪽 참조). 일본도 이 사건과 관련된 조사를 벌였다. 金賢姬와 金勝日이 소지한 위조여권이 일본인 여권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당국은 여권을 위조하는 데 필요한 서류를 제공한 인물은 일본이 북한 공작원이라고 판단, 추적해온 인물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일본과 이 사건이 더 깊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이은혜 사건」이다. 金賢姬가 1988년 1월15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서 납치된 이은혜라는 여인으로부터 日本人化 교육을 받았다고 밝힌 것이다. 金賢姬의 기자회견 내용을 토대로 일본 경찰은 사실확인에 나섰고, 이은혜라는 여인이 1978년 6월 東京 신주쿠區에서 사라진 타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이타마縣 경찰은 조사에 들어간 지 3년4개월여 만인 1991년 5월15일 『이은혜는 다구치 야에코』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의 발표 후 일본 정부는 북한에 이 문제의 조사를 요구했다. 북한이 반발함으로써 당시 진행되던 日北수교 협상은 결렬됐다. 이 문제는 지금도 日北 수교협상에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밖에도 바레인 정부는 1988년 1월6일 KAL 858편 사고조사 보고서를 보내왔고, 미얀마 내무성도 1987년 12월15일 KAL기 잔해 발견과 관련된 발표를 했다. 인터폴은 한국 수사당국에 金賢姬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 체류 사실 등을 확인해 주었다. 지엽적 의문을 사건의 본질에 대한 의문으로 확대시켜 특히 미얀마 내무성은 『수거된 KAL 858편 잔해의 상태로 보아 사고기는 순간적인 충격과 함께 고열을 받아 공중 폭발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탑승객 중 생존자는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하는 한편 KAL편 잔해를 한국 정부에 인계했다. KAL 858편 폭파사건 수사에는 범인 인도 등의 이유로 여러 나라와 국제기관이 개입했다.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면 한국의 정부나 공안당국은 사건의 성격상 수사 관련자뿐만 아니라 최고위층까지 포섭을 했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가능한 일이었을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사제단과 천주교인권위가 제기한 「대한항공 858편 사건 7大 의혹」을 간추리면 블랙박스 수색작업 등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고, 金賢姬의 자백 외에는 증거가 없으며, 金賢姬의 진술 중 일부가 사실과 다르고, 안기부가 金賢姬의 사진이라고 공개한 金賢姬 사진은 金賢姬가 아니며, 대통령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는 의혹으로 집약된다. 진상규명 시민대책위가 주장하는 의혹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金賢姬 자백 외에 물증이 없다고? 기자는 당시 수사 관계자, 現국정원의 관계자 등을 만나 정의구현사제단,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등이 제기한 의혹 가운데 주요 항목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다음은 국정원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KAL 858편의 기체 결함 여부에 대해 조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기체 결함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기본이다. 우리는 기체 결함 여부에 대해 조사를 했다. 사고 비행기는 1977년 9월 기관사의 조작과실, 1987년 9월 락 로드(LOCK ROD) 파손 등으로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한 사고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1987년 9월7일부터 9월29일까지 보잉항공사 기술지도下에 동체 전면 하반부 표피·골격 교체 및 동체 전면 골격 부위에 대한 전반적인 비파괴 검사를 실시함으로써 기체에 대한 점검과 수리를 완료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수리 완료 후에는 약 4주 간에 걸쳐 미국 산타바바라에 있는 트라코社(TRACOR CO.)에서 항공기 엔진에 소음기를 장착한 후 장착 엔진 4기에 대한 전반적인 성능실험을 한 결과 정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機種의 경제적 사용 시간은 6만 시간이었고 세계 최고 사용 시간은 7만7674시간인데 반해 사고 비행기의 사용 시간은 3만6046시간이었다. 기체결함으로 인한 사고로 볼 만한 사항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랍 에미레이트의 아부다비 공항에서 승객 열다섯 명이 내렸다. 이 가운데 金賢姬 일행을 제외한 열세 명의 신원이 발표되지 않았다. 조사했는가. 『미리 金賢姬와 金勝日을 범인으로 찍어 놓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조사할 필요가 없었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수사기록에 다 나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아부다비 공항에서는 교체 승무원 여덟 명이 내렸고, 일본인으로 가장한 범인 두 명, 미국인 두 명, 아랍인 열한 명 등 일반 승객 열다섯 명이 내렸다. 전부 외국인이었다. 이 일본인 두 명의 신원을 일본 당국에 조사한 결과 하치야 신이치씨는 일본에 실존하고 있다는 위조여권 사실을 확인하고 곧바로 바레인 당국에 그 사실을 통보했다. 물론 다른 외국인들에 대한 조회도 실시했음은 물론이다. 명단도 공개할 수 있다. 수버 나지, 수버 수아드, 압둘 후세인, 나와 아흐메드 아비달리, 하미드 호다, 아미르 아흐메드 아비달리, 갈레브 모흐드, 알 바야티 판, 라피에 마카딤, 압둘라티프 살리마, 모하메드 수함, 모하메드 자말, 하타브 등 金賢姬와 金勝日을 제외하고는 미국인 두 명, 아랍인 열한 명이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사람들이다. 아랍인 중에 하타브는 독일 국적 이라크人이다. 함께 내린 대한항공 소속 승무원은 사무장 박길영, 남자 승무원 김석영, 이승규, 여승무원 조은경, 문영애, 박은미, 김재정, 함연호 등 여덟 명이다』 ―블랙박스 수색을 위한 수중 공명 위치 탐지기를 준비하지 않고, 사고발생 10일 만에 현지조사단을 철수하고 기체나 유품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색작업을 중단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답한 일이다. 우리는 블랙박스 수색과 유품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고 자부한다. 당시 정부는 홍순영 외무부 제2차관보를 단장으로 하는 정부 조사단 25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정부 조사단은 태국과 미얀마 정부의 협조를 받아 합동수색 구조본부를 설치하고, 항공기, 어선, 지상수색대 등을 지원받아 KAL기 추락 예상 지점인 태국·미얀마 국경의 산악 및 해상 지역에 대한 수색을 실시했다. 12월9일에는 고성능 음파탐지기가 탑재된 해저수색 전문 미군항공기 P3-C 세 대를 1차 지원받아 수색활동에 투입했고 이후 두 대를 더 지원받아 총 다섯 대로 안다만 해역 등에서 블랙박스와 잔해, 유품 등을 수색했다. 12월10일에 조사단이 돌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부 다 돌아온 것이 아니고 일부 조사단이 방콕에 차려진 사고대책본부에 남아 수색을 벌였다. 다만 블랙박스는 바다에 떨어지면 30일 간 2마일 범위 내에 신호를 보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12월29일에 수색작업을 종료했던 것이다. 그후 유족들의 요청으로 1990년 11월2일부터 15일까지 再수색을 실시한 바 있다』 ―블랙박스와 잔해 수색중 12월13일에 25인승 구명보트가 발견됐다. 구명보트에 있던 13종 50여 가지의 물품 중 공기압축펌프의 파손을 이유로 KAL기 잔해라고 주장하였는데, 구명보트가 멀쩡한 상태에서 50종의 물품 중 공기압축펌프만 파손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구명보트는 교통부 조사반이 감식을 했다. 교통부 조사반에 의하면 KAL기 구명보트에 내장되어 있던 비상공기유입용 수동펌프는 완전 파손되었으며 기타 내장품들은 상당 부분 파손된 것으로 보아 비행중 폭발에 의해 파손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구명보트에 부착된 자동 공기주입용 질소통에 「KAL NO. L-S-25」라는 글자와 「충전기한」이라는 글이 적혀 있어 사고기 잔해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金賢姬의 자백 외에 KAL 858편이 폭탄테러에 의한 공중폭발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물증은 무엇인가. 『대한민국 법원이 바보인가. 재판부가 자백만 갖고 사형 언도를 내리겠는가.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보면 金賢姬의 자백 외에도 증거가 무수히 많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범인들이 음독자살을 기도한 액화청산가스(일명 청산가리) 앰플은 과거 북한 간첩 신광수, 정해권 등이 소지하고 있던 액화청산가스 앰플과 형태, 성분이 동일하다. 북한제인 것이다. 金勝日의 義齒(의치)를 북한에 납치됐다가 치아수술을 받았던 납북귀환 어부 네 명의 義齒와 비교, 감정한 결과 시술재질, 보철공법 등이 동일했다. 金賢姬가 소재한 수첩에는 북한 對外정보 조사부 崔과장이 비상연락시 사용하라고 준 전화번호가 물품대금 구입액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표시한 암호로 적혀 있었다. 해독 결과 오스트리아 빈 및 베오그라드 주재 북한 대사관 전화번호와 일치했다. 金賢姬의 아버지 김원석이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주재관 및 공보담당 3등 서기관으로 근무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1962년 및 1965년 발행 쿠바 외교관 명단에는 김원석뿐만 아니라 金賢姬의 어머니 림명식의 이름이 함께 등재돼 있었다』 ―金賢姬는 자백을 통해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金勝日이 그의 여행용 가방 한 개와 폭파용 라디오 및 술병, 기타 담배 등이 들어 있는 비닐주머니(비닐쇼핑백)를 비행기 의자 위 선반에 올려 놓았다고 말했다.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KAL기 박길영 사무장은 金賢姬 일행이 폭약을 넣어 기내 선반에 두고 내렸다는 비닐 쇼핑백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 사실도 조사를 했다. 1988년 2월16일 안기부 이라크 파견관이 이라크 외무성의 협조를 받아 바그다드 공항 보안요원 등을 접촉, 확인했다. 1987년 11월28일 밤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KAL 858편에 탑승하려던 金勝日과 金賢姬의 휴대물품을 직접 검색한 보안요원은 자파르 모하메드씨와 사미라양이다. 이들은 당시 金賢姬는 반달형 검은 핸드백과 함께 소형라디오, 1.5V 배터리 네 개, 헤어드라이어, 화장품, 담배, 약 등이 들어 있는 비닐백을, 金勝日은 의류 등 일상용품이 들어있는 가방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前 유엔대사 朴銖吉의 증언:중국도 북한의 「조작」 주장을 믿지 않았다 사제단 등 KAL 858편 폭파사건 조작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측이 단골로 제기하는 것 중 하나가 1987년 大選에서 盧泰愚 前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외무부 제1차관보로서 범인 인수를 위해서 정부 특사 자격으로 바레인에 파견됐던 朴銖吉 前 유엔대사(現 경희大 평화복지대학원장)는 『KAL 858편 폭파사건이 조작됐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단정하면서 『더더욱 대통령 선거에 맞춰 金賢姬를 데려왔다는 주장은 뭘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소리』라고 말했다. 다음은 朴 前 유엔대사의 증언이다. 『당시 金賢姬 인수를 위해 바레인으로 갈 때 우리는 남파 간첩들이 쓰던 독약 샘플을 가지고 갔다. 함께 동행한 안기부 직원들에 의하면 남파간첩들은 소지하고 있는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가 가지고 간 독약 앰플과 범인(金賢姬, 金勝日)들이 사용한 독약 앰플은 성분이 일치했다. 당시 수사총국장이 영국인인 핸더슨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도 그 사실을 인정했고 그래서 범인 인도에 동의했다. 당시 릴리 주한 美대사도 미국이 자체적인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이 북한 공작원의 짓이었음을 확인했다고 전해 주었다. 이듬해인 1988년 2월17일 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해 KAL 858편 폭파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 측의 설명 후 유엔주재 중국대사인 리루웨가 북한을 변호하는 연설을 했는데, 그는 다른 때와 달리 그날은 3분도 안 되는 시간에 연설을 마쳤다. 당시 유엔주재 북한 대사 박길연은 한 시간 반 동안 연설을 하면서 내가 보석 등을 가지고 가서 바레인 왕가를 매수했다고 발언을 해서 유엔 주재 바레인 대사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훗날 나는 리루웨 대사를 국제회의에서 만났다. 그때 그는 KAL 858편 폭파사건 당시의 연설은 자기가 외교관을 하면서 한 연설 중 가장 짧은 연설이었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 이어진 말들을 종합하면 북한을 변론한다는 일이 낯간지러웠다는 말이었다. 맹방인 중국조차도 북한의 KAL 858편 폭파사건의 조작 주장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일부에서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서 金賢姬를 선거 前날 압송해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우리가 바레인에서 金賢姬를 제주도 또는 싱가포르에 미리 데려다 놓았다가 선거 직전에 데려왔다고 의혹을 제기하는 보도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웃기는 소리다. 바레인 외무장관은 金賢姬의 인도를 약속했다. 그때가 12월12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북한이 작은 나라인 바레인을 협박했고, 바레인은 잠시 주춤했다. 나도 바레인 정부에 「金賢姬를 안 내주면 북한이 범인을 탈취하러 올 수도 있다. 당신들은 金賢姬라는 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하루빨리 인도를 하라. 우리는 14일에 범인을 인수하든 안 하든 이곳을 떠날 것이다」고 최후 통첩을 했다. 그렇게 해서 金賢姬를 인수하게 된 것은 12월14일이었고 金賢姬가 한국에 도착하게 된 것은 다음 날인 15일 오후였다. 대통령 선거에 맞춘 것이 아니라 상황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朴 前 대사는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측의 『金賢姬에게 자살방지용 입마개를 씌운 것은 김포공항에 내리기 직전이었다(조작이었으므로 굳이 힘들게 바레인에서부터 입마개를 씌울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이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러니까 웃긴다는 거다. 그것은 내 눈으로 직접 본 일이다. 내가 비행기에 오르니까 金賢姬의 입에 마개가 씌워져 있었다. 그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나는 동행한 안기부 수사관에게 입마개를 벗겨 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안기부 직원은 「간첩들은 혀를 깨물어서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정의의 칼끝」은 어디를 겨냥해야 하는가 사건 당시의 안기부 수사관과 국정원 관계자, 정부 특사로 바레인에 갔던 朴 前 대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건의 진실은 명약관화해 보인다. 의혹의 대부분은 사건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면 의문이 풀리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단 등의 조작 의혹 주장은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사제단은 출범 초기인 1974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을 맞아 시국성명서를 냈다. 성명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국민 각자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이미 국민의 정부가 아니다. 국민 다수의 정당한 주장을 총칼과 권력으로 폭압하는 정부는 이미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다.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부는 이미 국민에 의한 정부가 아니다> 한반도에는 「국민의 정부」와 「국민을 폭압하는」 집단이 이끄는 체제가 공존해 있다. 1970년대 초 모임이 만들어질 당시의 순수한 열정이 지금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면 사제단이 겨눠야 할 「정의의 칼끝」은 「총칼과 권력으로 폭압하는 집단」을 향해야 하지 않을까. 한반도에서 KAL 858편 폭파사건의 의혹을 반기는 체제는 단 하나고, 그 체제야말로 「국민 각자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다.● ========================================================= 미군철수 주장 신부들은 사제복을 벗어야 '좌파 성직자’로서의 길을 걸어온 그분들의 본업이 사제인지 사회운동가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김태우(펌) 미군철수 주장하고 데모나 하는 신부들은 사제복을 벗어야 한다 천주교회 내부에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개혁파’ 성직자들이 많은데, 그 핵심에는「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끌고 있는 문규현 신부, 그 형인 문정현 신부 등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주한미군에 대해서 강한 적대감을 표출해왔고, 주한미군 기지의 오산-평택 이전 계획에 대해서도 ‘미국의 일방주의와 허울뿐인 한미동맹을 위한 것’으로 폄하하고 반대운동을 주도해왔습니다. 물론 이분들의 활동은 주한미군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문규현 신부는 2003년 부안군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주도했고, 작년 11월 농민대회 도중 농민사망 사고에 대해서도 시위대의 폭력성을 접어둔 채 경찰의 폭력성만을 시비하면서 '경찰청장 퇴진'을 외쳤습니다. 문정현 신부 역시 원자력 발전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왔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데모에 앞장서다가 체포영장을 발부받기도 했습니다.다. 사실 그 동안 ‘개혁파’ NGO들은 반미, 반핵, 반기득권 운동들을 성스러운 좌파운동의 일환으로 간주해왔는데, 문규현 신부 등은 이들의 시각에 공감하면서 ‘좌파 성직자’로서의 길을 걸어온 셈입니다. 이쯤 되면 그분들의 본업이 사제인지 사회운동가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를 위해 많은 분들을 피땀을 흘렸고, 일반국민들이 조직화된 국가권력에 맞서 싸울 여력을 가지지 못했을 때 성직자들이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권력과의 투쟁에 나섰던 일은 자랑스러운 찬주교 역사입니다. 그러나 ‘민주화’ 인사들이 집권하여 정부와 국회 그리고 방송국들까지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도 천주교 성직자들이 특정한 이념성을 지향하는 극렬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입니까? 사제복은 신자들의 영성생활을 인도하라고 하느님이 내리신 것입니다. 데모할때 입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제복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스러운 물건입니다. 한국의 신자들 중에는 사제를 하느님과 동격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문화적 낙후성으로 인하여 일부 사제들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신자들을 하느님께 순명하지 않는 사람들로 낙인찍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제들의 책임은 더욱 막중하지 않을까요? 해당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사제들이 모든 민감한 분야에 뛰어들어 콩나라 팥나라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비전문가적 견해가 천주교회를 지배하고 그것이 한국의 여론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NGO들의 논리는 ‘북한 도발능력 부재,’ ‘미군의 부정적 역할,’ ‘미군의 부당한 특권’ 등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먼저 '도발능력 부재' 주장을 살펴보십시다. 이 주장을 위해 연료 부족으로 북한의 탱크나 비행기들이 훈련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나 국방비가 남한의 십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주 거론합니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안보의 기본을 무시하는 발상입니다. 북한은 대병력주의를 고수하여 120만의 정규군 이외 노동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 교도대, 인민경비대 등 650만 명의 예비병력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북한 군사력은 여전히 기습공격 체제로 짜여있습니다. 더욱이, 북한은 한국이 가질 수 없는 대량살상무기(핵, 화생무기, 미사일)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저도 북한의 전쟁도발 가능성이 5%다 3% 라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험할 수 있는 징후와 가능성이 있는 한 모든 가능성을 막도록 노력하는 것이 안보의 기본입니다. 국방비 문제도 그렇습니다. 제대로된 국방전문가들은 북한과 중국의 국방비를 발표된 액수대로 믿지 않습니다. 설사 믿는다 해도 물가수준과 경제체제가 다른 북한의 20억 달러는 남한의 20억 달러와는 다릅니다. 비행장을 건설하려면 남한은 막대한 토지보상비에다 인건비를 써야 하지만 북한은 국유지에다가 군병력을 투입하면 됩니다. 사실 이런 설명도 지긋지긋합니다. 강정구 교수 같은 분은 설명을 들을 때에는 알겠다고 해놓고는 돌아서서는 "북한 국방비는 남한의 십분지 일밖에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전문지식이 없는 시민이 들으면 그렇구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제가 이런 식으로 주장을 늘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면서 살아야 할 사제가 선동가와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미군의 역할을 무조건 부정적인 것으로 단정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국전쟁때 미군의 개입으로 남한의 민주주의가 유지되었고 이후에도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음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미군 때문에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라고 주장할 참이면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밝혀야 앞뒤가 맞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면서 미국이 통일을 방해했다고 주장하면 정말 골치아픈 일입니다.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동북아에 들어설 국제질서가 어떤 것인가에 따라 주한미군의 역할은 부정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이 군사력을 키위 주위나라들을 지배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미군을 통해 주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군의 역할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예의주시해야 하지만, 무조건 "미군이 없는 것기 좋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한 오기부림입니다. 미군의 부당한 특권 문제도 그렇습니다. 미국은 오만한 초강대국이며, 해외개입을 통해 많은 문제점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전쟁 중에는 노근리 민간인 살상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을 저질렀으며, 이후에도 매향리 사건, 한강 독극물 방류 사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성 등 약소국 국민을 분노케한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보혁 구분없이 온 국민이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이는 지엽적 문제입니다. 철군은 본질적 문제에 근거하여 결정되어야 합니다. 주한미군이 한반도 전쟁억제에 도움이 되는가, 주한미군은 통일에 도움이 되는가, 미군이 나가면 한국은 얼마의 국방비를 더 부담해야 하는가 등 실질적인 문제들을 놓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한국인으로서의 감정과 약소국 시민으로서의 분노를 고스란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대사는 감정이 아닌 이성을 가지고 결정해야 합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들도 이만한 이치는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미군철수에 반대한다고 해서 ‘친미․반통일․반민족’으로 매도해서 안된다는 점도 이해를 하실 것입니다. 저만 해도 미국의 특정정책들에 대해 무수히 많은 비판을 가해온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아직은 주한미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문규현ㆍ문정현 신부도 이런 정도의 판단력을 가지고 계신다면 철없이 날뛰는 반미친북 세력의 틈에 끼어 함께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일은 삼가하시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과거에는 수구적인 집권세력이 순수한 진보인사들을 ‘친공’으로 매도한 적이 많았지만, 지금은 정반대로 철없는 사람들이 순수한 보수성향의 국민까지도 마구잡이로 '반통일' '친미수구' 등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 판에 사제복을 입은 분들까지 가세해야 옳습니까? 정의구현사제단은 이제 이념활동을 중단하고 교회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사제들이라고 해서 만물박사가 아닙니다. 전문지식도 없으면서 함부로 좌파논리를 설파하시는 것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북한이 만들고 있는 핵무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연구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북한을 돕자고 주장하는 것은 경박한 일입니다. 북한이 세계 3위의 화학무기 대국이자 세계 6위권의 미사일 강국이라는 사실을 고민해본 적도 없으면서 안보의 허점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는 전문가들을 ‘친미 사대주의자’로 매도하는 대열에 가담해서도 안 됩니다. 북한이 동족이자 통일의 동반자라는 점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화는 대화대로 추진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력생산의 40%가 원자력에서 나온다는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원자력 발전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무책임한 일입니다. 문정현 신부님은 그런 주장을 하시려면 스스로 냉장고도 컴퓨터도 전기밥솥도 마다하시면서 촛불에 성경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모범을 보이십시오. 사제복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모든 것에 대해 모든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특히, 주한미군 철수 등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범인들도 신중해야 하는 사안에 사제들이 함부로 비전문가적 논리와 주장을 늘어놓는다면 옳은 일이 아닙니다. 정영 그렇게 하시고 싶다면 차라리 사제복을 벗고 사회운동가로 나서는 것이 좋습니다. 한국국방연구원 김태우 박사가 올렸습니다. (삼성동 성당, 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