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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정치 2007.3.28(수) 03:01 편집
[창간 87주년]힐 “北 핵신고 HEU 반드시 포함돼야”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26일 워싱턴 조지타운대에서 열린 한반도 문제 토론회에서 6자회담 진척 사항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26일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대 콘퍼런스센터에서 열린 국제콘퍼런스는 북-미 관계를 중심으로북핵 문제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 양국의 전문가들과 미 행정부 당국자가 한자리에 모여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눈 자리였다.특히 지난주 베이징(北京) 회담에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 자금 2500만 달러 반환 문제로 북한이 회담을 사실상 보이콧한 이래 처음으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공개석상에 나와 미 행정부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동아일보는 이제 곧 87번째 생일을 맞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신문 중 하나”라는 인사말로 오찬 연설을 시작한 힐 차관보는 시종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협상 의지를 천명하면서도 “미국은 단순한 핵 동결이 아니라 북한이 이미 생산한 핵무기와 핵물질의 폐기를 분명한 목표로 하고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힐 차관보 오찬 연설 요지=북한이 결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왜 그런 전망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상황의) 논리적 전개를 믿으며 북한의 비핵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의 목표는 명백히 북한의 핵무기 폐기, 한반도 비핵화다. 우리는 계속 진전을 이룰 것이다. BDA 문제는 며칠 내에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이 북한에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는 다음 단계의 중간쯤에서 이뤄질 것이다. 신고 내용에는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위한 상당량의 장비 구입에 대한 설명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가지고 있는 핵물질에 대해서도 매우 분명하고 상세한 신고가 이뤄져야 한다. 전문가에 따라 40∼60kg으로 다르게 추정되는 무기급 플루토늄에 대한 확인도 필요하다. 핵시설의 ‘완전한 불능화’는 그 다음 단계다. 불능화는 여러 방식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핵시설의 재가동을 매우 어렵고 비싸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베이징에서 비디오게임 같은 상황을 보고 있다. 단계가 거듭될수록 이전 단계보다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별들의 논쟁’=힐 차관보의 연설에 이어 진행된 콘퍼러스 참석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는 1994년 제네바합의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전 국무부 차관보) 조지타운대 외교대학원장,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 교수, 대북특사였던 잭 프리처드 한국경제연구소(KEI) 소장 등 거물급 전문가들과 힐 차관보 간에 토론이 전개됐다.
갈루치 학장은 현재 진행되는 프로세스가 북한의 근본적 변화를 어느 정도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다.
이에 힐 차관보는 “미국은 핵무장을 한 북한과는 어떤 종류의 관계도 맺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목표가 완전한 비핵화임을 분명히 하고 “(핵보유국이면서도 미국과 핵 협정을 맺은) 인도의 사례가 핵을 가진 북한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오버도퍼 교수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미국에 와서 ‘지름길(shortcut)’을 거론했다고 들었다”며 고위급(양국 정상 및 외교장관을 의미) 회담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힐 차관보는 “북한은 지름길에 관심이 있지만 그들은 BDA은행 자금 문제로 2주를 낭비했고 방대한 규모의 우리 대표단은 계속 기다려야 했다”며 “고위급 회담에 대해 미국으로선 절박하게 느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물론 북핵 해결 과정은 아주 긴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에 고위급의 만남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고위급이 직접 포함됨으로써 핵 문제뿐만 아니라 전체 한반도 이슈도 다룰 수 있으며 문제 해결에 필요한 탄력(momentum)이 늘어날 것”이라고 부연했다.
힐 차관보는 이어 취재진과의 일문일답에서 “지난주 베이징에서 북한 대표단의 태도가 이해되는가”라는 질문에 “물론 그들은 잘못했다. 우리는 북한을 돕고자 했고 우리로서도 일부 힘든 결정을 한 것”이라고 속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또 북한이 인도적·교육적 사업에 사용하겠다고 밝힌 BDA은행 자금 2500만 달러의 투명성 문제에 대해 “다양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대처하겠다”고 말했으며, 자금 전액 반환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핵실험 직후 통과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는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힐 차관보는 이어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만약 북한이 합의에 따른 절차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다른 길을 택할 것이며 그때 미국은 혼자가 아닐 것”이라고 경고했다.
●北 버티기 견제? 美 강경파 무마?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26일 본보가 후원한 워싱턴 국제 학술회의 오찬연설에서 북한의 열악한 인권 개선을 완전한 관계정상화 즉, 외교관계 수립의 전제조건으로 삼은 것은 그동안의 협상전략에 비춰볼 때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2·13합의 이후 워싱턴 외교가에서 북한과 미국이 ‘눈 맞은 남녀’로 묘사될 정도로 관계가 급진전된 상황에서 북한의 아킬레스건인 인권 문제를 그것도 협상 최고책임자가 직접 거론했기 때문이다. 또 ‘북한이 부응하지 못한 국제적 기준’이란 말 자체가 인권 이외에도 위조지폐 제작, 가짜 약품 밀수 등 다양한 사안을 포괄하는 의미라면 ‘북한정권의 체질’이 달라져야 한다는 신호로 확대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국무부는 의회가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킨 직후인 2005년 초부터 ‘선 대북협상, 후 인권압박’이란 원칙을 세워 놓고 가급적 공개 발언을 자제해 왔다. 북한 인권특사도 조용히 임명됐고, 인권법에 따른 연 2400만 달러의 예산도 정식 배정을 미뤄 온 것은 이런 ‘낮은 포복’ 정책의 사례였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힐 차관보의 발언을 북한의 애먹이기 협상책에 대한 견제용이자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 다독이기라는 다목적 포석으로 보고 있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이날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지난주 베이징에서 보여 준 행태를 더 방치했다가는 앞으로 두고두고 끌려만 다닐 것이란 경계심이 작용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부상은 “불법 행위 연루 자금이 포함된 2500만 달러를 돌려준다”는 약속을 받아 놓고도 “전액이 북한 계좌로 입금된 것을 확인하기 전에, 그것도 뉴욕 증시에 상장된 중국은행(BOC)을 거쳐서 입금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다”며 숙소를 떠나지도 않았다.
힐 차관보의 발언은 대북 강경파의 ‘내부 반대’를 사전 차단하려는 포석일 수도 있다. 2500만 달러의 전액 반환을 놓고 원칙 훼손이란 내부 지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짚을 건 짚겠다’는 메시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관심은 북한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모아진다.
한승주 전 외무장관은 이날 회의에서 “북한은 현재의 북-미 간 밀월 기류를 가급적 훼손하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북한이 오늘의 발언을 회담의 장애로 물고 늘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87번째 생일 동아일보처럼 나도 생일 다가가는 느낌”
●학술회의 말말말
―“동아일보가 87번째 생일을 곧 맞는다. 나도 이런저런 다양한 이유로 87번째 생일에 다가가는 느낌이다.”(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 2·13합의를 이끌어 냈지만 지난주 북한이 동결 자금 송금지연을 문제 삼으며 6자회담 복귀를 거부한 것을 암시하며)
―“2002년 한국에서 대규모 반미 촛불시위가 열린 이후 한미 동맹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미 동맹의 균열상은 작가 마크 트웨인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두고 ‘들리는 것처럼 나쁘지는 않다’고 (농담)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고문)
―“정보기관 분석원 2명이 있다. A가 ‘저기 오는 저 빨간 차 참 멋지지?’라고 말했다. 제대로 된 분석가라면 B는 ‘그렇지 빨간 차. 적어도 우리가 보이는 쪽에서만큼은 빨간 차가 맞지’라고 말해야 한다.”(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국제대학원장,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보를 다룬다면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2·13합의 결과를 분석한 글을 시사주간지 타임에 기고했더니 ‘안 한 것보다는 낫다(Better than nothing)’라는 제목이 붙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의 사람은 이번 내 글의 제목으로 ‘최악(Worse than nothing)’이 더 적절하지 않느냐고 하더라.”(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