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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당시 북한 특수부대 600명 투입"
前북한군 출신 모임 '자유북한 군인연합' 증언
80년 5.18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탈북군인의 모임인 자유북한군인연합(대표 임천용)은 20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중구 정동 세실 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80년 5월 18일 당시 광주에 북한의 최정예 특수부대원들이 1개 대대 이상 투입되었다"고 증언했다.
▲5.18 당시 북한 특수부대가 투입된 정황을 증언하기 위해 모인 참석자들. 왼쪽부터 오복섭 애국청년연합 대표, 최중현 자유북한군인연합 공동대표, 임천용 공동대표, 요덕 스토리 안무가로 유명한 김용순 씨, 사회안전성 소속 특수부대 군관 출신 탈북자. ⓒkonas.net
이날 증언을 위해 참석한 탈북자들은 "5.18 희생자들과 그 가족께 먼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들은 "5.18이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된 시위였을지 몰라도 여기에 북한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개입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며 "오늘 증언이 어떤 정치적 의도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증언은 1980년 당시 북한에서 부대 동료나 친지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들이 중심이었다. 참석한 사람은 인민군 협주단 배우출신인 김영순씨, 북한사회안전부 소속 특수부대 군관 출신 탈북자, 특수부대 정치군관 출신으로 자유북한군인연합 공동대표인 최중현씨였다. 증언에 나선 사람들은 이날의 발표 내용에 대해 '철저히 북한군 내부에서 나온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며 빼면 뺏지 더하지는 않았다. 부연 설명을 위해 5.18당시 진압군 고위층이었던 사람의 증언도 포함됐다'고 밝혔다.
이들이 증언한 내용은 이랬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측근들에게 '연방제 통일은 평화적으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남조선 혁명은 폭력적 방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늘 강조했다고 한다. 이말은 남한 내에서 친북세력들을 동원해 미군기지를 습격하는 등의 폭력시위를 일으키거나 4.19, 5.18과 같은 사회적 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를 더욱 확산시켜 남한 사회 전체를 불안하게 만든 후 북한이 '민주애국투사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남침한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미 북한에서는 '남조선의 광주 5.18당시 북조선의 최정예 경보부대(특수부대)가 침투했다'는 것을 현역으로 군복무를 한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특수부대 정치장교였던 최중현 대표가 김일성의 비밀 교시와 인민군 4군단 70정찰대대 출신인 이덕선씨로부터 자세한 정황을 들었다고 했다. 최중현 대표에 따르면 김일성은 5.18의 도화선 중 하나였던 사북탄광 사태 당시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렸다고 한다.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났습니다…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빈민 등 각계 각층의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없이 총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주요 공공시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최 대표는 "5.18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상급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못 벗고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는 광주사태의 긴급 속보를 전해 들으면서 20여 일 이상을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당시 부대 상황을 전했다. 그는 그 후 7군단 10사단장이었던 여병남과 참모장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투입됐는데 희생이 컸지만 공로도 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또 최 대표는 4군단 70정찰대대 출신 이덕선씨에게 당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정찰대대들이 광주에 투입된 정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들었다고 한다. 이덕선씨에 따르면 광주에 투입된 인원은 모두 600명. 선봉 부대는 2군단 정찰대대 300여 명이었다. 나머지 300여 명은 인민국 각 군단, 저격여단 등에서 차출한 정예병력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대동강 하류에 있는 남포시 인근에서 고깃배로 위장한 대형 공작선에 300명을 태우고 출발, 공해상을 거쳐 북한에서는 백암이라고 알려진 서해 상으로 침투했다. 나머지 300명은 북한 신포지역의 마양도에서 출발해 잠수함을 타고 전남 지역으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정찰국 5부장이 공해상에서 대기 중인 배에 타고 현장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덕선씨에 따르면 남파 공작원이나 전투원 아니면 거의 받을 수 없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1980년 한 해에만 75정찰대대 41명, 타 특수부대 21명 등 모두 62명이나 받았다고 한다. 최중현 대표는 "한 해 동안 62명의 전투영웅이 탄생했다는 것은 대남침투와 관련, 대규모 작전이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사회안전부 소속 특수부대에서 수송장교였던 탈북자도 1980년 5월 당시 '머구리 작전'이라는 비밀 임무를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 8명에서 12명 정도의 사람들이 M-1소총을 들고 남조선 군복을 입고 대동강 하류로 빠져 나가는 것을 봤다"며 북한군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M-1 소총과 남조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김용순 씨는 1970년 성혜림의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라는 이유 만으로 '국가기밀을 누설한다'며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9년 동안 수감됐었다고 한다. ⓒkonas.net
요덕 스토리의 안무가로도 유명한 김용순 씨는 요덕 수용소 생활 후 '장진광산'이라는 곳에 있으면서 특수부대 군관 출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때 군관 출신들은 "광주 사건 당시 500~700명 정도 투입되었다. 투입인원은 다 환각제를 먹고 닥치는대로 죽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임천용 대표가 소개한 5.18당시 북한 수뇌부의 발언에서도 북한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엿보였다. 1983년판 '광주평록'이라는 문서에서 김일성이 "우리는 광주 사건에서 많이 얻었지만 놓쳤고, 놓쳤지만 내일을 위해 남겼다"고 말하는가 하면 자신의 측근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광주가 제일 아깝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5.18 당시 군부의 실세로 진압을 지휘했던 사람은 임 대표와 인터뷰를 하면서 "결국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장갑차를 다루는 수법, 조직적인 총기탈취와 방송국 등 국가주요기관을 능숙하게 파괴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특수전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도 풀지못한 수수께끼"라며 당시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광주에 투입됐다 복귀해 현재 인민군 중장으로 근무하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봉기군의 3분의 1은 돌아오지 못했다. 각각 괴뢰군(진압군을 의미)과 봉기군으로 나뉘어 투입되었는데 괴뢰군에게 직접 맞아죽은 사람도 꽤 있을 거다. 괴뢰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임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처음으로 산 사람을 잡아봤다. 맨 정신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게 그렇게 어렵다는 걸 처음 알았다"며 "도망가는 여자 등 뒤에다 총을 쏘는 게 어려웠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올해 9월 또 다른 북한 특수부대 출신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와는 다르게 봉기 분위기를 조성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한 대남사업부 관계자에 따르면 5.18 당시 투입된 북한군 특수부대는 모두 600명, 이중 1차로 300명이 귀환했고 2차로 생존자 70명이 사망한 40명의 유품을 가지고 복귀했다고 한다.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사람은 모두 90명. 이때 환송회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사진은 평양 대성구역 지하 2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임 대표와 최 대표는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90명이 아직 남한 내에 살아 활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천용 대표가 한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 속에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머리에 띠를 두른 군인들이 카빈 소총을 든채 시민들에게 벌을 주고 있다. ⓒkonas.net
임 대표는 당시의 사진중 하나를 가리키며 "여기 사진을 보면 얼룩무늬 군복에 M-16을 들고 민간인들을 꿇어않혔다. 뭔가 이상하지 않냐"고 취재진들에게 물었다. 그는 당시 시신 사진 중 한 임산부의 목이 없는 사진, 전기톱으로 머리를 도려낸 사진 등을 보여주며 "진압군이 이렇게 했다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증언과 설명이 끝난 후 ▲5.18 광주항쟁 사망자 중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자들의 신원을 확인할 것 ▲김대중은 호남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햇볕정책을 중단할 것 ▲일심회 사건을 비롯 최근의 공안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 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날 기자회견을 참관한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은 당시 육군본부 인사과에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 본부장은 "그때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린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에서는 호남 출신 장교들로 진압군을 구성해 투입했었다"며 "그 당시 상황에서 사상범이 수감돼있는 교도소를 습격하고 관공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는 걸 순수한 의도를 가진 시민혁명이라고 볼 수 있겠나"고 말했다.
그는 또 "시민혁명이라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볼 때 불순세력이 이용했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건 4.19나 부마항쟁과는 개념이 다르다"며 "결국 순수한 마음으로 시민혁명을 위해 애쓰던 사람들만 이용당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Konas)
전경웅 코나스 객원기자
written by. 전경웅
2006.12.20 19:24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