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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이산상봉 중단]대화 매달리던 정부, 또 뒤통수 맞아
북한이 13일 남북장관급회담을 결렬시키면서 예고했던 ‘북남관계에서 예측할 수 없는 파국적 후과’가 19일 북측의 이산가족 상봉 중단 선언으로 현실화됐다.
장관급회담의 결렬로 이미 당국 간 대화 채널이 막힌 데 이어 남북적십자사가 창구를 맡고 있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도 무기한 연기되면서 남북 간 대화 채널도 상당 기간 막힐 공산이 커졌다.
정부가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문 채택 과정에서 미국 일본과 갈등하면서 한미 동맹과 한일 공조가 휘청거린 가운데 중국도 대북 제재 결의문 채택에 찬성한 상황에서 북한마저 남측에 강수(强手)를 던짐으로써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총체적 위기’에 몰리게 됐다.
▽북한의 노림수=이산가족 상봉에 차질을 빚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00년 12월 예정됐던 3차 상봉 때 북측은 내부 사정을 이유로 연기를 요청했다. 2001년 10월 열릴 예정이던 4차 상봉은 북한이 9·11테러 이후 남측의 경계 태세 강화를 이유로 일방적으로 연기를 통보한 뒤 6개월이 지난 2002년 4월 28일 열렸다. 하지만 북한이 ‘연기’가 아닌 ‘중단’을 선언한 것은 처음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이산가족 상봉 중단에 대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전형적인 북한식 대응”이라며 “11∼13일 부산에서 열렸던 제19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쌀 50만 t과 비료 10만 t 등 인도적 대북 지원을 유보하겠다고 통보한 데 따른 보복성 조치 같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이날 이산가족 상봉 중단 카드를 꺼낸 데 대해 미사일이나 핵 등 대량살상무기(WMD) 관련 행동은 유엔 결의문 채택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국제사회의 신경을 거스를 수 있는 만큼 상대적으로 ‘만만한’ 남측을 압박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남측을 움직여 국제사회에서 미사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대북 압박이 고조되고 있는 상태에서 국제사회에서의 완전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도 있다”고 풀이했다.
▽진퇴양난 정부=통일부는 북측의 이산가족 상봉 중단 선언에 대해 즉각 유감을 표명한 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중단의 직접적인 이유로 들고 나온 것이 우리 정부의 쌀, 비료 제공 유보에 있다는 점에서 자칫 이산가족 등의 비난의 화살이 정부로 쏠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북한 미사일 문제의 출구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없다’는 방침을 천명한 정부로서는 당분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빠졌다.
이산가족 상봉 재개를 위해서는 쌀과 비료의 지원을 북측에 약속해야 하는데 이는 정부 스스로 식언(食言)하는 셈이고, 북한에 끌려 다닌다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이 계속 지연될 경우 대부분이 고령자인 이산가족의 아픔을 외면한다는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정부는 ‘북한과 대화의 동력을 이어 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을 대화로 이끌 카드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상시적으로 쌀과 비료를 지원하는 정책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내에서도 “매년 지원하다 보니 북한이 쌀 비료 지원을 당연히 받을 채권으로 생각하게 됐다. 쌀 비료 지원은 대북 카드로서의 가치를 잃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6년 넘게 딸 만날 날만 손꼽았는데…
북한이 19일 남측의 쌀 비료 지원 중단을 이유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통보해 대한적십자사 등 관련 단체와 이산가족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 중구 남산동 대한적십자사에서 직원들이 이산가족들의 문의 전화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자리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하루가 아쉬운데….”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중단을 선언한 19일 경기 용인시 김금수(107) 할머니의 집은 슬픔에 잠겼다.
김 할머니는 8월 15일로 예정된 특별 화상상봉 후보자 가운데 최고령자. 100세를 훌쩍 넘긴 김 할머니는 혼자 힘으로는 몸을 일으키기조차 힘들지만 정신만큼은 놓지 않고 있다.
1945년 공장기술자인 남편을 따라 북으로 건너간 뒤 50년 넘게 소식이 끊긴 딸을 만나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고집 때문.
2000년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뒤 6년 넘게 상봉 날짜만 손꼽아 기다려온 김 할머니에게 가족들은 아직 이산가족 상봉 중단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김 할머니의 딸 박분이(73) 씨는 “북에 살고 있는 언니 소식이라도 듣는 게 소원이셨는데 상봉이 미뤄졌다는 말을 어떻게 전할 수 있겠느냐”라며 “살아계신 동안 다시 기회가 올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19일 김기황(99) 할아버지를 장지에 모시고 돌아온 아들 김동현(43) 씨도 이산가족 상봉 중단 소식에 눈물을 삼켰다. 개성 등에서 역장을 지냈던 김 할아버지는 1·4후퇴 때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남으로 내려왔다.
김 할아버지는 이번 화상상봉에 후보자로 선정됐으나 한 달 전 길에서 넘어져 골절이 생긴 뒤 합병증으로 17일 눈을 감았다.
김 씨는 “자식들이라도 북에 있는 가족을 찾아뵙고 생전 아버지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전하려 했는데 이산가족 상봉이 어렵게 됐다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대한적십자사는 이번 특별 상봉을 위해 후보자 300명 명단을 북측과 교환했으며 이달 말에는 최종 상봉 대상자 120명을 선정할 예정이었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5월 31일 현재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2만5627명 가운데 사망자는 모두 2만8994명. 전체 신청자 가운데 80세 이상의 고령자가 27.4%에 이른다.
지난해 8월 착공한 이후 현재 23%의 공정을 보이고 있는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건설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면회소는 당초 내년 7월 완공될 예정이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설득통해 미사일 해결” 안보장관회의 ‘무색’
정부는 19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안보관계 장관회의를 열어 북한 미사일 발사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對北) 결의문 채택 이후 정부 차원의 후속 대책을 논의했다.
송민순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회의 결과 브리핑에서 “현재 상황은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위기를 조성하거나 대결 국면을 조장해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는 피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기본 방침이라는 설명이다.
대북 정책 현안에 대한 정부의 대응 기조에서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송 실장은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추진 중인 대량살상무기(WMD) 확산방지구상(PSI)에 대해 “지금 우리가 취하고 있는 조치 이상의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PSI를 강화해 북한을 압박하려는 미국 내 일각의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것.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도 이날 내외신 정례 브리핑에서 “정부는 이미 WMD 비확산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며 PSI 강화 움직임에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정부는 평양에서 열릴 8·15행사와 관련해 ‘민관(民官)분리’ 원칙을 세우고 민간의 참가 여부는 민간의 판단에 맡기되 정부 참관단은 국민 여론을 감안해 파견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날 대화와 외교를 통한 대북 설득을 기조로 정했지만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 거부’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다. 이에 따라 정부가 대북 규제 강화에 나서는 미국 일본과 이에 맞서는 북한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