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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이인호(서울대서양사학과명예] 대한민국 건국은 혁명이었다
등록일 2022-11-15 조회수 3580

거시사적 비교를 통한 건국의 재인식을 위하여

 

1. 문제의 제기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은 역사의 획기적 전환점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을 찾는다면, 1910년에 일본에게 국권(國權)을 빼앗겼던 일 말고 다른 더 큰 일을 생각할 수 있을까? 역사가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 다음의 전환점으로는 1945년 8월 15일의 해방(解放)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연합군에 대한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풀려나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면서, 우리의 환희와 기대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곧 광복(光復)이 아님이 곧 드러났다. 해방은 독립된 민족국가의 회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38선을 경계로 하는 민족과 국토의 분단, 또한 이념이나 국제적 유대를 달리하는 두 개의 대치적(對峙的) 정치체제의 수립, 그리고 국제전으로 확대된 동족상잔의 6.25 전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의 의미는 많이 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까지 같은 민족이고 같은 나라였던 남과 북, 그리고 비슷한 자연적, 국제환경적 여건에 놓여있던 남과 북이, 오늘날 삶의 질(質)로 볼 때,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 나는 두 나라로 변화(變化)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같은 남,북 양쪽간의 엄청난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1948년 8월 15일 이후 더욱 분명해진 이념과 정치체제의 차이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1948년 8·15에 선포된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가 그 국민이고 아니고를 떠나서도,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가? 

그러나 여기서부터 우리 학계와 정계 내의 의견은 팽팽히 대립(對立)한다.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과 정부 수립 선포를 우리 민족이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을 탄생시킨 사건으로 크게 기릴 것인가, 아니면 분단을 고착시킨 사건으로 부정적 평가를 내릴 것인가 하는, 두 개의 상반(相反)된 정치적 입장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나라의 건국일(建國日)이 언제인가에 대해 합의조차 못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을 보고 외국의 학자들은 놀랄 뿐이다.

지난 60여년 간 해방 이후의 문제에 대해 미시사(微視史)적 관점에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거시사(巨視史)적 해석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는 좌,우의 열차처럼 합의가 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접점(接點)을 찾을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차이는 누구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가 하는 데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사실(史實)이 밝혀진다고 해서 해소될 차이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1910년의 한일 강제병합이 우리에게는 침략인 반면 일본에게는 진출이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의 차이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의 역사적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결정한 축복이지만, 소련이나 북한의 주도세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재앙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수정주의의 사실 왜곡 위험성

우리 역사학계에는 대한민국 국민(國民)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民族) 전체를 주역으로 놓고 역사를 보자는 이른바 ‘통일사학(統一史學)’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남,북의 반목(反目)하는 두 개의 정권이 60년 이상 실재(實在)해 왔다는 사실(事實) 보다는, 민족통일을 향한 염원(念願)에서 형성된 가상(假想)의 통일국가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결함이 있다. 

그것은 분단을 극복한다는 목적에 절대적 가치를 두다 보니, 과거의 진상을 알아내려는 학자적 동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현실화 시키려는 정치적 욕망이 앞서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역사학은 하나의 정치적 현상으로 볼 수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 의한 검증이나 엄정한 학술적 잣대에 의한 평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학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남한의 역사와 북한의 역사, 그리고 그 두 나라의 관계에 관한 역사를 모두 포함해야할 필요는 없다. 사실(史實)에 입각한 역사쓰기에 기초해서 남,북한의 현실(現實)을 조명하고, 그 차이의 원인을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 경우에 대한민국을 단순히 극복(克服)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요새는 역사가 과거의 재현(再現)이 아니라 선별적(選別的)인 재구성(再構成)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다. 던지는 질문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관심이 다를 수밖에 없는 각 세대는 서로 다른 역사쓰기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날 유럽식 계몽주의 전통에서 인간 이성(理性)에 대한 신뢰가 무한으로 치닫던 시대에 역사학을 지배했던 것은 유럽 중심, 그리고 정치(政治) 중심의 사고였다. 

그 때는 역사를  “일어났던 대로” 써야 한다는 레오폴드 폰 랑케의 실증사관(實證史觀)을 역사학자들이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 때는 역사는, “역사 없는” 인간의 무리(群), 즉 대중이 아닌, 소수의 영웅(英雄)이 이끌어 간다는 헤겔 유(類)의 역사관이 학계에서 통용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이후 정치적 민주화의 진척에 따라, 이러한 영웅 중심의, 승자(勝者) 중심의 역사 서술은 넓은 의미의 사회사(社會史)와 일상생활사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탈(脫) 유럽중심주의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역사가 뒤집히는 일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특히 1990년을 전후해 세계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고 러시아를 비롯한 공산권에서 역사교과서를 다시 쓰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현재의 역사는 과거의 정치다.”라는 말보다는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정치다.”라는 말이 더 설득력을 가지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역사인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실(史實)을 무시하거나 학계에서 축적되어온 지식과 체험의 총체와 방법론적 지혜를 모두 버려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개별 사실들의 확인만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普遍的)으로 준수해야 할 가치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省察)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나라 지식인 세계에는 ‘재구성(再構成)되는 역사’의 힘을 통해 앞으로 ‘만들어질 역사’를 지배해 보겠다는 욕망이 강하다. 그 때문에 역사 기술(記述)에서 과거의 사실을 조작하거나 인간행태에 관한 보편적 이해를 무시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에 따라 사료적 가치로서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데 대한 검증(檢證)이나 사안의 경중(輕重)에 관한 균형감각을 갖지 못한 채, 사실을 자의적(恣意的)으로 선정하고 그 의미를 침소봉대하는 일이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은 학자적 자세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역사 바로잡기’ 라는 구실 아래 ‘역사 뒤집기’의 정치적 굿판을 벌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동기에서든 또는 다른 사적(私的) 동기에서든, 역사서술의 큰 틀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경우에 역사학은 인간적 진실을 포착한다는 본래의 임무에서 벗어나, 자기들이 “허구(虛構)”라고 무시 해왔던 문학의 일종으로  자리를 옮겨 앉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러한 역사 서술은 과거에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한다는 명목으로 학문의 자유까지 탄압했던 군사 정권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수정주의(修正主義)의 등장은 세계적인 추세였다. 또한 학문적으로는 어느 정도 환영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정주의는 그 동안 등한시되었던 영역이나 주제를 발굴함으로써 역사의 이해를 깊게 하고 나아가서 정치적 응어리를 풀어내는데 기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역사가가 던지는 질문이 달라지고 접근 가능한 사료들이 새로워졌다는 뜻이지, 사실(史實) 자체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수정주의는, 기존의 학문적 성과와 역사해석의 틀을 엄격한 학문적 검증 과정도 없이, 버리고 뒤집어 놓으려 함으로써 학문의 진정한 발전을 가로 막고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수정주의의 그러한 역사병폐를 말해 주는 단적인 예가 최근의 탈북(脫北) 현상에 대해 설득력있는 역사적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남쪽에서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自由)와 번영(繁榮)을 누리면서도 불만에 들끓고 있는 데, 북쪽에서는 절대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의 많은 한국사학 전공자들은 자기가 몸담고 있는 나라인 대한민국의 건국(建國) 과정에 관해 사회과학자들과 대화도 못하고, 서양사학자들과 의견도 조율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실이 이러하니, 이해관계의 충돌이 훨씬 더 심한 정치인들이 역사문제에 대해 합의점을 찾는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렵게 되는 것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1919년 건국설’

그 동안 우리 사회 일각에는 통일지상(統一至上) 주의를 내세워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그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출발해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한 움직임은 2008년에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정부 선포를 민주공화국의 탄생으로 크게 기념하려는 건국60주년기념 행사에 대한 반대로 표면화되었다. 

그것은 ‘1919년 건국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입장으로서, 광복회와 민주당?민노당과 같은 일부 야당 국회의원들, 그리고 단국대의 한시준 교수 등 일부 학계로 대표되는 주장이었다. 

그러한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건국(建國)은 1919년에 이루어졌고 1948년에는 단지 정부 수립만이 있었을 뿐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를 건국으로 보는 것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세력을 무시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친일(親日)적이고도 반민족(反民族)적인 책동이라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것은 “1910년에서 1947년까지 한반도에 주인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주인이 없는 영토에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 ‘1919년 건국설’을 옹호하는 어느 연구자의 주장이었다. 

그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명칭(名稱)과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적 실체(實體)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임시정부”와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의 차이를 무시하고, “나라 없는 백성”과 “국민”의 차이를 무시하는 현실성(現實性)이 없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것은 학문적 대응의 방법이  되지 못한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 현대사에서 1910년 이후 진정한 전환점(轉換點)이 있다면 그것은 1945년 해방에서 1948년 헌법제정과 정부수립 선포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건국(建國) 과정이었다. 

그것은 시민혁명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영국혁명,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에 비견될만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사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 역사상 유일한 혁명(革命)이요, 따라서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分岐點)이었다. 

따라서 그 이후의 사건들 가운데는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중요한 사건이 없었다. 그 이후의 모든 사건들과 변화는 건국혁명의 이상과 이념을 내실화(內實化) 하려는 노력과 투쟁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세계를 뒤흔들었던 외국의 혁명들의 전개과정과 우리의 현대사 전개 과정을 간략히 비교하면 드러난다.

 

 2. 혁명의 의미

혁명의 일반적 성격

세계사에서 혁명(革命)이라는 말은 자주 등장한다.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 러시아 혁명 등 우리 귀에 익숙한 것들이다. 그 밖에 유럽의 식민지들에서 일어난 독립혁명들이 있고, 중국의 혁명, 멕시코 혁명, 이란 혁명 등도 두드러진 사례로 꼽히는 것들이다. 

우리나라의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혁명”이라면 무조건 긍정적(肯定的)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그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큰 사건들에는 무조건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했다. 

그에 따라 “동학혁명”, “4. 19 혁명”, “5.16 혁명”, “광주 민주화 혁명”과 같이 수 많은 중요한 사건들에 혁명의 꼬리표가 붙었다. 그 중에서도 “4.19 혁명”은 이미 교과서적 어휘가 되었다. 

도대체 혁명이란 무엇인가? 1934년에 초판이 나온 후 고전이 된 브린튼(Crane Brinton)의 혁명 비교연구, [혁명의 해부] 덕분에, 혁명에 관한 연구는 맑스주의 뿐 아니라 비(非)맑스주의 계열 학자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이제는 4세대 연구자들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혁명에 대한 학술적 정의를 시도할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상식 선에서 혁명으로 이해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혁명은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짐을 뜻하며, 보다 나은 방향으로의 획기적 진전을 목적으로 한다. 예를 들면, 산업혁명은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변환이 가져온 괄목할만한 변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산업화 과정은, 일회성(一回性)의  변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持續的)으로 가속화된 변화를 낳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경제에 관해서는 혁명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게 되었다.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혁명은 권력주체와 권력구조의 급격한 교체(交替)를 핵심으로 한다. 그 경우에 혁명은 생산구조와 기존의 권력구조 간에 벌어지는 심각한 괴리에서 현실을 타파하려는 욕구가 분출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혁명을 통해 힘으로 분출되면서 새로운 권력 주체가 등장하게 된다. 구질서가 무너진 후 대체(代替)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치열한 투쟁이 전개된다. 그 경우에 대체로 혁명 발발 훨씬 전부터 혁명을 위한 준비를 해 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다.  

브린톤은 혁명을 질병에 비유해, 잠복해 있던 병세가 발발하고 나면 몸이 일단 악화되었다가 위기를 거친 후 안정을 되찾게 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사회전체의 체질이 강화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연구는 주로 17,18세기의 시민혁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혁명은 자연적(自然的)인 전개과정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의 후진국 혁명들에 초점을 맞춘 다른 연구자들의 경우에서는 혁명의 기획적(企劃的)인 측면이 크게 부각되었다. 즉, 경제발전의 경우에서처럼 정치혁명에서도 후진국들은 나중에 배우는 자가 갖는 일종의 “후진의 프리미엄”을 누리게 되고, 그 때문에 혁명은 계획(計劃)되고 의도적으로 준비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대중참여의 폭도 넓어져 경제발전 과정에서와 같은 일종의 “압축성장”이나 “비약”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인 데, 이러한 사실은 이미 레닌이나 트롯츠키에 의해 주목된 적이 있었다.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들

현실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혁명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긴 준비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자체 수정 능력이 없는 기존의 정치 체제하에서 경제를 움직이는 생산세력과 권력구조 사이의 간극이 커지면, 대체(代替) 이데올로기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긴 과정을 거처 이론으로 정립되고 대중화된다. 그리고 나서 의식화된 대중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폭력적 대치(對峙)가 일어나게 된다. 

전근대(前近代) 사회에서도 권력주체의 폭력적 교체는 빈번했고, 밑으로부터의 반란도 항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현상들에 모두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기득권 집단과 도전세력 간에 힘의 불균형으로 반란이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진압당했기 때문이다. 설사 권력주체의 인적 구성에 변화가 생긴다 해도, 지배구조의 성격에 현격한 변화가 없으면 혁명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혁명이란 말은 대체로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 특히 민주주의의 탄생과 관련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영국혁명은 혁명으로서는 예외였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시민의 기본 인권을 보장하는 ‘인신보호령’과 ‘권리장전’의 바탕 위에서 양당정치로 운영되는 의회가 주권체(主權體)로 확립된 과정이 피를 흘리지 않은 “명예혁명”으로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혁명 초기에는 찰스 1세의 처형 같은 유혈극이나 크롬웰의 청교도적 통치 같은 독재 현상이 일어나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된 것은 평등을 요구하는 일반 서민층의 봉기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1215년 이래 줄 곳 납세자의 참정권 보장을 요구해 온 토지귀족이 혁명의 주도권을 잡은 뒤 참정권을 점진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때문에 혁명에서 대중의 참여가 제한되어 대중폭력에 따르는 유혈사태가 최소화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17세기 영국의 정치적 변화과정을 혁명이라 부르기를 거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혁명”하면 우선 대중 봉기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영국의 정치적 변혁 과정을 보면, 밑으로부터의 참여나 대중폭력이 혁명의 목표달성에 필수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혁명은 급격한 권력교체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강한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혁명의 진척 과정에는 폭력(暴力)의 사용이 불가피하게 된다. 

그리고 혁명 수호세력도 혹독한 독재와 공포정치(恐怖政治)까지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크롬웰의 독재나 로베스피에르의 독재 없이 영국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을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혁명 이데올로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재(獨裁)를 공공연하게 내세우기까지 했고, 그 때문에 공산당 독재와 그의 압축판인 스탈린의 독재가 오래 계속되고, 결국은 개인숭배로까지 퇴화했던 것이다.

 

혁명을 성공하게 만드는 힘

혁명의 성격 규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혁명의 궁극적인 성과(成果)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성과를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힘의 원천(源泉)은 어디에 있었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영국 혁명,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이 성공(成功)한 혁명의 고전적 사례로 평가 받는 것은 혁명이 내세웠던 이상과 이념을 실현하는 혁명적 조치(措置)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기가 지난 후에도 혁명의 이상(理想)이 포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권리청원’과 ‘권리장전’, 미국의 ‘헌법’, 프랑스의 ‘인권선언’은, 수차례의 보완과 개정이 있었을망정, 오늘날 까지도 그 나라들의 헌법체제의 기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그 영향을 확대시켜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혁명 이데올로기가 표방하는 이상이 곧 바로 현실(現實)로 정착한 예는 없었다. 혁명의 이상이 구현되는 데는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인 투쟁과 거듭되는 후퇴와 전진을 거처야 했다. 

예를 들면,프랑스는 1789년에 봉건제도의 폐지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으로 역사에 큰 획을 긋고 3년 후 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그 후 공화정은 공안위원회와 로베스피에르의 테러정치 국면을 거치고 나서야 겨우 안정국면에 접어들었다.

또한, 프랑스 혁명의 기세는 국외로 까지 뻗어나갔으나, 국내에서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게 되는 역작용을 낳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는 나폴레옹을 패망시킨 연합군의 보호 아래 왕정이 복구되었다가, 1830년과 1848년 두 차례에 걸친 대중혁명, 그리고 짧은 기간의 제2공화국, 그리고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 체제를 경험하고 독일에게 패배 당하는 충격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민주공화국인 제3공화국의 기틀이  확실히 잡혀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의 이상이 제도적(制度的)으로 정착하는데 한 세기 가까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한 긴 과정에서 “프랑스 국민”의 실체(實體)와 ‘인권선언’에 담긴 대혁명의 이상(理想), 다시 말해 주권재민(主權在民) 사상,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생명권의 연장으로 본 재산권의 보호를 골간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는 정면으로 부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프랑스의 정치와 경제의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되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성공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혁명이 꼭 필요하다는 데 대한 의구심

그러나 세계를 뒤흔든 러시아 혁명의 결과는 달랐다.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신장시키는 촉진제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물론 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에서처럼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러시아 혁명의 경우는 아이러닉하게도 그 혁명의 본산지인 러시아와 그 영향아래 놓였던 동유럽의 옛 공산권에서 혁명 이데올로기 자체가 포기 당하는 수모를 겪게된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로 부터 힘을 받으며 그것을 헌신적으로 수호하는 사회세력의 동력(動力)이 중요했다. 

미국혁명의 경우에 그러한 사회세력(社會勢力)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던 청교도, 그리고 경제적 이권의 기반을 지키고 확대하려던 WASP(영국계 백인 개신교도)계의 자산층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에 그러한 사회세력은 능력을 통해  사회상승을 성취했던 신흥(新興)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봉건제도 폐지로 소농계급이 형성되면서 두터워진 소(小) 부르주아 계층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경우는 이와는 반대였다.  러시아에서는 전제체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만한 힘을 가진 중산층(中産層)도 형성되어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인권에 관한 의식(意識)조차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獨裁)를 표방하는 국가가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는 도시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주체로 부각되기는 했으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결국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산당 독재와 노동착취로 전락(轉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에 따라  혁명의 후계자들조차도 혁명의 이념적 타당성을 고집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결국 혁명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성공한 혁명으로 간주되는 프랑스 혁명의 경우에서도 러시아의 경우와 같은 측면이 보이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표된 연구들을 보면, 혁명의 불가피성이나 타당성에 대해 의구심(疑懼心)을 표명하는 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1789년의 대혁명과 같은 급격한 유혈(流血)의 변혁을 거치지 않고도 꼭 같은 방향으로, 어쩌면 더 평화적이고 실속있는 발전의 방향으로 나가지  않았을가 하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가상(假想)에 기초한 정치적 관심이나 입장의 표출이므로, 사회과학이나 역사학의 논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 지식인 사회의 일각에서는 “과연 대한민국 건국(建國)은 필요했는가, 그리고 타당성이 있었는가” 하는 의구심(疑懼心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구심은 프랑스 혁명의 불가피성에 대한 의구심 보다 훨씬 더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학술 논쟁을 위장(僞裝)한 정치공세로서,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개인이 자신이 태어난 것이 옳은 일이었는가 아니었는가를 묻는 일과도 같은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기정사실(旣定事實)로서의 대한민국의 건국이 어떠한 경로와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던가를 사실에 입각해 확실하게 밝히고, 그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짚어 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3. 대한민국 건국의 혁명적 성격

대한민국의 건국이 혁명인 이유

대한민국의 건국을 혁명(革命)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그 사건이 앞서 열거한 혁명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급격한 변화(變化)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우리 사회와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우리나라를 비교해 보면, 건국은 권력 주체와 권력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생산관계의 현격한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건국”은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에서 시작되어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선포로 일단락된 독립국가 수립의 전(全)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지는 혁명적 의미는 적어도 3중적인 것이다. 

첫 째는 우리가 일제와 미군정에서 벗어나 독립국(獨立國)으로 재탄생하여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주권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독립을 향한 온 겨레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왕조시대의 백성(百姓)이나 일제하의 차별 받는 식민지의 신민(臣民), 그리고 해방후 미군정 치하의 “패배한 적국(敵國)의 전(前) 식민지 신민”의 처지로부터 벗어나 나라의 주인인 국민(國民)으로 승격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 국민을 자유롭고 평등한 주인으로 인정하는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을 수립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는 그러한 공화국이 채택한 제도의 이상과 이념이 공산주의나 군국주의 식 집산주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개인(個人)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고 가치로 하고 재산권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였다는 사실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가 다 바로 그 직전 까지 있어 왔던 정치, 사회, 문화적 현실을 완전히 뛰어넘는 획기적(劃期的)인 변혁이었다. 그것은 그 이전으로의 회귀(回歸)가 불가능할 정도로 명확하게 그어진 구분선(區分線)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건국혁명(建國革命)도 다른 나라들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일의 준비과정을 거쳐서 이룩되었다. 

나라를 빼앗기는 순간부터 독립(獨立)은 우리 민족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갈구요 투쟁의 목표였다.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그와 직접 연관이 없던 평범한 사람들도 독립을 희구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졌다. 

그런 의미에서 건국혁명의 제일 조건이면서 동시의 힘의 원천이 된 것은 구체제(舊體制), 즉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거부였던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이상과 이념이 배태(胚胎)된 것도 우리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민본주의는 전통사회에서도 생소하지 않은 개념으로서, 동학 농민운동이나 의병운동에서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것은 구한말 ‘독립협회’의 활동이나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반포된 홍범 14조에서 보다 더 분명히 표현되었다. 그 때 ‘백성’의 개념을 넘어서 서구의 ‘시민’이라는 개념에 가까운 ‘인민’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중국의 신해혁명, 러시아 혁명, 1차대전 후 윌슨 미국 대통령이 선포한 민족자결주의 원칙 등이 모두 큰 자극제가 되었다. 

1919년 4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제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인민은 남녀, 귀천, 빈부의 차별이 없이 평등하고 신앙, 언론,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하며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고 명시했다. 

그 때 이미 국권의 회복 운동 과정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체제는 개인의 기본권을 존중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데는 폭넓은 합의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염원과 이상을 현실화(現實化)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혁명의 주된 동력(動力)은 다수 대중의 오래 쌓여왔던 분노가 폭발 하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처럼 변화를 향한 갈구가 행동(行動)으로 폭발하는 것은 대안(代案) 체제의 성립 가능성이 다소나마 있어 보이고 기득권 세력의 억압구조에 틈이 있을 때이다. 다수가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절대빈곤과 철저한 억압이 자행되는 경우에는, 정치적 힘으로 분출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 혁명의 물꼬가 터진 것은 국고(國庫)의 파탄 상태를 걱정한 루이 16세가 귀족회의와 신분대표회의를 소집함으로써 절대왕정 체제에 틈을 보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의 경우는,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전제정권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섰던 여성들의 시위를 진압할 수 있을 만큼 경찰과 병사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대한민국의 건국이 혁명(革命)으로 인식되지 못했던 첫째 이유는 일본의 억압 체제를 무너뜨린 물리적 힘이 우리 민족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제 패망이라는 공동목표를 위해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도 일정 정도는 직접적 기여를 했지만,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기에는 역부족(力不足)이었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일본 억압체제의 붕괴가 곧바로 우리를 권력 주체로 부상시키는 광복(光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또 다시 영토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점령 당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한 국제적 환경에서 남한 만이라도 영토와 국민을 가진 주권국가로 독립한 것은, 다시 말해, 일종의 신탁통치였던 미군정체제 까지도 극복하며 우리 운명에 대한 주도권을 다시 찾은 것은, 혁명적(革命的)이라고 하기에 충분한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건국이 반쪽만의 혁명이 된 이유

그 뿐더러, 1947년 11월 14일의 유엔(UN)의 결정대로 1948년 5월 10일에 남,북한이 함께 인구비례에 따른 선거를 치렀다면, 우리는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립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 민족 다수의 자유의지에 따른 통일국가 수립에 반대하는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排除)시킬 힘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를 보면, 보통선거권(普通選擧權)을 얻기 까지는 선거제도가 도입된 후로도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에 걸친 투쟁을 거처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다수의 국민이 아직 유권자 의식을 제대로 갖기도 전에 보통선거가 UN의 감시 하에 남한 전역(제주지역만은 예외)에서 순조롭게 치러질 수 있었는 데, 이것은 역사적 행운이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가능케 해준 모든 사람들, 특히 이승만 대통령 등 건국세력(建國勢力)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선거권을 얻기 위해 투쟁할 정도의 정치의식도 아직 일반화되지 못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남녀 모두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하게 된 사실이야 말로 대한민국 건국의 혁명적(革命的) 성격을 입증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반쪽만의 성공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배태(胚胎)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기쁨만큼 컸던 것이다. 

 그러나 남쪽에만 국한된 성공이었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건국이 갖는 혁명적 의미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 효과가 남쪽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해도, 대한민국 수립 후의 체제가 일제시대, 그리고 그 전에 있었던 우리 사회와 정치체제의 성격과 엄청난 성격 차이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혁명의 성과(成果)를 북녘 땅에까지 미치게 하자는 것이 오늘날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의 꿈이 아닌가? 

사실,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을 되찾는 과정을 “혁명”으로 규정하려 했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른바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민족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자는 것이 소련 공산당의 지시였다. 

그 전략은 코민테른을 통해 각국 공산당들에 전달되었다. 그것은 중국에서부터 동유럽 국가들에까지 공통으로 적용되던 혁명 공식이었다. 물론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 공산당 조직을 통한 전 세계의 공산화에 있었다.

공산당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이미 국민국가가 완성되어 있었던 나라들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거처야 했다. 

하지만, 조선 같은 피지배 민족들의 경우에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범(汎)국민정부 수립 단계를 우선 거처야 했다. 

그러한 잣대로 볼 때, 해방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기 까지 진행된 과정은 혁명으로 보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을 혁명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남한에서 주도권이 반공우익(反共右翼), 특히 강경파 반공주의자인 이승만(李承晩)에게 넘어 갔고,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궁극적인 목적이 자유민주주의였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선다는 것은  혁명의 결실이 아직 무르익기 전에, 다시 말해 그들이 준비가 되기 전에, 나라를 도난당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련은 처음부터 이승만 같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을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에서 배제시키려 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친일파를 철저하게 척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이 그것을 친일 반동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난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 대한민국 정부는 친일파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승만, 이시영, 지청천, 이범석,신익희와 같은 항일 독립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항일 정신과 투쟁의 경력에서 이승만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친일파 청산에 미온적(微溫的)이었던 것은 공산주의의 위협(威脅)으로부터 새 나라를 보호해야 될 필요성 때문이었다. 

 

북한을 건국혁명에서 제외하도록 만든 외세는 소련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본다면, 분단(分斷)은 국토와 민족의 일부인 북한이 외세(外勢), 즉 소련의 압력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혁명적 과업에서 제외(除外)되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북한은 언젠가는 같은 체제 안으로 재통합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그것은 1917년의 11월 혁명 직후 징권을 잡은 러시아의 볼셰비키가 전쟁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해 국토의 4분의 1과 국민의 3분의 1을 넘겨주었던 사건에 비견될만한 일이었다. 당시 레닌과 트롯츠키는 국토의 보존이나 통일 보다는 혁명정권의 수호가 더 급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경우와 레닌의 경우가 달랐던 것은, 우리의 분단이 우리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던 데 비해, 러시아의 분단, 즉 영토 할양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뿐이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해방 후 남한에서 좌,우익 간에 벌어졌던 쟁투는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혁명 과정에서도 벌어졌던 체제선택(體制選擇) 투쟁과 같았다. 어떤 면에서 오히려 우리의 경우는 그들의 경우 보다 더 단순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제의 종식(우리의 경우는 일제통치의 종식)에 대해서는 모두가 합세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어떤 대안(代案) 체제를 수립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가들의 경우, 입헌군주제를 주창하던 사람들은 공화제를 주창하던 사람들에게 일찌감치 굴복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세력이 단결되어 평화가 온 것도 아니었다.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 안에서도 자코벵과 지롱드 간에 치열한 경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방데 지방을 중심으로는 대대적인 반(反)혁명의 저항과 폭동도 일어 났다. 그 때문에 급진파인 마라가 암살당하고, 테러의 화신이었던 로베스피에르 자신이 처형을 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러한 홍역을 치르고 나서야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진정기로 접어 들었던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가들의 경우에서도 그러한 충돌이 일어났다. 입헌의회의 선출을 지향하고 있던 3월혁명이 볼셰비키 권력 장악으로 치달은 11월혁명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복고파와 자유주의 세력은 물론, 여러 갈래의 사회주의 세력들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그후 레닌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3년여간 좌,우익 사이에 내전(內戰)을 겪어야 했다.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탄생한 과정도 이들 나라의 혁명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국을 준비하던 여러 세력들 간에 경쟁과 충돌이 치열했고, 그에 따라 대한민국 역시 내전(內戰)에 버금가는 시련을 계속 겪어야 했다. 

결국은 좌,우익의 첨예한 대결에서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로도 국가체제를 파괴하려고 지하에서 공작을 계속하는 공산 또는 친공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한 동안 반공독재(反共獨裁)가 계속되었다. 혁명에는 폭력이 따른다는 점에서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건국혁명의 주역인 이승만도 정치적 자유를 억압했는 데,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신조나 기질에 있어서 독재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외세(外勢)가 개입한 것도 공통된 현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실을 지원하려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의 개입(介入)이 있었고, 그에 대한 반작용(反作用)으로 프랑스 안에서는 혁명군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개병제의 실시를 통해 평등한 국민으로 새로 탄생한 프랑스인들을 혁명적 애국주의자로 결속시켰다. 그것은 혁명의 기운(氣運)을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까지 전파(傳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 내전에서는 영국, 프랑스,미국의 서방 연합군이 개입(介入) 조짐을 보임으로써 볼세비키에게 조국수호의 구호 아래 지지세력을 결집시킬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는 폭력(暴力)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외세개입(外勢介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을 세우려던 건국세력에게 소련의 세계공산주의(世界共産主義) 이념과 전략은 새로운 형태의 지배와 종속 가능성을  내포한 외세개입이었다. 

공산당에 가입한다는 것 자체가 세계공산주의의 본산인 모스크바로부터 내려오는 지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종속관계(從屬關係)의 성격은 박헌영을 비롯한 남한의 좌익이 하루아침에 신탁통치 반대에서 친탁통치 찬성으로 입장을 바꾼데서 나타났다. 

스탈린 지배하의 소련으로부터 지령(指令)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일제의 조선 지배에 대한 악몽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것은 신생 대한민국이 그 내부에 침투해 있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彈壓)을 정당화 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반탁투쟁 당시부터 반공(反共)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항하여 자유주의 이념을 수호(守護)하려는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라는 무서운 외세의 개입을 차단(遮斷)하기 위한 민족생존의 투쟁이기도 했다.

그것은 국제정치학 박사로서 국제사회의 흐름을 잘 간파하고 있던 이승만의 태도에서 잘 나타났다. 

이승만은 사회민주주의로의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발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건국헌법에 나타난 교육권이나 노동권을 실천에 옮기려 하고 농지개혁을 주장하는 조봉암을 장관으로 등용했던 사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탈린 치하 소련의 혁명적 공산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의 영향을 배격(排擊)하기 위해 반공(反共)에 있어서는 미국인들보다 더 앞서 나갔던 것이다.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의 제도적 장치가 있었기에 가능

1948년에 제정된 건국헌법은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이 일찍부터 주창해왔던 이상과 이념을 수용한 것이었다. 

그것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은 물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재산권에 대한 보호, 권력 분립 등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체제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조건을 다 망라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육과 노동에 대한 권리까지 언급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체제로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1948년에 대한민국 국민은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에서도 100년, 200년에 걸친 긴 투쟁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얻어 낼 수 있었던 보통선거 제도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었다. 

특히 ‘남녀칠세부동석’을 가르치던 땅에서 여성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함께 획득한 것은 혁명적인 조치였다. 그것은 스위스 같은 유럽국가들 보다도 앞선 조항이었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혁명적 내용을 담은 헌법의 선포가 곧바로 그것의 실현(實現)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일찍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대혁명에서 나왔지만, 공화주의의 이상이 국가권력의 형태로 정착하는데는 거의 90년이 걸렸던 것이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70년의 노력을 투입한 후에도 혁명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아 결국 포기하는 쪽으로 결판이 났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우에 주권재민의 이상은 처음부터 공화국 체제로 구현(具現)되었다. 인간의 기본권 존중과 법 앞의 평등을 대원칙으로 삼는 법제화도 건국과 함께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통령 직선제라는 형식의 정치참여 제도(制度)가 제대로 정착하는 데는 40년이나 걸렸다.  

어떤 이상이나 제도의 원래 뜻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원칙의 부정이나 후퇴를 막기 위한 끊임없는 감시(監視)와 그것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제도적 시행 절차의 정교화(精巧化)를 위한 부단한 노력도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는 미숙할 수 밖에 없었고 많은 결함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개개인이 능력껏 자기 역량을 자유롭게 펴 나갈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원칙은 건국 당시부터 보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당시 국가는 삶의 조건을 평등하게 보장하는 데는 미흡했지만, 적어도 소극적인 면에서의 자유(自由)는 보장했던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건국은 획기적인 혁명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의 혁명이나 마찬가지로 성공한 혁명이다. 

 건국 이후로도 4?19, 유신반대 투쟁ㅡ  광주 민주화 운동 등 민주주의의 진척과 정착에 기여한 많은 투쟁과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대한민국 건국혁명의 이념과 그 혁명으로 만들어진 제도적(制度的) 장치의 보호가 있었기에 발발할 수 있었고 그 테두리 안에서 효력을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 사건들은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이나 제도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지 못하고 헌법에 의한 국민적 권리의 보장이 없었다면, 4?19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下野)도, 6?10 항쟁도,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4?19가 혁명이요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고귀한 생명들의 뜻을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에 혁명이란 말을 붙이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부패와 부정선거를 퇴치함으로써 1948년의 건국혁명으로 태어난 자유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위상을 바로 잡자는 것이 4·19 주체세력의 주장이었지, 대한민국 헌법체제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범(汎)국민적인 호응을 얻었던 것은 대한민국 체제의 내실화(內實化)를 목표로 한 지식인들의 의로운 봉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시위를 이끈 사람들의 목표는 대한민국의 전복이 아니었던 것이다. 

4·19 의거의 결과로 부정부패 책임자들의 처벌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가 뒤따랐다.  

하지만, 그로 인해 탄생한 제2공화국은 단명으로 끝났다. 그리고는 결국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폭압적이고 장기적인 군사독재로 귀결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4·19는, 러시아 혁명 전설의 초석이 되었던 1825년 12월 14일의 청년장교들의 반란사건처럼, 고매한 희생자들을 낳기는 했어도, 성공한 혁명이라 볼 근거는 없다.  

 1910년의 국치(國恥) 이전에도, 정치 현실을 부정하는 개혁의 시도나 불의에 항거하는 대중의 움직임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대안(代案) 이데올로기를 가진 혁명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 시기에는, 독립을 향한 의지와 광복후에 이룩할 정치체제의 성격에 대한 대강의 합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질적인 독립과 민주공화국의 수립으로 연결시킬만한 힘은 갖지 못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항거하고 그 체제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리고 좁은 의미의 지배권력과 지배구조의 교체를 목적으로 하는 쿠데타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 부정의 혁명적 시도가 표면으로 분출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시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하공작의 수준에 머문 정도였다. 

그처럼 대한민국을 뒤엎을만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국민 대중이 정치지도자들 개개인의 도덕적 결함과 능력 부족을 대한민국 체제의 결함과 분리(分離)해 생각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일반 시민들이 그만큼 성숙한 사회에서 살면서도 일부 정치인이나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추상적 이념의 포로가 되어 일반 서민들 만큼도 지혜롭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4. 맺는 말 

민주주의로 이르는 길은 어느 나라나 비슷

대한민국의 건국을 혁명(革命)으로 볼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民主主義)는 무엇 때문에  좋고 필요한 것인가 하는 질문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로 내릴 수 있다. 과거에 공산주의 국가치고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을 국호(國號)에 쓰지 않은 나라가 별로 없었다. 그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말은 큰 혼돈을 가저 왔다. 그래서 우리 학계에서도 “민주주의”와 “민주화”를 구분하여 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민주화에 성공했다는 말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기도 한다. 또한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따로 있는 듯한 가정을 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산업화 세력”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가? 그리고 “민주화 세력”이란 민주주의를 외치며 길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인가? 

거리에 나서서 시위를 하는 대신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에 열중했던 사람들은 민주화를 원치 않았고 민주화에도 기여한 바 없었는가? 

그리고 임금노동자로 혹사당하며 이 나라 경제발전에 주춧돌이 되었던 사람들은 “민주화 세력”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산업화 세력”에 포함 되어야 하는가?

또한,경제성장(經濟成長)이 없이도 지금 같은 정도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가 있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맑스주의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도 상식적으로 던져 볼 만한 것들이다. 

과연 민주주의의 실패와 성공의 척도(尺度)는 무엇인가? 대통령 직선제의 실시와 정권교체가 곧 민주화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제도들을 갖추어야 하는가? 

형식으로는 군주제를 고수하고 있는 영국, 덴마크, 스웨덴 등이 세계에서 인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나라로 평가되고, 핀란드의 케꼬넨 대통령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대통령 보다 훨씬 길게 25년간이나 집권했으면서도 아직도 훌륭했던 지도자로 추앙 받는 것은 무슨 일인가?

민주주의를 말함에 있어서 정치체제의 형식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권(基本權)인 인신의 자유, 법 앞의 평등, 노동의 대가로 얻는 재산에 대한 소유권 보장, 언론과 신앙의 자유 등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다. 

그런 기본권에 대한 존중과 보장 없이 참정권은 무의미하다. 거꾸로, 참정권의 보장 없이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고 신장되기도 쉽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참정권(參政權)도, 사회 전체의 경제적, 문화적 역량의 성숙 없이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고무신 한 켤레에 유권자의 소중한 한 표가 팔려나가던 일이 불행히도 과거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고매한 정치적 이상도 그것을 뒷받침 해 줄만한 경제적(經濟的) 토대와 의식의 성숙, 곧 시민적 책임감(責任感)이 없이는 실천에 옮겨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민주주의의 궁극적 목표라고 볼 수 있는 복지사회로의 이행, 다시 말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이상이 실천으로 옮겨짐으로써 국민 모두가 자부심을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사회의 건설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세계사적 흐름의 맥락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서방의 선진국들보다는 백 여년 늦게 건국혁명(建國革命)을 통해 기본 인권과 정치권을 보장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법적(法的) 기틀을 마련했다. 그것은 국가로 독립을 이루지 못했거나 공산주의의 사슬에 걸려들었던 나라들보다는 훨씬 앞서서 마련된 것이었다. 

다만 그 동안의 문제는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지적, 경제적, 문화적 역량이 민주주의 제도의 장점들을 살려내고 약점들을 최소화시키는 방향으로 운영될 수 있게 뒷받침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던 데 있었다.    

1948년 이후 대한민국 역사의 전개과정도 다른 나라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48년의 건국, 4?19, 단명(短命)의 제2공화국, 그리고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절을 거처온 우리 현대사의 경로는 19세기 프랑스가 나폴레옹 전쟁, 복고 왕정, 1830년과 1848년의 두 차례 혁명, 루이 나폴레옹의 권위주의적 산업화 체제, 제3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진 과정과 놀랄 정도로 비슷한 것이다.

 

환상에 사로잡힌 일부 지식인들이 문제

그런데도 자기 역사에 대한 두 나라 국민의 태도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를 비하(卑下)하고 있지만, 프랑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 역사가 특별히 폭력과 비리와 부패가 승리했던 역사라고 매도(罵倒)하지 않는다. 

이처럼 도덕적(道德的) 잣대로 우리 현대사를 재단하려는 부정적인 태도가 학계에까지 만연하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분단의 현실에 뿌리를 둔 반(反)체제적 시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약적 경제발전과 사회변화를 따라 잡지 못한 지식인 세계의 낙후(落後)된 의식과 지적 나태(懶怠)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의 지식계, 특히 인문사회 분야는 경제발전에서 그늘진 지대로 남아 있었다. 그에 따라 사회의 몸체가 비대(肥大) 해진데 비해 지각의 성숙이 따라가지 못하는 불균형 상태가 발생한 것이다. 

현실과 의식 사이의 괴리(乖離)가 커지다 보니, 경제는 세계 선진국 수준으로 치닫고 있어도 정치는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러한 수준의 정치가 결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의 성공이 사회적 역동성(力動性)에서 나왔고, 그러한 역동성의 배양과 발휘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혁명이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북한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부정(否定) 일변도의 시각으로 우리 현대사를 해석해 온 일부 우리 학계의 자세는 오늘날 나라의 정상적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국민 상당수의 뇌리에는 우리 역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뿐만 아니라 국가 정통성(正統性)에 대한 의문까지 갖고 있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된 것은 민족통일(民族統一)을 지상(至上)의 과제로 여기는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 세력의 오래고도 집요한 공세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 민족에게 재앙(災殃)이었는가, 아니면 축복(祝福)이었는가? 

건국이 잘못된 일이고 이 나라를 만든 사람들이 모두 친일?친미의 반동세력이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에서 거둔 성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아직도 설득력 있는 대답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행히도 우리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현실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기리고 자축(自祝)해야할 기념비이며, 학문적으로 크게 조명되어야 할 주제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 주제는 반(反) 대한민국 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외면당해 온 것이다. 그것은 통일에 대한 비(非)현실적 염원과 환상(幻想)이 역사적 현실(現實)을 직시하려는 이성(理性)의 힘과 도덕적 용기를 압도해 버린 데서 일어난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학계나 국민은 이처럼 정치적 염원(念願)이나 이기적 타산(打算)이 학문적 진리 추구의 의욕과 용기를 압살해 버리는 의식의 역류(逆流)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 제 : 혁명으로 본 대한민국 건국 ? 올바른 국가의식 함양을 위한 거시사적 비교 ?

강 사 : 이인호 박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일 시 : 2010년 11월 25일(목) 07:30∼09:20

장 소 : 전쟁기념관 뮤지엄홀 코스모스룸 (3층)

참석인원 : 25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