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갈등, 결론에 승복 못하면 국가 에너지 고갈"
"국가나 사회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갈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적당한 때에 선거나 표결을 통해 결말 지어야 합니다. 패자는 결론을 받아들이고, 승자는 패자를 포용해야만 갈등이 건강하게 해결되고 국가나 사회도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최근 동·서양의 역사를 흥망의 관점에서 바라본 저서 '흥망유수(興亡有數)'를 발간한 권성(75·사시8회) 전 헌법재판관은 국가와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적 갈등 해소를 위한 승복과 포용의 문화가 필요하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흥망유수'는 권 전 재판관이 젊은 시절부터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호기심을 정리한 책이다. 22일 서울 역삼동 삼성제일빌딩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권 전 재판관을 만나 책을 발간하게 된 배경과 법조 현안 등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삼국지 등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다는 권 전 재판관은 "역사책을 읽다보니 국가의 흥망이 흥미로웠다"며 "바다의 파도가 밀려 오고 나가는 것처럼 리듬과 패턴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호기심에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흥망유수'를 통해 "집단의 단결력 강화 여부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좌우된다"며 '아사비야(asabya)'를 강조했다. '아사비야'는 14세기 아라비아 사상가인 이븐 할둔(Ibn Khaldun)이 저서인 '역사서설'에서 처음 쓴 용어로, 우리 말로는 '사회적 연대의식'이나 '결속' 정도로 번역된다.
그는 "결론에 승복하지 못해 갈등이 이어지면 국가의 에너지가 고갈돼 국가 생존을 유지하기 어렵다"며 "우리나라는 적시에 갈등의 결말을 짓지 못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권 전 재판관은 특히 최근 법조계가 사법시험 존치나 상고심 제도 개편 등 각종 현안을 두고 각 기관·직역별로 첨예하게 대립하는데 대해 "마음이 가볍지 않다"며 "어떤 제도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시행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고쳐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헌 논의와 관련해서도 "나라의 변화에 맞춰 제도의 틀도 바꿀 필요는 있지만, 몽땅 뜯어고치는 것보다는 문제가 심각한 것부터 대처해 나가야 한다"며 '점진적인 부분 개헌'을 주장했다. 헌법 전문부터 경과조치까지 모두 뜯어고치는 전면 개정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개정하거나 추가할 내용을 수정조문으로 만들어 헌법의 말미에 추가·보완하는 미국식 개헌 방식을 제안했다.
대법원장이 헌법재판관 3명을 지명하도록 한 현행 재판관 임명 방식과 관련해서는 "대법원장은 법적 안정성·신뢰 차원에서 국가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위로 대법원장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냐"며 현행 방식에 문제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재판관 구성을 다양화하기 위해 법조 실무가만으로 구성되는 현행 방식 대신, 학계에서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학자가 헌재에 들어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권 전 재판관은 1985년 법원행정처 송무국장 재임 당시 상고허가제 실무 입안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상고심 제도 개편과 관련해 "독일식으로 대법관 수를 대폭 늘리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며 "최고법원의 판단을 받고 싶어하는 국민들의 희망을 만족하는 동시에 오랜 경륜을 쌓은 법관들을 법원에 계속 둘 수 있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12년 봄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기도 했다. 2008년 임기 3년의 언론중재위원장에 취임한 그는 사고 당시 위원장으로 연임 중이었다. 그는 "평소에 혈압이 높지 않았는데, 건강에 자신을 가지고 너무 무리했던 것 같다"며 "걷는 것도 불가능했고,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재활을 거쳐 이젠 많이 회복됐다"고 했다.
권 전 재판관이 몸담은 헌법재판소 3기 재판부에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헌법의 한계를 시험하는 초유의 사건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독특한 결정문으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됐던 여러 사안에서 소수의견을 많이 낸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헌재 사상 유일무이한 사건 두 가지에 모두 관여했다. 하나는 재판관으로 참여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사건(2004헌나1)이다. 다른 하나는 정부 측 대리인으로 참여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사건(2013헌다1)이다. 사건 당시 그는 언론중재위원장 임기 만료를 두 달 앞두고 위원장직을 사임한 뒤 대리인단에 참여했다. 그는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대법관 출신 선배 변호사의 권유와 함께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건이라 기여하고 싶어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재판관 8대1 인용 결정은 북한과 총칼을 마주대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고 강조했다.
"열 살 때 일어난 6·25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수많은 시신들을 보는 등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것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안보 위협 문제를 실감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지겨울 수도 있겠지만, 고난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지난날의 고생했던 이야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이승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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