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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장집 정책기획위원장께(1차)
글쓴이 헌변 등록일 1998-11-10
출처 조회수 1996

최장집 정책기획위원장께

귀하의 저서 및 논문이 대한민국의 존립근거와 정통성을 훼손하였느냐 여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헌법 제66조 제2항, 정부조직법 제4조, 대통령령 제14667호에서 규정하는 바 같이, 귀하가『대한민국의 영토 보존과 헌법 수호의 책무를 진』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여『국가목표의 설정과 국가주요정책에 관하여』국가최고통수권자의 브레인트러스트 일을 하는 정책기획위원장이기 때문입니다.
헌법 제7조 제1항에 의하여 공직자에 대하여『알권리』를 가지는 국민의 일원으로서, 헌법을 공부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법률인들로서『여론의 광장(Public Forum)』에서 의문나는 점들을 질문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대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귀하는『해방전후사의 인식 4 (1997. 4. 30. 제1판, 제8쇄)』중『해방8년사의 총체적 인식』에서

(1)『해방정국의 혁명과 반혁명의 갈등이 한국전쟁으로 점차 귀결되는 과정을 파악하는 것이 해방8년사 이해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중들의 요구와 행동의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 이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된다.(13쪽)』고 쓰고
『올바른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올바른 역사의 맥락을 파악하는 일은 시급히 필요하다.(13쪽)』고 쓰므로써
『올바른 역사파악의 필요성』을 머리말의 전제로 하고 있음.

(2)『혁명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측면에서 본다면, 일제하의 모순의 심화로 인하여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이 반제반봉건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동원되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처벌을 비롯한 식민 잔재의 척결을 요구하는 애국적 역량과 토지개혁을 비롯한 봉건 잔재의 척결을 요구하는 계급적 역량이 동원됨으로써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15쪽)』라고 쓰고
『한편 지주, 일부 한인 자본가 등의 지배계급과 친일경찰을 비롯한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은 해방 후에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에 직면하여 반혁명세력이 되었고, 이들은 미군정이라는 외세의 지원과 일제가 남겨놓은 강력한 관료체제를 이용하여 민중들의 도전을 물리적으로 진압하게 된다.(16쪽)』라고 쓰고 있음.

(3)『미·소의 분할점령은 이러한 혁명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쳣다.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소련군의 후원에 힘입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미군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이러한 혁명이 미군정의 반혁명정책에 의해서 결국 좌절되었던 것이다. 결국 북한에서의 혁명의 성공과 남한에서의 반혁명의 성공은 남북한에 적대적인 두 정권이 수립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19쪽)』고 쓰고
『미군정은 반혁명을 위해서 국내의 지주 및 매판자본가들과 연대하는 한편 일제의 관료체제를 복구하고 친일파·민족반역자·친미파 등을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동자·농민 등의 민중들을 대변하는 좌익세력은 민중적 조직역량에 바탕하여 이를 대항하였다.(20쪽)』고 쓰고 있으며
『이와같은 해방 정국의 구조 속에서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성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혁명세력은 노동자·농민의 기층민중들을 기반으로 하여 애국적인 모든 요소들과 연대하려 했으며,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등을 통하여 정치세력화되었다. 반혁명세력은 미군정을 중심으로 지주계급·매판적 자본가·친일친미파 등이 결집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한민당·이승만세력 등을 통하여 정치세력화되었다.(20쪽)』고 쓰고
『일제의 패망으로 곤혹스럽게 되었던 지주·자본가 등의 지배계급과 친일파·민족반역자 등의 반민족적 세력은 미군정의 실시로 새로운 구원자를 만나게 되었다.(21쪽)』고 쓰고 있음.

(4)『1946년 10월 1일 대구항쟁으로부터 시작되어 12월 중순 전주항쟁으로 종결되었던 10월 인민항쟁은 약 두달반동안 전국에 걸쳐 전개된 민중들의 들불과 같은 항쟁이었다(27쪽)』고 쓰고
『전체적으로 볼 때 10월 인민항쟁은 반제반봉건의 제반 요구들이 해결되지 않고 나아가 식량난을 비롯한 생활난이 가중되는 상황속에서 대구에서의 9월총파업을 계기로 폭발·전개된 민중의 항쟁이라 할 수 있다.(27쪽)』고 쓰고 있으며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되어 약1년에 걸쳐 제주도에서 전개되었던 4.3 민중무장봉기는 반혁명이 분단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제주도민에 대한 육지의 경찰 및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항하여 민중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사건이다. 이 봉기 역시 중앙의 지시없이 야기되고 사후 추인된 듯하다. 이 봉기는 국군과 경찰의 진압으로 약1년만에 거의 종식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약3만~8만의 양민이 진압군에 의해 살해되는 참극을 낳았다.(27쪽)』고 쓰고
『민중들의 가열찬 투쟁과 미군정의 폭력적 진압이 반복되면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27쪽)』고 쓰고 있으며
『제주 4.3민중무장봉기에서도 그 지역적 투쟁성이 높았다 할지라도 중앙과의 연계, 시기선택, 투쟁방식 등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당시의 민중들은 미군정의 반혁명과 조국의 분단에 대항하여, 비록 수많은 피해를 당했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저항함으로써 민중역량의 진정한 실체를 보여주었다.(28쪽)』고 쓰고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의 민중투쟁과 마찬가지로, 무장투쟁에서도-예컨대 여순봉기에서처럼-좌익지도부의 지도와 통제는 불완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투쟁에 대한 지도부의 지도와 계획의 부재, 아니면 지도부의 모험주의적 시도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된다.(30쪽)』고 쓰고 있음.

(5)『남한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혁명으로 귀결되었음에 반하여, 북한에서의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민중들의 혁명열기가 소련군의 후원이라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을 바라볼 때 북한 자체의 혁명의 진전이란 측면 이외에도 통일문제와 관련된 북한의 정책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통일문제에 있어 민주기지 노선으로 지칭되는 북한의 통일전략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한국전쟁까지 전개되는 북한의 통일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는데 관건이 된다.(30쪽, 31쪽)』고 씀.

(6) 위 (1)의 머리말을 전제로 한 (2)~(5)에 쓴 바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7. 4. 30. 제1판 제8쇄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뀌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점을 글로 써서 밝힌 일 있습니까.


2. 귀하는 같은『해방전후의 인식 4』중『해방8년사의 총체적 인식』에서

(1)『우선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필연성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되고, 다음으로는 구체적으로 전쟁이 촉발되는 원인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33쪽, 34쪽)』라는 접근방법을 택하고 있음.

(2)『혁명과 반혁명의 갈등은 이제 남북 국가권력 사이의 갈등으로 전화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에서의 무장투쟁과 38선상의 군사충돌로 나타났다. 즉 통일을 둘러싸고 남북의 정권이 무력으로 대치하는 상황으로 나아갔던 것이다.(34쪽)』라고 쓰면서
『요컨대 국내외적인 배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상황은 점차 한국전쟁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상황으로 나아갔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구조적 상황 속에서 한국전쟁이 촉발되는 원인과 과정을 살펴보자. 1949년 여름에 38선상에서는 남북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것은 주로 옹진반도를 중심으로 발생하였고 충돌의 상당 부분이 남한측의 공격에 의해서 야기되었다.(34쪽)』고 쓰고
『한편 38선상의 충돌이 빈번해짐과 동시에 남한에서의 무장유격대의 공세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무장유격대의 공세가 38선상에서의 남한의 압력을 완하시키기 위한 제2전선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공세 자체의 목적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인지는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34쪽, 35쪽)』고 쓰고 있으며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중점을 두었던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전쟁 발발 책임의 문제가 과대하게 고려될 필요는 없다.(36쪽)』고 쓰고 있음.

(3)『또한 일설에 의하면 자원에 의하였든 강제징병에 의하였든 약 40만명의 남한 청년들이 북한 의용군으로 동원되었다 한다.(37쪽)』고 쓰고
『제1국면의 특징은 북한군이 파죽지세와 같은 공격을 하고 점령지역에서 급속하게 토지개혁을 비롯한 민주개혁을 수행했다는 점과, 미군이 신속하게 전면적인 개입을 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40만의 남한 민중이 자의건 강제건간에 북한군에 참여함으로써 실제적인 전쟁의 양상은 미군 대 한국인 사이의 싸움이라는 모습을 띠게 만들었다.(37쪽)』고 씀.

(4)『한국전쟁은 남한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은 경제적으로 남한이 세계자본주의체제속에 편입되어 종속적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정치적으로 반공체제가 강력하게 구축되도록 만들었다.(43쪽)』고 쓰고 있음.

(5) 위 (1)의 접근방법으로 (1)~(4)에 쓴 바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7. 4. 30. 제1판 제8쇄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뀌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점을 글로 써서 밝힌 일 있습니까.


3. 귀하는 같은『해방전후의 인식 4』중『해방8년사의 총체적 인식』에서

『이러한 역사의 총체적 구조 속에서 이 역사의 과정을 기본으로 추동했던 대립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급적·민족적 견지에서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려 했던 한국 민중들을 한 축으로 하고, 새로운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서 한반도에서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관철시키려 했던 미국의 미해를 또 다른 한 축으로 하는 대립이었다고 할 수 있다.(44쪽)』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러한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7. 4. 30. 제1판 제8쇄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뀌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점을 글로 써서 밝힌 일 있습니까.


4. 귀하는『한국전쟁에 대한 하나의 이해(1990)』에서

(1)『그동안 한국전쟁에 대한 지배적 이론은 ‘하나의 초점 시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누가 먼저 38도선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전쟁이 발발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물음은 한국전쟁을 분명한 전선을 사이에 두고 어느 일방이 전면적 공격을 개시하는 하나의 재래식 전쟁으로 상정한다. 그러므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전 전선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감행한 북한에 사상 유례없는 동족상잔으로서 한국전쟁 발발의 책임이 있다는 논리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세계 적화야욕에 불타는 공산 종주국의 수괴 스탈린의 지휘하에 치밀하게 사전에 예비되고 그의 교사에 의해,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모택동의 지원하에 그 괴뢰인 김일성이 도발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정의, 평화, 자유, 민주주의의 사도 미국이 이와같은 범죄적 전쟁에 개입하여 많은 피를 흘리면서까지 풍전등화와 같았던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이땅에 민주주의의 이상과 자유와 평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냉전 반공 모랄리스트적 접근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들의 팽창주의를 미화하고 남한사회내의 정치적 지지기반이 지극히 협애한 극우적 정치세력이 중심이 된 단독정부의 존재이유를 정당화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제하의 민족해방운동과 압도적 다수의 민중들의 민족자주 독립국가 형성을 위한 투쟁과 희생, 열망을 상대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탈역사화 및 해체의 접근이며 이데올로기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탈역사적인 까닭은 ‘50년 6월 25일 새벽 4시’라는 한 현상적 계기에 설명의 초점을 두는 반면, 역사의 인과적 계기들의 중요성을 사상하거나 경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족해방투쟁의 성격, 미국의 분단지향적 대한정책, 남한 정권의 성격과 민중에 대한 폭력적 탄압에 덜 관심을 갖는다. 또 그것을 해체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역사적이며 사회적 집단으로서의 민중이 그 설명방법 내에서는 위상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민중이 반드시 역사변혁의 주체일 필요는 없다. 외세와 그와 결합한 국내 지배세력들이 주도하는 역사와 그 격변의 와중에서 고통과 희생을 중심에서 흡인하는 민중집단은 설명의 대상으로서도 그 어느 사회집단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해체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으로서, 중심적 가치와 이상으로서, 그리고 모든 민중들이 이를 열망하고 투쟁하였던 민족자주와 민족통일 자주국가의 형성이라는 주제를 역사적 판단의 중심에 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인 까닭은 스탈린에 의해 조종되는 전일적 구조를 갖는 전체주의사회로서 세계공산주의와 그 꼭두각시로서 김일성의 북한체제를 상정한 이후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하려는 목적을 사전에 미리 전제함으로써 이와 관련될 수 있는 문제만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지극히 일면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313쪽, 314쪽)』라고 종래의 6.25전쟁 책임론을『탈역사화 및 해체의 접근이며 이데올로기적 접근』으로 볼 수 있고『지극히 일면적인 방법』이라는 비판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민족자주의 이념과 가치에 입각한 민중적 역사인식은 총체적 역사를 그 방법론으로 한다.(317쪽)』고 써서 귀하의 6.25전쟁에 대한 판단의 방법론으로서『민중적 역사인식』을 제시하고 있고
『그러므로 한국전쟁의 총체적 이해를 위해서는 민중이 역사변혁의 중심이 된 민족독립과 민족자주의 원리에 입각한 민족통일국가의 수립과 민주적 사회질서의 수립을 위한 노력이 왜, 어떻게 좌절되었고, 그것은, 왜, 어떻게 가장 파국적이고도 폭력적인 전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나?(317쪽)』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

(2)『한국전쟁의 역사적·구조적 요인은 분단의 요인과 중첩된다. 요컨대 전쟁은 외세에 의해 민족적·민중적 열망에 반하여 위로부터 강제된 분단의 어쩔 수 없는 귀결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318쪽)』라고 쓰면서
『38도선의 획정과 아울러 9월초 미군정의 실시와 군정정책으로 표현되는 미국의 대한정책은 분단과 전쟁 발발의 실로 결정적 요인을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하지의 군정정책은 세계의 어느 지역보다도 일찍이 치열한 대소적대정책을 전제하고 남한의 혁명적 민족주의세력은 물론 전체 한국 민족주의운동세력을 적대시하고 탄압하는 정책을 폈던 것은 특기할만하다. 오늘날 미국의 보수적인 학자들조차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이승만세력과 토착우익지주세력인 한민당세력으로 하여금 군정하의 정치지도부를 구성케하는 한편, 조선공산당·온건사회주의·임정계 민족주의 등 광범한 여러 경쟁적 민족독립운동세력, 그리고 지방과 기층에서 인민위원회·전평·전농·문화 지식인·청년학생·여성 등 광범한 사회단체를 정치참여에서 배제하고 탄압하는, 즉 전체 민족해방운동을 파괴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미군정에 의해 급조된 소수 지배세력과 군정의 반민중적 정책에 저항하는 정치적 소요와 불안정의 확산에 대응키 위해 군정은 짧은 시간내에 일제하 국가폭력기구의 부활과 재건을 뜻하는 경찰 및 사법기구를 중심으로 한 국가강권기구를 강화 발전시켰다. 이로써 당시 민중들의 최대 열망이었던 일제식민잔재의 청산, 통일된 민족독립국가의 수립,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사회경제적 관계의 변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그것은 다른 형태로 현실화된 구체제의 복원이었다. 이 모든 것이 미군정하에서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수행되었고 정당화되었다. 이점에서 분단과 전쟁이 민족 내부의 문제로부터 발생한 것이냐 외세의 영향 또는 개입에 의한 것이냐, 즉 내인이냐 외인이냐 하는 물음은 온당한 질문이라고 할 수 없다.(325쪽)』고 쓰고
『46년 6월 당시 일반민중을 경악케 하였던 이승만의 단정지지에 대한 정읍발언만 하더라도 사실 그것은 군정정책의 숨은 의도를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미군정하 남한사회에서 무수한 집회, 소요, 봉기, 노동자파업, 학생동맹휴업, 미군 및 경찰과의 충돌사건은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그 가운데서도 46년 9월 철도파업으로 시작된 총파업, 10월초부터 11월중순까지 거의 남한 전역으로 확대된 ‘10월 인민항쟁’은 거대한 민족민중투쟁으로 특기할 만하다. 이미 47년 여름 2차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의 결렬 이후 지배권력과 민중간의 격돌은 보다 격화된 폭력적 대립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48년에 이르러서는 남한 내 단선·단정수립을 관장하기 위해 내한한 유엔 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활동에 반대하고, 남조선 단정수립 반대, 양군 동시철수, 통일민주정부수립을 요구하면서 봉기한 2.7구국투쟁, 5.10총선반대투쟁, 그리고 4.3제주민중항쟁으로 표출되듯, 미군정과 지배권력 대 민중간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지배권력에 대한 이러한 극한적 민중저항은 남한사회가 사실상의 대란상태로 돌입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327쪽, 328쪽)』고 쓰고 있음.

(3)『이에 어떤 이는 반론을 제기할지 모른다. 굳이 분단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다면 소련점령하의 북한도 동시에 분단을 지향하고 있지 않았는가?라고. 이 질문은 당연하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이런 것일수 있을 것 같다. 북한 정권의 구조와 리더쉽의 형성이 소련의 반식민지 민족해방이론과 대체로 상응함으로써 무장독립투쟁세력을 비롯한 여러 민족독립운동세력이 소련의 군정 정책과 크게 갈등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련의 지원을 받는 중앙권력의 리더쉽과 지방의 인민위원회, 제계급적·직능적 사회단체로 조직화된 민중은 상호 갈등적이거나 대립된 관계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 군정하의 정치권력은 일제 식민지 국가기구의 해체, 식민잔재의 청산, 혁명적 토지개혁을 통한 지배적 사회관계의 기본구조의 변화를 가능케 했다. 이러한 개혁이 민중적 개혁요구에 상당한 정도로 부응했다는 것은 하나의 현상적 사실, 즉 북한에서는 남한과 같은 정치적 소요와 불안정, 대규모 민중봉기가 부재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될른지 모른다. 이는 북한이 45년 10월 이미 남한에 대한 민족민주혁명의 정통성과 민족통일 과업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자임하면서 이른바 “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담보하는 책원지”로서의 “민주기지노선”을 천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328쪽)』라고 쓰고 있음.

(4)『정부수립 이후 남한 정부는 고도의 국가폭력의 행사를 통하여 대규모 민중봉기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사실상 이 시기에 들어오면 봉기, 데모, 소요, 파업 등의 방법에 의한 민주민중운동은 사실상 궤멸되기에 이른다. 이점에서 4.3제주도 민중봉기와 5.10총선반대투쟁은 이러한 종류의 민중항쟁의 최후의 사례로 기록된다.(329쪽)』고 씀.

(5)『49년 여름 이래 38도선 선상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 남북간 양군의 무장충돌과 해상사건은 남한만에 의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충돌의 많은 부분이 남한측의 공격에 의해 야기되었다. 5월초 미군 당국은 남한군이 개성, 춘천 지역에서 4㎞나 북상하여 여러 마을을 고격한 사태에 우려를 표명하고, 미국의 무쵸대사는 이승만과 만나 한국유엔임시위원단이 이러한 사태를 주시하고 있으니 그러한 공격은 한국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옹진반도를 중심으로 한 남북간의 무장충돌은 특히 빈번하였다. 50년 6월 전쟁 발발시 옹진반도가 최초의 개전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전의 빈번한 무장충돌과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남한 내부에서의 게릴라전의 격화는 50년 6월의 전쟁 발발 1년전에 이미 준전시상태 또는 내전상태가 시작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사태발전은 남한내 지배세력과 민족운동세력간의 대립상황이 남한내 민족세력의 궤멸과 더불어 정부수립 이후에는 남한 내 게릴라전의 양상으로 변하고, 이는 다시 다음 단계에서 남북한간의 내전상태로 변해가고 있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이러한 사태발전의 연장선상에서의 한 중요한 계기일뿐이라는 것이다.(331쪽)』고 쓰고 있음.

(6)『한 과정으로서의 한국전쟁은 그 성격변화에 따라 네 시기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시기는 6월 25일 38도선에서의 전면 개전으로부터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이 미 공군과 해군에 한국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즉 미국의 개입결정 때까지이다. 두번째는 이때부터 미군-유엔군-남한군이 38도선을 넘는 시기이다. 세번째는 이때부터 51년 7월 10일 휴전협상이 개시되는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이때부터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의 조인으로 전쟁이 종결되는 시기이다.(336쪽)』고 써서 나눈 다음
『첫번째 시기에서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전쟁이었던 반면, 두번째 시기부터 전쟁은 혁명적 민족주의 세력 대 분단세력이라는 민족 내부의 모순이 폭발하여 표면화되는 내전일 수가 없게 된다. 이때부터 전쟁의 당사국으로서 미국이 전면에 나서 한국의 혁명적 민족주의세력과 싸우는 전쟁으로 변질된다.(336쪽)』고 쓰고
『그러나 세번째 시기의 전쟁은 더이상 ‘침공자’를 38도선까지 격퇴하여 ‘전쟁 이전 상태로의 원상회복’(Status Quo Ante Bellum)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북한 정권 자체를 궤멸시켜 한반도 전역에 반공통일정부를 수립하고, 나아가 중국공산당 정부의 존립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거나, 또는 이를 붕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로 무제한적이며 세계전의 가능성을 불사하면서도 미국이 전 아시아를 제패하려는 원대한 전쟁목표를 수행하려 했던 전쟁이었다.(336쪽, 337쪽)』고 쓰면서
『네번째는 전쟁을 제한전, 국지전적으로 제한시키려는 온건 그룹과 서방연합국에서 비등하는 세계여론이 중국 대륙으로 전쟁을 확대시켜 세계대전으로 몰고가려는 호전적 강경파를 억제시킴으로써, 전쟁은 원상회복상태로 되돌아가 휴전으로 종결되기에 이르는 마지막 시기이다.(337쪽)』고 쓰고 있음.

(7)『북한측의 전쟁명분이 어디에 있든, 민족해방, 통일과업이라는 대의명분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전쟁은 쌍방이 모두 명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의 쌍방은 공격되기 이전의 원상을 회복할 나름대로의 근거를 갖는다. 이점에서 미국은 내전에 대한 외세의 참전이라는 명분없는 일방적 개입에 원상회복이라는 명분으로 그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점에서 38도선 이북으로의 북진은 공격적 팽창주의의 발로라고 밖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340쪽)』라고 쓰면서
『그러므로 38도선 이상으로의 북진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일차적으로 중국혁명을 수호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망의 문제로 나타났던 것이다. 중국의 참전시 미국이 당시 한반도에 보여주듯이 가공할 공중폭격으로 산업시설이 하나도 무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서는 참전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341쪽)』고 쓰고 있음.

(8)『5백만명이 훨씬 넘는 피난민들이 북한지역으로부터 남한으로 넘어온 것은 이런 정황하에서였다. 물론 거기에는 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을 비롯하여 공산통치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원폭투하의 소문과 폭격의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토화되어가는 북한지역에서 집과 먹을 것을 찾아 남하하는 사람들 역시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343쪽, 344쪽)』라고 씀.

(9) 위 (1)의 비판에 터 잡은 방법론과 문제의식으로 (2)~(8)을 쓴 바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0 출판이후 어느 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뀌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점을 글로 써서 밝힌 일 있습니까.


5. 귀하는『한국현대정치의 구조와 변화(1989)』중『한국전쟁의 시각변화』에서

(1)『지난번 6-10 남북학생회담 시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듯이 통일에의 열정이 고양되면 될수록 분단을 고착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역사적인 대사건으로서의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더욱 요구된다.(166쪽)』고『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주장하면서
『전쟁은 전쟁 직전 15만명을 약간 웃돌던 남한의 군사력을 전쟁중 70만명으로 증강시켰고 전후 60만대군의 병력을 제도화하였다. 남북의 군사적 대치상황과 군부관료 통치체제의 지속, 반공 이데올로기와 군사문화의 지배 등은 한국전쟁 및 이를 계기로 구조적으로 팽창한 군부의 존재와 관련시키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어렵다.(166쪽)』고 남한의 군사력 증강을 보는 시각에서
『미국과 같은 외국이 혈맹이 되고 우방이 되는 동안, 분단된 북한을 더 이상 동족이 아닌 원수로 삼을 때 동족간의 형재애에 바탕을 둔 평화통일은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166쪽)』라고 쓰고 있음.

(2)『사실상 한국전쟁은 세부분 또는 세국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번째는 해방직후로부터 시작하여 해방된 민족통일 국가를 수립하려던 민족의 열망이 좌절된 시기이다. 즉 이러한 민족의 열망이 냉전의 확산과 복합적으로 접합되면서 1950년 6월의 전쟁으로까지 이르게 되는 부분이다. 두번째는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이하 단정)가 수립된 이루 미소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았던 남북간의 긴장이 전쟁으로 폭발하게 되었던 국면이다. 세번째는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이 ‘전쟁 이전상태로의 원상회복’에 만족하지 않고 1950년 10월초 38도선을 넘기로 한 중대한 결정으로부터 확전 및 휴전협상 과정과 여기에 내재된 의미를 포함하는 부분이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은 북한정권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 정권까지 궤멸시키려는 원대한 ‘석권정책’의 구상과 더불어 그 이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우리는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전면전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의 첫번째 국면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한 연구자의 추정대로 특히 1948년 4.3항쟁 이후 전쟁 발발 때까지 게릴라전을 포함한 정치적 투쟁으로 10만명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할 때 우리는 이미 그것을 평시의 상태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38도선 이남에서 단정 수립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간의 무력충돌이 정부 수립 이후 서서히 단정 수립세력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남북 정부간 대결로 양상이 변화된 국면으로 넘어간다.(166쪽, 167쪽)』고 쓰고 있음.

(3)『우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38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최근에 이르기까지 반공 모럴리즘(도덕주의)이라는 경직된 냉전적 시각을 통하여 전쟁을 이해하도록 교육받아왔다.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 공산집단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면남침을 감행하였고, 평화의 사도 미국과 유엔군이 공산당을 무찔러 이땅에 평화와 자유와 민주의 보루를 구축해주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공산정권이 전면적인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사실 자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동안 한세대가 훨씬 넘도록 한국전쟁을 그렇게 이해한다는 것은 전쟁의 내용과 의미를 위에서 말한 두번째 국면에만 국한시키는 협애한 것이며 그것이 세계사와 우리의 역사에 대해 가지는 복합적이고도 총체적인 이해를 어렵게 한다.(167쪽, 168쪽)』고 씀.

(4) 결론적으로『38도선 전역에 걸쳐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느냐 하는 문제가 한국전쟁의 전체 의미가 된다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군에 의한 전면남침이 곧 대답이 되어버리고 만다. 전쟁의 이름 자체를 6.25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이러한 냉전 반공주의적, 공식적 시각의 당연한 진리를 담보해주는데 용이하다. 이점에서 전쟁의 이름은 당연히 6.25전쟁이 아닌 한국전쟁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169쪽)』라고 쓰고 있음.

(5) 위 (1)에 적힌 바 귀하의 방법론과 문제의식에 터잡아 쓴 (2) 내지 (4)에 쓴 바와 같은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89 출판된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뀐 일 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점을 글로써 밝힌 일 있습니까.


6. 귀하는『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1998. 3. 5.) 2쇄』에서

(1)『이책은…현실정치의 변화를 민주주의의 이론 내지는 실천이성적 관점에서 분석할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7쪽)』고 쓰므로써『실천이성적 관점』에서 쓰고 있음을 밝히고 있음.

(2)『해방 직후 열려진 정치공간에 최초로 등장한 세력은 여운형(呂運亨) 주도하의 건국동맹그룹과 곧 조선공산당(조공)으로 발전하게 될 박헌영(朴憲永) 그룹이었는데, 이들은 해방 직후 38도선의 분획과 미군정통치의 전개로 이북지역에서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만주의 항일무장세력, 중국본토에서 투쟁한 독립동맹세력 등과 아울러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던 그룹이었다. 해방 직후 남한지역에서 최초의 정치적 대표기구가 출현한 것은 여운형 지도하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였다. 이는 문자 그대로 준비위원회로서 정치적 공백기에 민족독립운동세력을 대표하는 하나의 정치적 구심체로서, 철수하는 일제식민통치기구의 행정업무를 인수하고 민족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귀국한 이후 더욱 본격화될 국가건설을 준비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또 다른 한편 이 시기 전국의 마을 구석구석까지 폭발적으로 조직된 지방에서의 인민위원회를 조직기반으로 하는 전국수준의 대표조직이 요구되었던 것은 매우 당연했다.(49쪽, 50쪽)』고 씀.

(3)『그러나 미군정의 실시는 이 시기 좌파지도자들이 생각하였던 것보다 그 효과는 훨씬 즉각적이고 항구적인 것이었다. 미군정의 실시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세가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미군정의 실시는 북한에서의 소련점령과 함께, 한반도의 정치가 냉전질서로 편입된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이유로 인하여 세계적 수준에서 이후 가속화되는 미소대결의 최전방에 놓이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가 국내정치적 조건과 요구와는 무관하게 세계적 수준에서의 미소대결을 한반도에 압축하고 반영함으로써 국내정치의 조건과 지형을 근원적으로 변형시키게 되었음을 말한다. 한국정치의 세계화, 바꾸어 말하면 냉전의 국내정치화가 그것이다. 둘째는 극우적 형태를 갖는 전후 한국의 보수주의가 이로부터 시발된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정치, 경제, 사회부문에서 근대적 개혁들이 민중과 민중의 요구를 대변하는 세력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보수세력이 전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위로부터 수행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민중성과 근대성, 양자간에 존재하는 쉽게 해소되지 않는 긴장과 갈등이라는, 한국현재사를 관류하는 하나의 중심적인 테마를 이루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표현을 따라 근대화의 ‘수동혁명’적 성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150쪽)』라고 쓰면서
『그러나 가장 크게는 한국에서의 보수세력들이 민족의 장래보다도 그들 스스로의 이익에 집착하여 미군당국자들을 오도하였다는 점들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과 지배블록의 성격과 정책이 반민중성으로 특징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반근대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52쪽)』라고 씀.

(4)『미군정 초기의 정국은 이중권력의 시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에서는 해방 직후 밑으로부터 변혁을 요구하는 민중들을 대변하는 좌파 민족주의적 세력들이 압도적 헤게모니를 가졌던 데에 반하여, 국가의 통치기구를 관장하는 미군정이 또한 정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음으로써 두권력이 갈등적이면서도 양립하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54쪽)』라고 쓰고
『그러나 우파는 이 시기 공산당으로 조직되고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는 혁명적 민족주의세력을 직접반공의 이름으로 공격할 수 없었다. 반공이념이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로 등장하였으나 그것은 민족적 정서와 합리적 가치판단의 이념적 기준으로 자리잡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비결은 그 공격의 대상과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공산주의였지만 그 언표화는 반민족이라는, 우파가 민족주의 이념을 동원하는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찬반탁투쟁은 기묘한 이데올로기적 전치를 발생시켰는데, 혁명적 민족주의의 중심세력이 반민족주의로, 반대로 일제하 그들의 행적이 순전히 반민족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친일적 협력과 온건한 민족개량운동 사이를 왕래하던 우파의 중심세력이 민족주의자로 돌변하는 언술적 위치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는 해방 후 민족주의가 어떻게 극우반공주의로 왜곡 수용되고 허구화되는지를 보여준다.(55쪽)』고 씀.

(5)『이 시기 한국에서의 극우보수주의는 사회내의 계급적 이해관계의 갈등에 기반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유럽의 파시즘과 유사하나 이미 국가가 체제의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매트릭스를 설정한 이후에 우파들이 그 대행조직으로서 행위하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므로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에는 미군정이 공공연하게 분단지향적 정책을 지향하면서 더욱 전면적이고 공개적으로 민족민중세력을 궤멸시키는 단계로 돌입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민중적 저항이 1946년의 10월 인민항쟁이었다. 분단을 막고 민족독립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기회가 대체로 해방 후부터 1946년 봄까지의 극히 짧은 시기였다고 한다면, 국내의 정파들이 정치라는 ‘가능의 예술’을 통하여 이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공간은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여기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는 거의 필연의 경로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분단을 막는 일이 실패하였을 경우에라도 한국전쟁만이라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극우세력들이 좌파세력들을 궤멸시키는 것만이 그들이 살길이라고 믿었다면 그들의 정치력과 민족애라는 선의에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아마도 그것은 해방공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공산당 지도부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박헌영의 전후질서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미군정과 관련한 대미인식이 그러함은 말할 것도 없다. 먼저, 해방 직후 박헌영에게는 38도선의 분획이라는 현실과 곧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정치가 미군의 점령이라는 조건하에서 가능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미군의 점령만큼 분명하게 국가형태와 생산체제가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은 없다. 이 주어진 명제에 거역하는 것은 곧 진보적 세력의 전면적 붕괴를 초래할 가능성을 크게 안고 있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박헌영이 할 수 있었던 최대의 목표는 볼세비즘의 이론에 따른 권력장악과 사회주의국가의 건설이 아니라 어떻게 혁명적 민족주의세력이 생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여야 했을 것이다.(57쪽, 58쪽)』라고 쓰면서
『이러한 관점에서 조공과 박헌영이 취할 수 있었던 역사적 선택의 가능성과 기회가 구조적 요인에 의해 반드시 봉쇄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기회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다른 정치세력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유리한 정치적 조건에 있었던 해방 직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공산당의 기본노선이 해방직후 처음으로 드러나는 ‘8월 테제’는 그 전략적 선택에서 이미 파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58쪽)』고 쓰고
『조공의 이와같은 혁명적 노선이 당시 밑으로부터 폭발하는 민중들의 혁명적 요구와 열기에 부응하는 것이었음은 사실이다. 나아가 그들은 민중의 혁명적 열기에 부응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요구에 부응한다는 사실이 올바른 리더십의 필요조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올바른 리더십은 최대의 정치적 목표가 상황적 제약으로 불가능할 때, 신속하게 차선의 대안을 발견하고 민중들의 열기가 쇠잔하기 이전에 이를 비축하여, 그 힘을 바탕으로 주어진 현실에서 민중의 변혁요구를 극대화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헌영 노선의 실패는 변혁세력이 더없이 유리한 정치적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을 때 충분히 예견되는 정치적 위기에 대응하는 일에 무감각했던 결과였다.(60쪽, 61쪽)』라고 씀.

(6)『정치적 수준에서 이러한 조건은 사회저변에서의 민중들의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과 결합되면서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9월 총파업과 뒤이은 해방 이후 최대의 민중봉기라 할 10월 인민항쟁으로 발전하였다. 10월 인민항쟁은 군정의 미곡수집정책과 3.1제 소작제도에 반대하는 농정의 실패로부터 발단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촉발적 요인이었을뿐, 군정통치 1년동안 누적된 불만이 터져나오면서 체제에 대한 전면적 저항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친일·친미세력 및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상층을 이루었던 그룹과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그룹이 아닌 다수의 대중들이 참여한 인민항쟁이었다.(61쪽, 62쪽)』라고 쓰고
『10월항쟁 이후 민중들은 2차공위의 속개를 요구하는1947년 3.1절 군중집회, 1948년 2.7구국투쟁, 제주 4.3항쟁 등 수많은 대규모 시위와 파업과 군중집회를 통하여 군정독재와 분단 정책에 항거하였고 이에 대해 군정과 극우보수세력은 탄압과 테러를 강화하는 악순환 속에서 민중세력은 쇠잔하여 갔다. 그러나 변혁을 갈구하는 민중세력과 분단을 통해서라도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극우보수세력 간의 힘의 관계가 역전으로 귀결되는 민중의 비극적 패퇴 속에서 한국전쟁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다.(63쪽)』고 씀.

(7)『이승만 체제가 직면했던 문제는, ‘정당성의 자임’과 ‘정당성의 수용’이라는 개념구분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것이 특정의 정치리더십이 그 자체의 권력의 정당성을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뒤의 것은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선언된 정당성을 수용하는 측면을 뜻한다. 하나의 정치체제의 위기에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되는 ‘정당성의 위기’(legitimation crisis)는 애당초 정당성을 자임할 수 없는 폭력을 통한 지배도 위기의 요인을 내포하지만, 정당성의 내용이나 근거가 매우 취약하여 정당성의 선언이 일반 민중들에게 수용되는 정도가 매우 약하여 이 양자간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경우 또한 위기의 요인이 된다. 양자간의 일치도가 높을 때 그것은 강권력을 통하지 않고 통치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남한의 분단정권으로서의 이승만 정부가 수립 이후 직면했던 위기는 무엇보다도 이 정당성의 위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북한사회의 조건은 이와는 매우 달랐다, 북한에서의 분단국가는 소련군의 점령하에서 수행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일제독립운동에 중요한 뿌리를 가졌던 신생정부의 리더십은 여러 중요 민족해방운동세력들의 지지를 받고 해방후 사회에서의 민중들의 변혁요구를 대체로 수용하고 이에 편승하는 체제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사회주의혁명은 전면적이고도 신속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사회혁명의 토대 위에서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 한국사회 전체의 통일과 변혁을 위한 이론과 전략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북한의 통일-변혁론이었던 민주기지론은 그 시기가 매우 일러 이미 1945년 해방 직후부터 나온 것이다. 김일성의 이 ‘민주기지론’은 박헌영의 ‘브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을 분단조건하에서 지리적으로 확대한 내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미군정통치와 극우세력에 의한 정치적 권력장악으로 난관에 처한 남한내에서의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하여, 한반도에서의 혁명을 반혁명과 혁명을 각각 대변하는 남북한의 대결에 의한 것으로 바꾼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73쪽, 74쪽)』고 쓰면서
『남한정권과 비교할 때, 초기 북한정권에서는 정당성의 자임과 정당성의 수용 사이의 격차가 상대적으로 매우 작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더라도 그러하다.(75쪽)』라고 씀.

(8)『이승만은 전쟁을 유혹할 수 있을만큼 도발적일 수는 있었어도 자력으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리더십과 국내의 지지기반과 미국의 뒷받침을 갖지 못하였다. 김일성은 국내의 민중적 지지기반, 다양한 정치세력들의 대남한 강경정책에 대한 정치적, 물질적, 정신적, 도덕적 지원, 중국공산당의 승리에 의한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자신감 등 모든 대내외적 조건들이 압도적 우세에 있었다. 그의 우세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그를 전쟁을 통한 총체적 승리라는 유혹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하였고, 결국 그는 전면전이라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76쪽)』라고 썼음.

(9) 위 (1)의 귀하의『실전 이성적 관점』에 터잡아 쓴 (2)~(8)에 쓴 바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8. 3.의 2쇄이후 어느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뀐 일 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점을 글로써 발표한 일 있습니까.


7. 귀하는『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1998. 3. 5. 2쇄)』에서

(1)『4월혁명의 중심세력이 학생과 지식인 집단이었다는 사실은 이 정치적 사건의 한계를 나타내는 면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변화를 촉발시키고 기존 정치체제에 위협을 가할 수는 있어도, 집권세력으로서 그들 스스로가 개혁을 주도할 수는 없는 세력이었고,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사회의 어떤 민중적 세력과 연계되어 있지도 못했다.(90쪽)』라고 쓰고
『또 이 시기 학생의 중심세력은 이념적인 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적 요소를 갖지 않았고, 그들의 요구는 기본적으로 반공지배질서에 유해하였다고 보기 어려웠다. 비록 학생들 중의 급진분파가 남북학생회담을 주장하면서 분단구조의 중심문제를 제기하였다 하더라도, 이들의 냉전질서에 관한 인식과 통일문제에 관한 비전은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고, 이를 뒷받침했던 민족주의는 상당히 낭만적인 것이었다.(90쪽, 91쪽)』고 쓰면서
『4월혁명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4월혁명은 분단구조라는 틀을 바꿀 수 없는 분명한 한계를 가졌다.(93쪽)』고 씀.

(2)『해방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한국사회는 어떤 성격의 근대화를 경험하였고 어떤 성격의 국민국가를 발전시키게 되었나? 이 과정에서 남북한의 특성과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이 여기에서 논의하였던 핵심적인 주제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민중이 주도하는 밑으로부터의 근대화의 좌절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한국민에 의한 근대화가 실패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민중이 주고하는 능동적 근대화, 진보적 근대화에 실패하였다는 것을 말한다.(101쪽)』고 쓰고
『우리가 한국현대사를 하나의 비극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이 민중성의 지속적인 좌절과 실패 때문이었다. 이 실패는 직접적으로 현대사의 최대의 비극이라 할 민족독립국가 형성의 실패, 즉 분단국가의 형성으로 귀결되게 되었다.(101쪽)』라고 씀.

(3) 위 (1), (2)와 같은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8. 3.의 2쇄 이후 어느 시점에서 바뀐 일 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점을 글로써 발표한 일 있습니까.


8. 귀하는『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1998. 3. 5. 2쇄』에서

(1)『1993년 후반부터 국제정치에서 가장 큰 이슈의 하나로 등장한 북핵문제를 다루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이 정권의 개혁방향에 매우 부정적 효과를 미치게 된 것은 결국 대북정책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북한정권이 자신들의 존립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핵무기를 수단으로 삼는 극도로 위험스러운 전략을 택하였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 아니다. 사실 핵이슈의 제기 그 자체가 한국의 민주화과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이 긴장을 완화시키고 화해를 도모하기보다는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는 공격적, 강경정책으로 나가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해악적인 효과를 갖는 위험한 방향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결국 핵위기는 대북정책의 일반적 노선에서 도출될 수 있는 부차적인 문제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268쪽, 269쪽)』라고 쓰고 있음.

(2) 위와같은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8. 3.의 2쇄 이후 어느 시점에서 바뀐 일 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점을 글로써 발표한 일 있습니까.


9. 귀하는『사회와 사상 1991년 가을호』중『한국사회민주변혁의 새로운 모색을 위하여』에서

(1)『현존사회주의의 실패는 기본적으로 1917년 이래 70년 이상 시도되어온 새로운 사회건설의 실험이 사회주의의 현실과정에서 자체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존 사회주의의 실패가 결국 생산력 발전수준과 생산관계간의 괴리, 대중들의 정치의식 수준의 저급함, 사회주의적 시장원리에 대한 불철저한 고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실종과 그것을 대체한 관료주의적 경직성 등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주의 자체의 문제로 된다, 철학과 이론수준의 것이건 그것의 현실화 과정 수준의 것이건 말이다. 현존 사회주의의 실패를 이렇게 본다면 최근의 사태는 단순한 국제정세의 변화차원에서만 이해할 수는 없게 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70년 이상 시도되어온 다양한 형식의 사회주의 건설의 실험을 총괄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이론의 재구축’이라 불릴 수 있는 대단히 곤혹스럽고도 어려운 작업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과연 우리가 무엇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인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다. 다만 현실과 유리된 앙상한 ‘교조’(敎條)만으로 세계를 해석해온 거듭된 잘못만은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303쪽)』라고 써서 사회주의『이론의 재구축』을 감당해야 한다고 쓰고 있음.

(2)『그간 진보적 학계에서 진행되어온 정치학 연구의 방법론적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국가는 사회의 구조적 성격을 재생산하는 결절점이기 때문에 이행을 모색하는데 있어서 필연적인 극복대상이다. 둘째, 한국의 국가는 외세라는 변수를 항상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나, 그것은 ‘경제적 현상’으로 협애화되지 않는 총체적인 제국주의에의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 셋째, 국내적 토대의 규정성은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의 실현과 아울러 총자본으로서의 국가역할을 독점체 중심의 종속적 자본 축적을 위해 기능하도록 강제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토대와 상부구조의 조응관계가 서구사회와 같이 단일한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여타의 구조적 변수들과의 연관속에서 국가의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305쪽, 306쪽)』고 씀.

(3)『토대의 변화 및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계급투쟁과 그것이 결과하게 되는 정치적 변화 사이의 관계는 정치적 계급관계를 매개해서야만 연관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정치적 현상이나 운동의 전개에 필요한 해당시기의 정치·사회적 조건 및 그속에서 활동하는 제 정치세력들간의 역학에 대한 연구는 바로 그 매개영역에 국한된 특수한 연구주체로서 특화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람시는「옥중수고」(제1권, p.13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정치는 경제와 동일화되는 한에서만 영속적인 행동으로 되며, 따라서 영속적인 조직체를 창출하게 된다. 그러나 또한 정치는 경제와 다르다. 우리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이야기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정치적 정열’은 ‘영속적이고 유기적인’ 경제생활의 지반 위에서 생겨나면서도 그 지반을 초월하여 작열하는 듯한 정서와 열망을 가동시키는데, 그속에서는 인간 개개인의 생명에 대한 고려조차도 개인적인 이윤 따위의 법칙과는 다른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다.

즉 (사회적) 계급투쟁은 그 본질적 의미에서 정치적이나 정치의 변화와 사회적 계급투쟁이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변화, 혹은 운동의 전진으로서의 정치지형의 진보적 변화와 권력의 장악여부는 사회적 계급투쟁에 기반하면서도 그것과 바로 직결되지 않는 정치적 매개영역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활동주체들의 역학관계속에서, 즉 정치적 계급역관계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계급투쟁이 아무리 정치적 쟁점과 맞물리면서 전개된다 하더라도 그 계급투쟁을 정치의 영역으로 매개하는 고유한 활동주체의 지속적인 노력없이는 곧바로 투쟁의 정치적 성과를 획득할 수 없다. 따라서 운동의 진전이 결국 권력의 장악을 둘러싼 정치적 영역에서의 결과로 가시화된다는 점을 승인하는 한, 정치와 운동의 전개에 관한 올바른 분석을 위해서는 사회적 계급투쟁과의 상호관련속에서 구분되는 정치적 계급역관계라는 매개영역을 반드시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첫째 과도한 전략주의적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잇다. 그간의 정치경제학적 논의는 주로 한국사회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밝히고, 그 본질적 운동법칙을 논증한 후, 그에 따라 현재의 기본구조를 지양할(그 기본구조로부터 바로 도출되는) 변혁운동의 기본목표와 그에 다다르기 위한 계급적 세력배치를 논하는 것으로 일관해옴으로써, 구체적인 정세분석이나 당면시기 운동의 구체적인 실천지침을 모색하는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운동을 ‘살아있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제약해왔다.(306쪽, 307쪽)』라고 쓰면서
『둘째는 운동의 전개를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객관조건과 주체역량의 평가가 한층 정확해진다는 점이다. 사회적 계급투쟁의 영역과 정치적 계급투쟁의 영역이 상호관계를 가지면서도 구분될 때 우리는 비로소 기층 대중운동과 상층의 정치적 운동역량을 구분하여 파악할 수 있다.(307쪽)』고 쓰고 있음.

(4)『다음으로 한국사회의 중·장기적 발전전망과 그에 따른 운동적 대안의 제시 문제를 검토하기로 하자. 현재도 일부 그런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검토한 한국사회의 변화추세를 개괄할 때, 더 이상 70년대류의 이른바 ‘임박한 파국’이나 ‘대회전’과 같은 식의 ‘결정적 위기론’으로 중·장기정세를 전망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히려 단기적으로나 중장기적으로 지배세력의 정치적 지배력이 계속 강화되어가고 중간층의 체제내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반면 민족민주진영의 운동력과 대중장악력은 경향적으로 저하될 가능성마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308쪽)』라고 쓰고
『문제의 본질은 이렇다. 모든 사회·정치행위가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에 근거해야 하듯이 운동 또한 그러해야 하며, 그 어떤 행위보다 더욱 철저하게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민주진영이 현실에 투철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기반한 당면의 실천지침과 그것의 현실화 과정에서 획득될 수 있는 과학적인 중·장기전망을 대중적으로 설득력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민족민주진영은 무엇보다도 먼저 현실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현실의 변화에 대한 과학적 해석을 해내지 않으면 안되며 이를 위한 사상·이론의 혁신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단계 민족민주진영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지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다.(309쪽)』라고 씀.

(5)『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제목 아래
『문제가 ‘이론의 재구축’으로 모아졌으므로 불가불 이후의 논의는 이론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로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다. 앞에서 방법론의 차원에서 정치이론의 고유영역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지만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발견된 어떤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정치 3부작(「프랑스내전」「프랑스에 있어서의 계급투쟁」「루이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관류하는 분석의 역동성은 정치이론의 상대적 독자성이 문제의식이나 방법론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미 당대의 소소한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통해 구체적으로 체현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당면의 실천지침을 수립하기 위해 러시아의 당대 현실을 분석하고 있는 레닌의 정치분석에서도 이 정치이론의 상대적 독자성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309쪽)』라고 쓰면서
『1990년대 한국에 이들의 이론이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문제의식과 방법론 자체가 속류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조적 적용으로 인한 이론적 황폐화로 인해 결과적으로 부정된다면, 그것은 ‘이론의 재구축’이라기보다는 ‘이론의 무조건적 제기’로 될 것이라는 점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비교적 현재의 우리 상황과 유사한 조건에서 정치이론의 ‘상대적 독자성’을 방법론적으로 고민하면서 그것이 갖는 실천적 함의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해온 그람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주지하다시피 그람시이론의 출발은 1910년대 러시아와 다른 유럽사회에서의 민주변혁의 조건과 경로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그람시가 정치영역을 여타의 영역과 상대적으로 독립된 것으로 이해한데에는 그것을 강제한 서구사회의 사회구성체적 특질과 그에 따른 정치영역에서의 운동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국가 강권력의 효과를 최대화시키는, 그러나 그 스스로는 유형·무형의 진지로서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패권적 지배력의 실질적 구현체인 시민사회의 존재, 그람시가 발견한 이 시민사회의 존재야말로 러시아를 유일한 예외적 존재로 하는, 1910~20년대 민주변혁운동의 전반적 실패를 해명하는 결정적 열쇠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람시에게 있어 러시아식의 기동전을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것은 강고하게 구축되어 있는 수많은 진지의 맨 외곽에 있는 파수병을 공격하면서 승리를 전망하는 어리석은 단견으로 치부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외곽의 파수병이 현대화된 장비로 무장된 잘 조직된 강권력일 경우 기동전식 공격은 시작조차도 제대로 해 볼 수 없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람시의 이론을 ‘패배의 정치학’으로 규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평가할 때 일면적 진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그람시가 대단히 장기적인 변혁경로를 제시함으로써 그 변혁에 소요되는 시간이 지배세력과 변혁세력간의 정치력의 차이를 더욱 크게 넓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장기적 진지전으로 나아가게 될 경우 시간은 양자 모두에게 가능성을 열어주게 될 것이나, 적어도 현재까지 나타난 바로 미루어볼 때 그 시간을 지배세력보다 변혁세력이 더 효과적으로 잘 활용했다는 증거는 없다. 지배세력의 매우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현실추수적 적응력에 비해 변혁세력의 교조적 풍토와 변화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노정되는 소모적인 논쟁은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를 ‘패배의 이론가’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람시가 긴 호흡으로 변혁을 사고한 것이 결코 변혁경로의 대책없는 수정이나 당면 실천에 대한 방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어떤 실천가 못지 않게 당면의 실천적 과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진지전이라는 변혁경로로부터 합법칙적으로 도출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람시의 이러한 노력은 그의 생전에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사후에 더욱 폭넓은 재검토의 대상으로 부각되면서 전승되고 있다. 60년대 이래 다양한 형태로 분화·발전된 정치이론 및 국가론 연구의 성과는 그람시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만큼 그람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람시가 연구사상 하나의 큰 계기로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그람시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람시가 우리가 앞으로 직면하여 해결해야만 될 모든 사안에 대해 해답을 주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람시는 그밖의 모든 이론가·활동가들과 마찬가지로 문제의식과 방법론에 있어 정치적 실천적 함의를 줄뿐이다.(310쪽, 311쪽)』라고 쓰고 있음.

(6)『대안의 모색을 위하여』라는 제목 아래
『한국사회의 중·장기적 변화추세를 감안할 때 그람시가 주는 정치적 이론적 실천적 함의의 핵심은 다음 세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시민사회와 합법정치영역에 대한 문제이며, 둘째는 기동전을 포섭한 지지전이라는 민주변혁의 전략적 경로의 문제히고 셋째는 ‘현대의 군주’이자 지적 도덕적 개혁의 조직자인 정치정당의 문제이다.(311쪽)』라고 쓰면서
『합법·정치공간이란 처음부터 비합법·반합법·공간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서 그 존재 자체도 합법성의 범위와 수준을 결정하는 현실정치역학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회 및 각급 대중단체들의 활동의 장인 시민사회가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을 경우, 합법정치공간에서 폭이 넓어지고 그에 따라 합법정치공간에서늬 정치활동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므로 현단계 한국사회는 시민사회의 영역이 점차 넓어져가면서 그에 따라 합법정치공간의 폭 또한 넓어져가는 추세에 있다고 할 수 있다.(312쪽)』라고 쓰고
『다음으로 민주변혁의 전략적 경로에 대해 검토해보자.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강고한 진지들에 의해 둘러싸인 사회에서 기동전의 방식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경험적으로 입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시민사회가 패권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회의 경우 진지전의 방식이 민주변혁의 전략적 경로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동전은 전면 폐기되어야만 하는가? 그람시는 이에 대해 “‘모든 것’이었던 기동전은 이제 단지 ‘부분적인 것’으로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진지전이라는 전략적 경로가 기동전의 완전한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동전이 진지전에 의해 올바르게 배치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양자의 체계적 결합에 대한 고려는 향후의 실천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견지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312쪽, 313쪽)』라고 소개하여 쓰고 있음.

(7)『철학과 이론의 혼란보다 더 빠르게 정치역학이 변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대중이 변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강경대의 뒤를 이른 10명의 죽음과 그로 인한 5월정국의 긴정이 정원식 총리서리의 ‘봉변사태’로 인해 급반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정치역학의 변화 속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확실히 사태는 속도경쟁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누가, 어느 집단이 이 변화에서 한발 앞설 것인가? 한번 차이가 나면 그 차이가 가속도로 벌어지게 되는 속도경쟁에서 이미 벌어져 있는 차이를 어떻게 따라잡을 것인가? 선두를 지키기도 어렵지만 따라잡기도 어렵다. 그러나 차이가 벌어질수록 따라잡는 것이 더 어려워질 것만은 분명하다. 언젠가는 따라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나 언젠가는 선두가 지쳐쓰러질 것이라는 신념도 경쟁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차이가 좁혀지는 것은 아니다. 주법을 바꾸고 보폭을 다시 조절하는 혁신을 위해 지금은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때이다.(314쪽)』라고 씀.

(8) 위 (1)의『이론재구축』의 일환으로 (2)~(8)을 쓴 바 귀하의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은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1991. 가을이후 어느시점에서 귀하의 그러한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이 바뀐 일 있습니까.
바뀌었다면 바뀐 점을 글로써 발표한 일 있습니까.


10. 위에서 1 내지 9항에 걸쳐 각 인용한『문장』이 혹시라도 거두절미하고 왜곡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면 인용안한『문장』을 제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1. 귀하는 헌법 제66조 제2항, 정부조직법 제4조, 대통령령 제 14667조에 따라 정책기획위원장에 취임한 후 대통령의 자문에 응함에 있어 위 1 내지 9항과 같은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을 바탕으로 하여 자문에 응한 바 있습니까.


12. 귀하는 위 1 내지 9항과 같은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을 바탕으로 앞으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할 예정 또는 의사입니까.


13. 귀하는 위 1 내지 9항과 같은 인식과 판단 또는 의견을 고려대학교 학생 기타 젊은이를 가르치는 곳에서 가르쳐 왔습니까.


14. 귀하는 우리 헌법의『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지합니까.


15. 귀하는 우리헌법 제3조 및 제39조에 의하여 국민의 한사람으로서『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생각하고 이행할 의사이십니까.
아니면『국방의 의무』를 생각하거나 이행할 의사가 없으십니까.


(이 서신은 국민 모두가 읽고 생각하는 여론의 광장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어서 공개됨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1998.       11.     10.

헌 법 을 생 각 하 는 변 호  사 모 임
회            장        정   기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