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4,500만의 인권이 걸린문제(국가보안법 제7조 제10조를 삭제하자는 논의에 대하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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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헌변 | 등록일 | 2000-11-04 |
출처 | 조회수 | 3536 |
변호사 임 광 규
1. 우리나라에서 전개되는 문화투쟁(Kulturkampf)
1870년대에 맹렬하게 진행된 독일(프러시아)와 독일내 천주교회사이의 문화정신과 충성심을 둘러싼 투쟁에서 유래한 『문화투쟁』은 이질적인 사상이 만나는 곳에서는 세계 어디서든지 일어나는 것이다.
2,200여년전의 진시황제가 여러사상의 서책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땅에 파묻어 죽이는 문화투쟁을 벌였는데 1966에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철없는 청년들에게 아이디어를 편식(偏食)시켜서 동료공산주의자들조차 자본주의 노선자(走資派)라고 타도하는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의 문화투쟁을 벌였다.
1945. 8.에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당장 준비하기 시작한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준비에 병행하여 작가와 신문기자를 프로레타리아동맹에 묶은 것은 남한에서 같은 해 9.에 결성한 조선프로레타리아 문학동맹, 프로레타리아 미술동맹, 프로레타리아 음악동맹과 함께 한국인을 상대로한 문화투쟁의 시발이었다.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보위무력인 70만 정규군과 2,000의 탱크와 8,000의 포시스템등 전전투력의 70%가량을 휴전선으로부터 100km이내 남쪽에 배치해놓고 이 무기들을 옮기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시간당 500,000발로 대한민국의 수도권을 쑥대밭으로 할 무력의 배치와 그 묵시적 명시적 위협만으로 남반부 타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북한의 지도부가 아니다.
북한을 이른바 「민주화기지」로 삼은 이른바 「인민민주주의」세력의 문화투쟁이야말로 무력과 함께 북한지도부의 양대지주(兩大支柱)이다.
이 세력의 문화투쟁에서 빼놓을수 없는 도구가 언어전술(言語戰術)이다.
「언어」란 먼저 자주 쓰는 사람과 동일화 현상이 일어나므로, 인간의 「행복추구의 자유」「신앙의 자유」「언론의 자유」「재산소유의 자유」「기업인의 창의」를 탄압하는데 거들은 자들을 반복하여 「진보적지식인(進步的知識人)」이라고 우기면서 자유경제를 옹호하는 자들을 「기득권 수구세력」「혁명반대의 반동분자」로 되풀이하여 동어연속(同語連續)을 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에 확고히 서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피다바」에서든 「꽃파는처녀」에서든 지주의 자식은 나쁜 놈이어야하고 자본주의를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친일파이어야 한다.
남한의 자유로운 토양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류(類)」가 문화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도 언어전술을 잘 구사하고 있다.
6. 25의 처절한 고난을 겪어 「세계적 냉전의 고통」을 누구보다 심하게 느끼는 우리 국민을 향하여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에 대비태세를 잘 갖추자는 사람에게 「냉정세력」이라는 이름을 갖다붙여준다 그것에 계속되풀이 떠들어 댄다.
조심없이 북한시스템과 섞어서 자유와 번영의 기초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훼손해서 안된다고 우려하는 사람에게 「반통일」이라고 계속 되풀이 매도한다.
한맺힌 분단의 아픔을 안은 시민들의 감도(感度 Sensitivity)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다.
『태백산맥』에서 대한민국의 경찰관은 타락한 부정뇌물범일뿐아니라 여자를 농락하는 치한(癡漢)이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 남노당 빨치산은 정의감에 불타며 가난한 소작농을 위한 묵묵한 희생자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사회적 리얼리즘』과『혁명정신』을 좋아하는 청소년에게는 처절하게 굶어 죽어가는 함경북도의 동포는 존재하지 않으며 20만 수용소 군도의 처참한 인권유린도 관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대한민국안의 용공분자들이 수행하여 온 반국가적 학생운동, Membership Training, 비뚤어진 농촌활동, 노사분쟁을 격화시킨 위장취업의 일관된『사회주의 리얼리즘』사고방식이다.
공산주의나 민족사회주의(나찌)는 지휘부가 선동선전으로 인민을 휘어잡는 시스템이다.
이들은 자기들의『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우월한 민족발현』을 위하여는 진실을 조명하고 인간애를 승화시키는 문학작품을 제일 미워한다. 진실과 인간애의 문학작품은『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우월한 민족의 정복투쟁』의 선동성을 약화 파탄시키기 때문이다. 탄압받던 솔제니친의『암병동』『수용소 군도』와 불태워지던 레마르크의『서부전선에 이상없다』의 바로 그 진실과 인간애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우월한 민족의 정복투쟁」의 적인 것이다.
최근의 6.15.선언 이후 남북의『통일기운』을 떠드는 사람들의 말과 얼굴과 태도를 보면 함경북도의 굶어 죽어가는 인민과 수용소 군도의 갇힌 인권을 전혀 무시하는 냉혹한『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얼굴이라는 것을 느낄수가 있다.
조선일보가 휴전선 100km 이내의 전진배치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하드웨어와 훈련강도를 지적하고, 굶어 죽어가는 동포와 처참한 수용소의 인권을 조명하는 것이『사회주의 리얼리즘』에게는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화투쟁이 1970년 후반부터 시작되어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자유를 향락 구가하고 있다.
1991. 5. 31.의 우리 국가보안법의 개정으로 이러한『문화투쟁』을 형벌로 처벌하기가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대부분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우리 국가보안법은 독일보다도 그 처벌조건이 너무 까다롭다. 아무리 대한민국의 청소년과 소년, 소녀를 선동하여도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경우』가 아니면 처벌할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은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2. 국가보안법 제7조는 별첨『한국 국가보안법과 독일 등 외국법의 비교표』에서 보듯이 독일에서 처벌하는 행위패턴을 처벌 못하게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위태(危殆)롭게 하는 구체적인 선동, 허위모략(법규정 제목은 찬양고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선동, 모략임)의 경우에 한하여 처벌하고 있다.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법원 판사들과 법학자들은 흔히 20세기초에 30년간 미국 대법원판사에 재직하던 유명한 홈즈(O.W.Holmes)가『극장에서 불이 났다고 말하는 것』을 판결에 뜬 것을 예로 들고 있다.
함부로 한『말 한마디』의 비물질적 의사전달이 연극을 관람하고있는 관객이라는 공동체에게『심리적 변동』을 일으키는 관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예로 드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생각을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만 형사처벌을 해야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와 자유에 관하여 깊은 통찰력을 가진 판사들이나 법철학자들의 통설이기도 하다.
이를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Clear and Present Danger Doctrine)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우리국가보안법 제7조는 1991. 5. 31.에 인권의 최대보호한도인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수용하였다.
북한의 이른바 「민주화기지」로부터 국가보안법을 없애자는 선동선전이 있는 것은 그렇다치고 남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화투쟁은 이제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을 대한민국에 가격(加擊)하는 사람에대한 처벌조항도 폐지하자고 투쟁단계를 놓이고 있다.
4,500만의 인권에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을 초래하는 「선동 모략」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 「선동 모략」자의 인권을 철저히 보장하자는 논리를 높이 들고 있다.
법일반논리의 보편적인 균형교량(均衡較量)이나 선량한 시민의 사회의 방의기제(防衛機制)를 타파하자는 아주 인권지상논(人權至上惀)같은 주장을 거세게 밀고 나오고 있다.
국가보안법 제7조가 우리민족의 자유체제에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따져보자.
서해 연평도, 백령도를 잇는 북방한계선에서 전투위기가 매우 높아지고 적군이 대한민국 공동체에게 비정상적인 위협을 계속하는 경우를 가상해 보자.
해군, 해병대 장병이 일선으로 몰려가는 부둣가에서, 우리의 북방한계선은 국제법위반이며 동포인 적군병사에게 사격하는 것은 민족범죄라는 등 호소의 데모를 반복하는 지식인들이 있다고 하면, 이는 대한민국의 명운(命運)과 안전을 명백히 그리고 현존하게 해하는 것인데, 이를 언론자유라고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가.
『국가의 존립, 안전, 기본질서를 명백하고도 현존하게 해하는 발언이나 동조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우리 국가보안법 제7조에서 비로소 새삼 규정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어느 나라 민주제도의 역사에서도 있는 형사제도 이다.
남북전쟁이 발발한 미국에서 링컨 대통령은 병사들을 향하여 북군(Union)에 참전하지 말라고 박진하게 글쓴 언론인을 처벌해야한다고 하면서 자유언론의 침해라는 비판에 대하여,『나이 어린 병사가 전투공포로 적전도망(敵前逃亡)하다 잡혀 사형판결을 받는데』적전도망토록 동기주입(動機注入)한 사람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말아야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우리의 국가보안법 제7조는 대한민국 영토(헌법 제3조)의 수호와 안전, 그리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전문)를 끊임없이 공격, 전복, 와해하려는 세력에 대처하는 방위시스템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타도공격, 전복활동, 와해공작을 막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설득을 할 수가 없다. 우리 자유민주체제는 이미 승리한거나 마찬가지이므로 우리에 대한 타도공격, 전복활동, 와해공작은 되지도 않을 일이므로 안심해도 좋다는 지식인에게 알려주고 싶은 역사가 있다.
무력(武力)만이 나라를 전복할 수 있고 와해시킬 수 있다는 판단은 수많은 인종과 나라가 생존경쟁을 벌여가면서 흥하고 사라져 간 인류의 역사를 읽어보면 아주 어리석은 발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오히려 정보모략전(情報謀略戰)에서 전쟁이 결판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패배하여 무너진 나라들의 지도자와 백성들을 살펴보면, 나라 공동체가 적의 전복공작(顚覆工作) 와해활동(瓦解活動)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하고도 무심했던 어리석음이 반드시 복재(伏在)하였던 것을 전쟁사가(戰爭史家)들이 쓰고있다.
국가공동체에『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으로서 헌법시스템의 파괴에 조력하는 행위에는 교사(instigation), 선동(excite or agitation), 선전(propaganda), 세뇌(brainwashing)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마음속의 사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1919년 Schenck v. United States 판례를 보면 1차대전 참전을 반대하여 군입대를 하지 말자고 전단을 뿌린 Schenck에 대하여 적용된 간첩법(Espionage Act)에 관하여 홈즈(Holmes)판사는『자유로운 언론의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자유언론은 극장에서 나지 않은 불이 났다고 소리내는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나라가 전쟁중인때 Schenck와 같은 표현은 국가의 전쟁노력에 방해되며 병사가 싸우고 있는동안 용납될 수 없다』고 유죄확정판결을 쓰고 있다.
역시 1919년의 Abrams v. United States 판결을 보면 미국정부가 러시아에 파병하는 것을 반대하여 총파업을 호소하는 팜프렛을 뿌린 Abrams에 대하여 다수의견을 쓴 클라크(Clarke)판사는 소요법(Sedition Act)을 적용하면서『전쟁, 소요, 폭동, 혁명의 선동』을 행하는 것의 처벌은 정당하다고 확정판결을 쓰고있다.
1927년의 Whitney v. California 판례에서도『언론의 행사는 국가를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제약을 받아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들 판례의 기본틀은 지금까지 번복된 일이 없다. 당시의 미국의 경우, 오늘의 대한민국의 국가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안전한 사회인데도 이런 판례가 확립되었다는 점에 깊이 생각이 미쳐야 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화투쟁이 국가보안법 제7조에 여간해서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투사들은 이제『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은 방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당당히 주장하면서『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사회방위기제(社會防衛機制)인 국가보안법 제7조마저 붕괴시키려고 하고 있다.
3. 국가보안법 제10조는 헌법 제39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름다운 시골마을에 강도가 들었다면 동네 사람들이 불침번에 나서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자유체제를 향유하는 시민이 자기와 4,500만 공동체를 허무는 간첩을 눈으로 보고도 팔짱끼는 자유를 구가하겠다는 것은, 강도가 들어와도 나는 불침번의 의무를 이행할 생각이 없는 것보다 더 심함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다.
『불고지죄』는 국가보안법 제10조에서 정한 것인데, 대한민국을 타도하려는 무장조직, 무장폭파, 군사기밀 간첩, 암살, 납치 등 행위나 계획을 보고 들은 국민은 당국에 신고할 충성의무를 규정한 것이다. 모든 국민은 헌법 제39조에 의하여 국방의 충성의무를 지고 있다.
국가는 시민들의 충성심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리이다.
대한민국 국민(20대 남자)은 병역법 제3조 제86조 제87조 제88조에 따라『신체검사를 받지 않거나』『소집을 받고도 나오지 않거나』등 부작위에 대하여 충성의무 불이행으로 처벌받게 되어있다.
이것은 전쟁터에서 살해당하는 위험을 무릅쓰라고 국가공동체가 충성의무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25세의 여성이나 56세의 남성인 대한민국 국민이 내일밤 군지휘관들이 회의중인 군용시설을 고성능 폭탄으로 폭파할 임무를 띄고 이웃집 다용도실에 잠입한 간첩의 계획을 알면서 경찰파출소에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고 하자.
다음날 밤에 이 군용시설이 폭파되고 주요 지휘관이 살상되었다고 하자. 부작위로 그냥 보고만 있으면서 신고를 하지 않은 시민을 어떻게 볼것인가.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사살될 위험을 무릅쓰라는 충성의 의무와 가까운 경찰파출소에 가서 신고하거나 전화 한마디로 신고하는 수고를 하라는 충성의무를 비교할때 어느 것이 시민의 희생을 더 요구하는 것인가.
헌법 제39조에 터잡아서 그런 신고조차 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자는 조항이 바로『불고지죄』조항이다.
다른 사람 개인에대한『위해의 임박(危害의臨迫)을 보고도 팔짱끼고 구경해도 괜찮은 자유, 이를 구출할 수고(救出할手苦)를 아끼는 부작위의 자유(不作爲의 自由)에 관하여는 일찍부터 법철학자들 사이에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국가공동체에 대한『위해의 임박』에 처하여서까지 어렵지 않은 수고를 아낄 부작위의 자유는 어느 나라에서나 훨씬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 한반도의 대한민국 헌법은 역사상 매우 위험스럽고 예측하기 어려운 반국가단체로부터 대량 살상무기로 위협을 받고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불고지』라는 부작위를 처벌하지 말자는 주장은 깊은 법철학적 근거없이 왜 가만히 있는 사람까지 처벌하느냐는 어법(語法)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시민들을 향하여 반국가단체가 꾸준히 요구한다고 해서, 나라의 적대세력과 화해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통일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불고지죄』를 없애자는 주장은 우리의 헌법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려도 좋다는 주장에 가까워 깊은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월남의 죄익들 이른바 운동가들은 제일 먼저 정부편도 아니고 베트콩편도 아닌 중립적인 사람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하고 옹호하는데서부터 시작했다. 제 나라의 안전에 팔짱끼는 시민들을 대거 만들어 놓으니 월남이 망하지 않는 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일 일것이다. 내일 대한민국의 군지휘관들을 폭파할 간첩이 옆집에 있는 것을 알고서 전화 한마디의 신고도 않는 그런 시민이 그 간첩이 노리는 전체주의 체제를 막아주는 대한민국의 자유체제속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겠는가. 대한민국에 대한 전체주의의 전복공세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대한민국의 자유체제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있다. 전체주의측에서 볼때에는 자유체제의 수호자들이 줄어들고 팔짱끼고 입다문 중립주의자들이 늘어나야만 전복공세가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전체주의 지도부에서는 악을쓰고 국가보안법 제10조를 「반민족적」「반통일적」규정이라고 욕하고 남한의 문화투쟁가들은 「인권유린」규정이라고 합창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불고지제는 별첨『비교표』에 쓴바같이 통일 후에도 물론 존속하고 있는데 간첩이나 폭동, 간첩지원 뿐아니라 독일의 경우에는 마약, 위폐, 인신매매에 대해서까지 고지의무를 규정하고 이를 고지하지 아니하면 처벌받게 되어있다.
국가보안법 제10조의 불고지죄는 그 부모자식사이 형제사이의 밀고를 권장하는 인륜에 반하는 규정이라는 주장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제10조 단서에 친족관계가 있으면 그 형을 감경 면제한다고 규정하고 있거니와 실제로 대한민국 검찰에서 부모자식사이는 거의 전부 처벌하지 않아 왔다.
이 점에 관한 미국의 판례를 참고로 보자.
미국의 하우프트(Hans Haupt)라는 사람은 2차대전 당시 사보타지의 임무를 띈 아들을 집에 재워주고 공장직장을 얻어주고 자동차를 사도록 도와주었다고 기소되어 범인은닉죄가 아닌 반역죄(treason)로 유죄판결 받았는데 미국 대법원은 1947년에『아버지의 자연스러운 아들 보살피는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8대 1의 다수로 그 유죄를 지지한바 있다.
『사회전체』『국가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무겁게 여기는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러니까 미국은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판례는 그후 번복된 일이 없다.
미국 대법원은 2차대전 때의 일을 가지고 7년이 지난 1952년에 이르러서도, 일본계 미국시민으로서 자기 조상의 나라 일본에 머무르던 중에 미국과 일본사이의 전쟁으로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부득이 일본국법에 순종했다는 주장을 하는 Kawakita에 대하여『미국 시민은 그가 어디 거주하든지 2중국적자라 하드라도 미국에 대한 충성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판결하여 유죄 확정시킨바가 있다.
4.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제10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하는 선동죄(제7조)를 폐지해야한다는 주장 가운데 근본적으로 헌법정신에 어긋하는 논리들이 섞여있다.
첫째, 북한 당국이 대한민국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서명하였고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으며 대한민국이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고 금강산관광까지 가고 있으니 북한을 주권국가로 보아야한다는 논리가 있다. 그러나 일정 지역을 군사력으로 장악하고 그 주민에게 권력을 행사 할 정도의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을 국제법 전쟁법규상 교전단체로 취급하여 상호협상 피차교류를 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이 대한민국으로서 북한 지배집단을 국가로서 인정하는 것이 되는게 아니다.
유엔이 평화정착의 차원에서 북한을 유엔에 가입시켰다 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에 관하여 헌법재판소의 1997. 1. 16.자 판례(92헌바6, 26, 93헌바34, 35, 36)가『북한이 납․북한의 유엔동시가입, 소위 남북합의서의 채택․발효 및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등의 시행 후에도 적화통일의 목표를 버리지 않고 각종 도발을 자행하고 있으며 남․북한의 정치, 군사적 대결이나 긴장관계가 조금도 해소되고 있지 않음이 현실인 이상, 국가의 존립․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신․구 국가보안법의 해석․적용상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보고 이에 동조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하는것 자체가 헌법이 규정하는 국제평화주의나 평화통일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고 설시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둘째,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하여 북한이 「파괴적 적대자」이냐 아니냐에 대하여 따지지 말자는 논리가 있다. 북한은 포용해야할 동포이며 같은 민족이므로 적대세력으로 보아서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헌법시스템 즉 인권과 행복추구, 언론자유, 종교의 자유, 신체의 자유가 보장되고 재산권이 보호되며 생활과 경제활동에 자유와 창의가 기본인 그러한 우리의 헌법시스템을 선전, 간첩침투, 무력위협, 지하조직으로 타도하려하고 그래도 안되면 불바다의 전쟁도 할 수 있다는 세력이 우리헌법의 파괴적 적대자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적인가.
셋째, 외국의 국제기구나 외국의 인권단체가 한국의 국가보안법을 비판하고 있으니 마땅히 고쳐야하지 않느냐는 논리가 있다.
걸핏하면 외국의 인권단체가 비판하니까 우리도 이 비판에 순응해야한다고 말하는데, 북아일랜드 사태에 대한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의 혹독한 비평, 또 미국의 사형제도나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 없는 폭동진압 방법이라든가 법규적용, 그런것에 대해서 이미 계속 인권유린이라고 비판을 하는데도 영국이나 미국은 자기 사회에 필요한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유엔 인권기구가 가끔 발표하는 국가보안법 비판은 판례가 아니고 일종의 ‘수사(修辭)’이다. 외국의 예를 가지고 이랬으면 좋겠다, 고쳐라 하는것에 대해 우리가 우리 국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비판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것처럼 논하는 것은 실상 사대주의적인 발상이기도 하다.
판사가 3심에 이르도록 쌍방을 심리하고 고뇌(苦惱)한 끝에 내린 그 사회의 판례(判例)와 나라밖에서 일방의 진정서를 읽고서 고민 없이 발표하는 수사(修辭)를 구별하지 못할때에, 우리사회는 행인의 말에 쫓아 당나귀를 함께 메고가는 줏대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별첨 『비교표』에서처럼 독일이 자유체제의 적대자에 대한 처벌을 더 엄하게 하는 법제를 유지하는 데도 그보다 훨씬 관대한 한국에 대하여 일부 국제기구나 일부 외국인권단체가 비판하는 것은 그 이유가 있다. 독일의 헌법학자들 형법학자들은 국제기구나 인권단체들의 주도적인사들의 문화적 배경과 학문적 실력을 손바닥에 놓고 잘 알고 있으면서 토론장에서 그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그들의 잘못된 논리를 교정해주고 논박한다고 한다. 한국의 법률제도를 옹호하는 법률관료들이나 법학자들의 헌법식견과 법철학 지식 그리고 유창한 외국어 구사능력이 이점에서 상당한 핸디캡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실상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나라가 저개발이던 1950년대에 우리는 이승만박사, 변영태씨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법률관료들이 국제회의에 가서는 어떤 처신과 노력을 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넷째,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악용되어 무고한 시민이 억울하게 처벌받은 일이 있으니 국가보안법은 개정 또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
검사가 잘못 기소하거나 판사가 오판을 하는 차원과, 법 자체가 국가와 국민에게 해롭다는 것을 혼동시키는 논리의 비약이다. 오판의 역사는 인류의 법제도만큼 오래되었으나 오판 때문에, 법 자체를 없애자는 논리는 오늘의 우리사회에서나 듣는 현명하고 신중하지 못한 발상이다.
국가보안법뿐 아니라 모든 형벌법규의 적용에서 법률인들은 인권옹호를 더 철저히하고 신중한 사실인정을 하는 노력을 계속해야할 것이고 우리의 현대 사법사(司法史)도 그러한 길을 걸어왔다.
5. 『전체주의의 내부 전복투쟁(顚覆鬪爭)과 무력유린(武力蹂躪)을 겪고 300여만의 아까운 인명을 빼앗긴 한국이 전체주의 전복활동, 찬양활동에 어떻게 대처하는 법제를 가지고 있는가』와『전체주의의 스파이활동 외에 뚜렷한 내부 전복투쟁이나 무력침략을 겪지 않은 서독이 전체주의 전복활동, 찬양활동에 어떻게 대처하는 법제를 가지고 있는가』를 대비하여 보면 그 시사(示唆)하는 바가 더욱 뚜렷해진다.
미국이나 일본이 전체주의의 활동을 찬양하거나 전체주의 외국을 위하여 선전하는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는 법제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아도 역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서독이 1987. 4. 1.에 개정한 법제를 통일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상도(想到)해 볼 필요가 있다.
별첨 『비교표』를 보면 우리 한국 시민들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1991. 5. 31.에 대폭 개정한 한국국가보안법이 1987. 4. 1.에 개정한 서독 형법해당조항보다 전복투쟁을 위한 찬양활동과 무력유린에 대한 방관 배신행동에 대하여 더욱 관대한 것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예컨대 독일은『구동독의 선전물이나 서독내 자생적 전체주의 옹호단체의 선전물을 돌리거나(반포) 가지고(보관소지)만 있어도 즉시 처벌받는데』한국의 경우에는『북한이나 한총련의 선전물을 돌려보거나 보관하는 것도 국가존립을 위태(危殆)케 하는 등 조건이 있어야만 비로소 처벌할 할 수 있고』한국은『대한민국의 영토를 자유선거 아닌 무력과 테러로 강점하여온 세력의 국기나 휘장을 공중 앞에 휘날려도 국가존립을 위태(危殆)케하는 등 조건이 없으면 처벌할 수 없』으나, 독일은『구동독의 국기나 휘장을 공중 앞에 계양하거나 그런 사용목적으로 보관하는 자체를 즉시 처벌할 수 있』는 법제를 가지고 있는 등위 비교표 비고난에 기재된바와 같다.
6. 우리나라를 이와 같이 무방비로 만들자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것이다.
첫째 순수하고 선량한 시민들 중에는 이제 대한민국 남한에는 내부 전복활동이나 외부로부터의 무력침공 가능성이 없으니까 시민의 건전한 판단에 맡기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시민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알게 모르게『자유체제 유지에는 자제(自制)와 희생(犧牲)이 필요없다』는 달콤한 테제에 속고 있다는 점에서 체제재앙(體制災殃)이 오기 전에 스스로 인식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는 체제재앙에 대비하지 않는 불행한 전통이 있어 왔다.
일본 침략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안심한 우리 민족이 1592 임진년부터 7년간 대량 살육을 당하고 그로 인하여 민족의 진운(進運)이 쇠퇴하게 된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으며, 7년 전란이 끝난 이후에도 외부 침략에 대비한 코스트지불에 인색한 우리 민족은 겨우 29년 밖에 안된 1627 정묘년에 북방 여진족에게 황해도 황주까지 유린되었고, 그래도 우리 체제 수호의 코스트지불을 안하던 우리 민족은 9년만인 1636 병자년에 민족의 존엄성을 너무 유린당하였다.
1945년 이후 우리의 선배들은 민족분단의 불행 속에서도 다행스럽게 이러한 선인들의 실패의 전철(前轍)을 밝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으며 그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루고도 오늘의 번영(취약하지만)을 가져왔다.
1998년 이후 우리는 이제 역사를 반복하여 국가보안법부터 허물자는 이상한 논리를 소리높이 외치는 사람을 목격하고 있다.
둘째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을 허물어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북한 전체주의 집권자와 남한에서 은밀히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다. 남한에서 은밀히 반국가단체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대한민국에서 선거때가 되면 투표하고 선거운동도 열심히 한다. 이 사람들의 열심한 선거운동 덕을 본 정치인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자유체제를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문화투쟁세력」이 상당히 언론자유를 누리는 자유민주체제 속에 살고 있다. 자유민주체제는 그러한 언론자유가 있는 동안에, 스스로를 지키는 비용(cost)을 부담할 때에 비로소 생존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 것은 그동안 우리의『다수 조용한 시민들』(Silent Majority)이 이해하고 협조하여온 점이기도 하다.
셋째 1998년 이후 우리 국가보안법부터 허물자는 시끄러운 발언들 중에는 스스로 시민들의 대변을 하겠다고 자임하면서 이름을 그렇듯하게(민주라든가 연대라든가 정의라던가 하는 용어를 특허나 상표등록할 필요 없으므로) 만들어 소리를『허위의 증폭(Amplifing)』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거품을 예리하게 투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조용한 다수 시민들』은 시간이 가면서 이들의『허위의 증폭』을 간파하게 될것이며, 이들에게 아첨하여온 정치인들을 알아내게 될 것이고, 끝내 가까운 역사에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넷째 대한민국의 자유체제를 타도하겠다고 맹렬히 노력하던 사람들의 인권을 드높여, 사면을 남용하여 오다보니 이제는 자유체제를 건드리는 것에 습관화되어 있는 경향이 생겼다. 그러나 이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튼튼하게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헤진다. 법의 지배가 확실하지 않으면 국방은 물론 번영도 없게 된다.
모든 처벌에 관한 재판의 역사는 오판의 역사(誤判의 歷史) 이기도 하다. 미국의 오판사(誤判史)를 읽는 법학도들은 마음의 두려움으로 옷단추를 새로 여미게 된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가『필요한 법』이 오판으로 잘못 적용되었다고 하여 그『필요한 법』을『악법』이라고 보는 논리의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얼마나 오판을 줄이고 수사와 판결에 임하는 공직자가 심혈을 기울여 인권을 지켜주며 참을성 있게 피고인의 변명을 들어주는데 인권옹호의 요체가 있는 것이지, 자동차사고로 사람이 죽고 다치니 자동차가『원수』이고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있지 않다.
7. 한국과 같이 2천만명이 밀집되어 좁은 공간에서 사는 수도권을 향하여, 가까운 거리에서,『자유와 평화와 번영의 적대자』가 엄청난 대량살상 무기를 조준하고 있는 곳에서, 자유체제를 지키는 것은 자유민의 체제수호의지와 체제수호에 반드시 필요한 코스트부담이다.
이런 코스트부담을 하지 않고서 멋대로 자유를 확대하라고 요구하다가, 노예상태와 빈곤속에 떨어져버린 민족들은 역사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그 예가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