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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본에서 '편향재판'을 못하게 한 사람 - 정기승 명예회장(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글쓴이 헌변 등록일 2010-03-16
출처 조회수 4824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은 자유와 창의를 창달하는 사회라야 비로소 번영한다고 믿으며, 자유와 창의를 지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지성인들의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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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03. 22.
수 신    변호사님께
참 조

제 목    일본에서 '편향재판'을 못하게 한 사람
           일본의 제5대 최고재판소장관 石田和外의 담화와 활동 그리고 기타

필자소개    정 기 승 변호사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의 前 회장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의 명예회장(現)
                 前 대법관

정  기  승    변호사

일본에서 "편향재판"을 못하게 한 사람 

 일본의 제5대 최고재판소장관 石田和外의 담화와 활동 그리고 기타

정기승 변호사

 일본의 제5대 최고재판소장관 石田和外의 담화와 활동 그리고 기타
      [일본의 최고재판소장관→한국의 대법원장과 같은 지위]

 石田和外 최고재판소장관은 1969년 11월에 취임하고 1973.05.19 退任 .
    이 기간에 일부 일본 판사들의 「편향재판(偏向裁判)」을 시정하기 위하여 담화 등을 발표 했다.

   아래와 같은 담화도 있었다.
     · 1970年 5月의 헌법기념일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극단적인 군국 주의자, 명확한 공산주의자는 재판관
       에 적합하지 않다」

     · 「사상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고, 헌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어도 그 자체는
       부당하지 않다. 그러나 재판관은 일반국민과는 다르다. 헌법을 옹호하지 않으 면 안 된다. 헌법, 법률
       의 정신을 살려서, 법률을 해석하고 재판을 한다는 능동적인 입장 에 있다.」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의 명예회장 정 기 승 변호사는 일본의 최고재판소장관 石田和外의 이
       러한 활동 등에 관하여 일본의 문헌을 번역해서 「일본의 제5대 최고재판소장 石田和外의 담화와 활
       동 중에서」라는 자료를 만들어, 2010년 2월 8일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의 총회에서 이 자료를
       토대로 특강을 했다.

  ----------------------------------------- 편집자 -----------------------------------------

 일본의 제5대 최고재판소장관 石田和外의 담화와 활동 그리고 기타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의 명예회장    정 기 승 변호사

  【이시다 가즈또(石田和外)-제5대 최고재판소장관】
      1969.11.01 취임(65세)
      1973.05.20 정년
      1973.05.19 퇴임(3년7개월 재임)

 ◎격류속의 바위(岩)

    ■ 재판소의 내외가 일찍이 없었을 만큼 심하게 요동치고, 요란한 비판과 비난에 휩싸이는
       가운데에서, 온몸의 힘을 기울여 맞선 이시다(石田)였다.

    ■ 취임식후 기자회견에서 말한 제1성
       「사회질서의 확립」을 강조
       「재판관은 격류속의 바위(岩)여야 한다」

       일본국헌법은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문화국가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는데, 그러러면 법에 의해서
       사회질서가 확립되어 있는 것이 전제가 된다.

       그 최후의 보장을 담당하는 것은 재판소다.

       최근의 사회변화는 격렬하고 사물에 대한 생각이나 각도도 변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
       특히 학생이 여러 가지로 떠들고 있는 것도, 그러한 곳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렇다고 평화로운 사회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

       재판소는 시세를 잘 지켜본 뒤가 아니면, 나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격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바위(岩)에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의연하면서 바르고, 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강하게 라고 하는 것은, 재판의 독립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 이다.


 ◎「아까(赤)공격」 시작

  ■ 1967년 9월경부터 재판소에 대한 비난이 거세기 시작

   (1) 잡지『전모(全貌)』→「재판소의 공산당원, 청년법률가협회는 용공단체(容共團體)」
        잡지『경제왕래(經濟往來)』→「전후재판의 경향」
        각 특집으로 1,2심의 공안·노동사건의 무죄판결을 들어「편향재판(偏向裁判)」이라고 비난

        이들 배경에는 청년법률가협회(-약칭 靑法協)에 속하는 재판관이 증가 하고, 사법노동조합이나
        자유법조단, 총평변호단 등이 추진역(推進役)이 되어 있으며, 일본공산당, 민청동(民靑同)등의
        세력이 법조분야에 침투하고 있다고 하여 「아까(赤)의 위험」을 강조

        안보개정(安保改定)을 앞두고 과격파학생의 반 안보투쟁이 격화되고, 각지의 재판소에서는 학생
        사건의 재판분위기가 거칠어지고, 치안당국이 체포한 과격파학생의 구속신청을, 검찰측의 반대를
        뿌리치고 계속 기각하고 있었던 사정들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여짐.

    (2) 1968년 8월 자민당 기관지『자유신보』→「편향재판에 대한 위구(危惧)와 재판관불신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청법협」 이라는 논문 게재

    (3) 1968년 10월 20일 각의(閣議)→국가공안위원장이 전학련학생의 취체(取締)에 對한 재판소의
          처리에 대해 발언하면서 「당국이 애써서 검거해도 재판소가 즉시 석방해 버리는 것은 곤난하다.
          재판소는 좀 더 경찰에 힘을 보태주지 않으면 책임을 다 할 수 없다」고 공연(公然)히 비난

    (4) 「데모」에 관해서
          국회주변의 데모에서, 東京도공안위원회가 진로변경의 조건부허가를 한 것이 부당하다 고하는
          헌법옹호국민연합의 신청을 東京지방재판소가 인정하는 결정→사또수상(佐藤首相)이
          이의신청을 하고 그 결정이 취소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5) 「재판」에 관해서
        2월 25일 도꾜(東京)지방재판소에서 도공안조례위반사건 무죄
        4월 02일 도교조사건(都敎組事件)의 최고재판소 결정
        4월 11일 미국항공모함 엔타프라이즈의 나가자끼 기항(長崎 寄港)에 반대하며 경찰과 충돌한
                         학생들에 후꾸오까(福岡)지방재판소에서 무죄판결

    (6) 법무장관의 재판소비난 기자회견(도조례위반사건의 무죄판결에 대해서)
      「재판소만은 어쩔 수 없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의 제동이 필요하다. 재판관이 조례를 무시하는
       세상이니까........」

    (7) 자민당이 사태를 중시하기 시작
        자민당총무회에서 이다구라 다다오(倉石忠雄)는 도교조판결(都敎組判決)을 가지고
           「이 판결은 입법취지와도 다르다. 이 판결의 소수의견에서도 다수의견의 법해석은 법의 명문에
           반하는 일종의 입법이고, 법해석의 영역을 일탈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급심이라면 몰라도 최고재판소에서 이러한 중대한 판결이 나왔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다」 고 발언

      자민당 →「재판제도조사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침을 결정
           (이는 자민당총무회에서 계속되는 무죄판결을 편향판결이라고 하고, 재판자료를 정비해서 내각이
           갖고 있는 재판관 인사권의 자료로 해야 한다고 하거나, 탄핵재판이나 소추위원회의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등의 의견이 속출했기 때문임)

      자민당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최고재판소 사무총장은 즉시 「동 위원회는 재판의 독립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반론


 ◎히라가(平賀)·후꾸지마(福島)·이이모리(飯守) 문제

      재판소내부에서 「재판간섭」이라고 보여 지는 사태가 발생

       ■ 히라가(平賀) 편지
           삽뽀로(札幌)지방재판소에서 항공자위대 나가누마(長沼)나이키기지 반대소송을 심리하고 있던 중,
           지방재판소장인 히라가(平賀)가 담당재판장인 후꾸지마(福島)에게 편지를 전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 선배의 조언(助言)」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그 내용은 소송의 판단에 개입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 이였다.

           이 편지가 보도기관의 손에 들어가, 지방재판소장인 히라가(平賀)가 담당재판장인 후꾸지마(福島)에게
           편지를 전한 다음날 조간에 게재되어, 「믿을 수 없는 일」, 「재판간섭」 등의 비난이 들끓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최고재판소→히라가(平賀)지방재판소장을 「주의처분」하고, 도꾜(東京)고등재판소 판사로 전근조치
        삽뽀로(札幌)고등재판소 재판관회의는
             · 편지를 공표한 후꾸지마(福島)를 「주의처분」
             · 국회의 재판관소추위원회에 소추청구
               [소추청구결과] 후꾸지마(福島)→소추유예        히라가(平賀)→불소추
        나가누마(長沼)소송당사자인 나라(國)측에서 「후꾸지마(福島)가 청법협회원이어서
            공정한 심리를 기대할 수 없다」고 재판장기피신청,

            삽뽀로로(札幌)고등재판소→기각결정

            나라(國)측이 재판장기피신청을 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

       ■ 이이모리(飯守) 문제
           가고지마(鹿兒島)지방재판소장 이이모리(飯守)가 「조반재판관(造反裁判官)을 용서하지 말라」는
           글을 재단법인 국민협회(國民協會)의 기관지에 기고

           제목→「히라가(平賀)편지사건의 배경」
           취지→「히라가(平賀)편지사건은 반체제집단인 청년법률가협회에 가입한 재판관과 변호사,
                     이것을 지원하는 매스컴세력」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최고재판소당국은 청법협에 가입한
                     재판관에게 조직으로부터 이탈할 것을 권고하여야 한다」

       이 기고가 표면화된 후 「최고재판소의 히라가(平賀)소장에 대한 처분은 잘못 되었다」는 등의
       말도 하였다

      최고재판소→재판관회의를 열어 「공개질문장은 소장의 직무를 일탈(逸脫)한 행위」라고 하여
                         소장직 해임처분
      이이모리(飯守)→그 후 사직 [이이모리(飯守)→2대 최고재판소 장관 다나까 고오따로(田中耕太郞)의
                               친동생]


 ◎靑청법협의 성격

     재판소의 내우외환, 그 공격의 초점은 청법협

    정식명칭→청년법률가협회
    회원→약 2,300명, 그중 재판관은 약 300명 정도(1985년 현재?)

     「순수한 학술·연구단체」, 「정치적성격을 갖는 단체」라는 두 가지 견해

     최고재판소→「재판관의 정치적 중립」 문제로서 파악
                          재판관이라 하더라도 사상, 신조는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최고재판소의 생각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 이였다.

   최고재판소 사무총장 담화
      일반적인 문제로서 재판관은 그 직책상 특히 정치적 중립성이 강하게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와 동시에, 재판은 국민의 신뢰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재판관은 항상 정치적으로 엄정중립이라고
      국민에 받아드려지는 자세를 견지(堅持)하는 것이 긴요(緊要)하다.

      재판관이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에 가입해 있으면, 그 재판관의 재판이 아무리 공정하다 하더라도
      그 단체의 활동방침에 따른 재판이 행하여졌다고 여겨질 우려가 있고, 재판이 특정한 정치적 색채에
      움직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된다.

      재판은 내용이 공정하지 않으면 안 될 뿐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공정하다고 신뢰를 받는 자세가
      필요하며, 재판관은 각자가 깊이 자계(自戒)해서 어느 단체건,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에 가입
      하는것은 삼가야 한다.

   이시다(石田)장관의 발언, 훈시 등
     · 1970년 5월의 헌법기념일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극단적인 군국주의자, 명확한 공산주의자는
       재판관에 적합하지 않다」

     · 위 사무총장의 담화를 들어 「공정성을 해(害)하지 않게 주의하는 것은 재판관의 [모랄]」
       이라고 한 다음

     「사상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고, 헌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어도 그 자체는
     부당하지 않다. 그러나 재판관은 일반국민과는 다르다. 헌법을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헌법,
     법률의 정신을 살려서, 법률을 해석하고 재판을 한다는 능동적인 입장에 있다.

     극단적인 군국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명백한 공산주의자는, 그 사상은 헌법상 자유이지만, 재판관으
     로서 활동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법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말하면
     도의적으로는 국민으로부터 인용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헌법을 시인하고, 그에 따른 것이 아니면
     적어도 도의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은 헌법을 지키고 이용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으
     면서 위장(僞裝)하고 있다면, 궁극적으로는 헌법을 부정하려는 생각도 있다할 것인데,
     이것도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재판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양심』 이란 사상, 인생관 등 전인격
     (全人格)을 뜻하는 것으로, 재판관이 자기의 사상 과 재판을 분리하는 것과 같은 짓은 할 수 없다고
     생각 한다」

     · 재판의 공정에 관해서는, 재판의 내용자체가 공정할 뿐만 아니라, 그 공정이 국민 일반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조금도 의혹을 갖게 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재판관은 그 언동에 세심
      한 배려를 하여야 한다.

     · 「기본적인권의 존중은 법과 질서가 국내에 확립되는 것이 전제인데, 근래 자기의 주장, 주의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실력행사에 나오는 풍조가 있는 것은 유감이다」

      「재판관은 시류에 앞지르지 말고, 중용의 길을 걸어라」

      「이유없는 비판에 현혹되지 말고, 냉정한 태도로 직무에 전력을 기울여라」



 ◎재판관 부재임(不再任)

     최고재판소는 1971년 3월에 회의를 열어 10년 임기를 마친 하급심재판관의 재임여부(再任與否)를
     검토한 결과, 熊本지방재판소 가재판사보 미야모또(宮本) 가 부재임(不再任) 되였다.

     최고재판소는, 재판회의는 비공개인 것, 인사는 비밀인 것 등의 이유로 부재임이유(不再任理由)를
     밝히지 않았고, 미야모또(宮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내 밝히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미야모또(宮本)가 청법협회원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유가 아닌가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최고재판소는 침묵을 지키고 끝내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발령후 최고재판소 사무차장이 「총장담화」를 발표했는데

     「......미야모또(宮本)가 임명되지 않은 것은, 최고재판소가, 宮本은 유감이지만 판사로서 적임이 아니
     라고 해서 지명명부에 등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임이 아니라는 이유는 인사의 기밀에 속하는
     것이므로, 본인의 희망유무에 불구하고 공표할 수는 없다. 다만 미야모또(宮本)가 청년법률가협회
    회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지명에서 빠진 것은 아니다.


     재판관의 임명은, 헌법에 의해서 재판관의 인사를 포함한 사법행정을 독립해서 행할 권한을 부여받은
     최고재판소가, 여러 관점에서 신중히 검토하여 결정하는 것이다」라는 것 이였다.

     宮本의 부재임이유에 대해서는 당시의 최고재판소판사도 비밀보지의 국가공무원법의 틀에 묶여 입을
     열지 않고 있는데, 한편으로 재판관 인사에 정치가 개입하는 것을 경계했다는 시각도 있다.
     최고재판소 스스로가 선별하지 않은 채 재임 명부 를 내각에 보내면 내각이 독자적 입장에서 부재임을
     결정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내각이 일방적으로 재임의 가부를 결정하여, 재판소의 독립이
     침해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이다.

     아무튼 미야모또(宮本)의 부재임 이유는 밝혀지지 않은 채로 있다.


 ◎신문과 충돌

     미야모또(宮本) 부재임문제에 대해서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최고재판소는 언론과도 대립하는
     모양이 되었는데,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는 정면으로부터 충돌하였다.

      · 아사히신문(朝日新聞) 4월 13일 석간에 「재임거부의 내막」 이라는 기사를 게재
      · 『슈깡아사히(週刊朝日)』4월 23일호에 「최고재판소 재판관회의의 전용(全容). 8대4로 재임거부에
       미야모또(宮本)판사보」
라는 기사를 게재

      어는 것이나 부재임에 이른 경과를 추급(追及)하였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석간 기사 전문】
    미야모또(宮本)판사보의 재임거부를 결정한 최고재판소의 재판관회의에서, 어떤 심의가 행하여 지고,
    무엇이 거부의 이유가 되었던 것일까. 극비의 회의인 만큼 직접당사자는 입을 다물고 있는데, 부내에
    돌아다니는 여러 가지 정보를 모아보면, 회의가 이시다(石田) 최고재판소 장관과, 장관과 가까운 사람
    들의 강한 리-드로 선택된 것, 히라가(平賀)편지공표에 미야모또(宮本)판사보가 관여했다는 관계기관의
    보고에 기한 자료가 거부결정에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 엿 보인다.

    회의는 3월 17, 24, 31일 세 번 열렸다. 1회째의 회의에서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이 제출한 자료는,
    미야모또(宮本)판사보들 5인의 청법협회원 등〝요주의(要注意)〞로 보아지는 판사보의 것 뿐 이였다.
    이 자료 속에는 한사람 한사람의 임관이래 10년간 국가공무원으로서의 행동에 관한 관계기관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최고재판소판사 중에서『전원의 자료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심의할 수 없다』 고 하는 말이
    나와서, 사무총국은 나머지 판사보 전원에 관한 자료를 보고했다. 그 내용은 주로 본인의 재임 희망에
    첨부된 소속지, 가정재판소장, 고등재판소장관의 의견 이였다고 한다.

    청법협회원을 재임하느냐 않느냐의 본격적인 논의는 2회째의 회의에서 행하여 졌다. 의장인 이시다
    (石田)장관이 『외부로부터 여러 가지 말들이 있는데 양심과 신념에 따른 생각을』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여 발언을 촉구하고, 15인의 판사가 한사람씩 의견을 냈다. 외국의 예를 들어『좌우의 대립이 격렬한
    우리나라에서는 사상적으로 한쪽에 기우러진 재판관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 재임거부론, 요시다(吉田)
    사무총장이『청법협회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임 거부는 하지 않는다』고 한 국회답변을 예로 들은
    재임론 등 솔직한 주장이 있었던 모양이다.

    재임거부를 결정하려면, 15판사의 과반수동의가 필요한데, 이때 의견의 갈림 양상은, 적극적인 재임
    거부론, 분명한 재임론, 단정적인 말을 하지 않은 것, 의 셋이 있었는데, 그 셋이 동수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문 이였을까, 이날에는 결론을 내지 않고 산회했다.

    3회째의 회의가 시작하기에 앞서, 기시(岸) 도꾜(東京)고등재판소장관(2일부로 최고재판소판사)이
    전 사무총장의 입장에서『청법협에는 의연한 태도를』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회의가 시작되니까, 재임거부반대론부터 먼저 의견을 말해달라고 해서, 다나까(田中)판사[전 도꾜대
    (東京大) 법학부장-행정법], 이로까와(色川)판사[전 오오사까(大阪)변호사회장], 이이무라(飯村)판사
    [전 도꾜(東京)변호사회부회장] 등이 발언했다고 한다. 그 후, 미야모또(宮本)판사보에 관한 관계기관의
    조사를 바탕으로 한『히리가(平賀)편지공표에 관여하였다』는 자료가 문제가 되었다.

   『히리가(平賀)편지는 비밀로 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른 처분도 있는데 갑자기 재임을
    거부한 것은 가혹하다』『이 자료의 신뢰도는 어떤가』라고 하는 반론이 나왔을 때 『이 사실이 없었다
    고는 할 수 없을 걸』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잠시 침묵이 계속되였다. 어떤 판사가 『전원 일치죠』라고
    말하고, 이를 계기로 이시다(石田)은 재임거부의 결정을 내렸다.

    미야모또(宮本)판사보 자신은『히라가(平賀)편지를 외부에 누설하다니...자신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본인의 변명을 듣지 않고, 재임거부의 결정이 되었던 셈이다


    최고재판소→4월 14일 사무총장이 「기사는 전적으로 추측에 기한 날조」라고 하여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측에 문서로 기사의 취소를 구하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측→「자료를 기초로 확신을 가지고 쓴 기사. 날조라고 하는 것은 엉뚱한 말」
                        이라고 반론하는 한편, 사내에서 재조사

    그러나 최고재판소측의 태도는 강경했다.

    결국 아사히신문(朝日新聞)측 양보하고, 4월 28일 조간에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기사를 게재하고
    결말을 지었다.

 【유감의 뜻 표명 기사】
    최고재판소 사무총장으로부터 4월 23일자『슈깐아사히(週刊朝日)』의 「최고재판소 재판관회의의 전용
    (全容) 및 동월 13일자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석간의 「재임거부의 내막」 이라는 기사에 대해서, 그 내용이
    전혀 사실에 반한다고 하여 취소하고 진사할 것을 요구하여 왔다. 이에 대해서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
    는, 『슈깐아사히(週刊朝日)』에 관해서는, 사실과 다르고 표현상으로도 온당하지 않은 점이 있으며, 또
    본지 석간에 관해서는 오류가 있음으로, 유감의 뜻을 표명한다.

    이 수습에 대해서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최고재판소에 진사(陳謝)」라는 기사를 게재한 신문도
    있었다.


 ◎石田장관의 재임 또는 퇴임 전후의 각 발언

     재임중의 수시 발언
        · 격류속에 서 있는 바위(岩)와 같은 자세를 견지(堅持)하고 사법의 권위를 확보한다
        · 군국주의자, 공산주의자는 재판관에 적합하지 않다
        · 재판의 내용자체가 공정할 뿐만 아니라 조금도 의혹을 갖지 않는 자세를 견지(堅持)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강조
        · 후진재판관은 경험부족 때문에 관념적인 이론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충고했다

     격동시대와 사법의 현상에 관해서
         국비로 법과 질서를 지킬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는데,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되는 법조가 적지 않다. 그 결과, 일본 법조 의 상태에 우려할만한 사태가
         있다. 최근 2,3년래 일변련(日辯連) 등은 성실한 법률가가 볼때 생각할 수 없는 결의를 하고
       있다.
당신들(기자단을 가르킴)도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민주주의
       체제를 최후까지 지킬지 어떨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 점을 잘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된다.


     퇴임후 발언 일부
         청법협들로부터 조금도 비난이 거세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으로부터의 비난이 거셌던 것이 아닐까
         청법협 자체는 조그만 그릅이고, 그런 것을 문제로 했던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재판관으로 있으면
       서 특정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게 되면, 재판 그 자체에 묘한 뒤틀림이 생기고, 세상 사람들이
       걱정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걱정스런 생각을 하게 해주면 재판 그 자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된다. 그래서 청법협을 문제 삼은 일도 없다.

         다만 청법협은 외부세력과 결탁하게 된다. 그런 단체에는 재판관은 [모랄]로서 세상에서 의혹
       의 눈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