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환경주의자』
이상돈
브레인북스 (446쪽)
임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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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경제적 자유(2002/05/03)
첨부파일 :자유번영의길_50.hwp
헌변
1. 반칙을 엄격히 제재하지 않는 심판이 호루라기를 부는 경기시합에서는 선량하고 뛰어난 농구선수가 기량을 발휘할 自由가 없습니다.

  공장 전산실에서 해고자복직을 외치고 농성을 하여도 고발 받은 경찰청장이 노사협의를 몇 일 더 기다리겠다고 하는 지역의 제조회사 경영자에게는 경영의 自由가 없습니다. 대학동창 건설업자에게 校舍증축을 계약했으니 부정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만 하는 노동조합원 교사들과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면서 교장실을 점거하여도 신고 받은 경찰서장이 학원 내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는 곳에서는 사립고등학교 이사장에게 학교경영의 自由가 있을 리 없습니다.
  
조직폭력배가 부하이름 빌려 부도난 회사의 임원으로 등기 받아놓고 공장 철조망에 고압전기를 통하게 하면서 사냥개로 정문을 지키게 하여도 채권 집행을 위해 진입할 용기가 없는 집행관(집달리)이 파면되지 않는 곳에서는 돈을 꾸어준 사람들에게 自由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벼운 신용불량자들에게는 신용사면을 하겠다는 국회의원들이 인기 있는 사회에서 금융업을 하는 기업의 自由는 크게 제약받습니다.
  
꽃마을에서 근근히 살아간다고 내세우는 불법 점거자들이 서초동법원 바로 코앞에서 버텨도 원인 모를 화재가 아니고서는 그들을 쫓아낼 수 없었던 대한민국에서 토지를 소유한 기업의 自由는 위축되었던 것입니다.  동족화해차원이 소리 드높은 가운데 국가기관의 간첩검거 실적이 대폭 줄어 들어 갈 때 대한민국 공동체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주변은 自由體制가 위축되는 그림자로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뇌물로 5년 실형복역을 하던 전직 정치인이 국민화합 차원에서 1년도 않되어 사면되는 게 보통인 나라에서는, 절약과 효율에 심혈을 기울이는 기업인들의 머리속에서 납세자로서의 自由가 자꾸 혼란스러워 집니다.
  
종교의 자유와 종교반대의 자유(종교무질서)를 함께 「선언」하는 공산주의 헌법아래에서는 종교의 自由가 견뎌낼 수 없듯이,  농어민 부채탕감의 권한이 정치인들에게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나라나,  잘 가르치는 학교를 선택하는 수월성 추구를 막아 평준화하게 하는 입법권이 국회에게 주어질수 있다고 여기는 사회는 憲法의 自由로부터 도피를 시작하는 곳입니다.

  法治를 桎梏이라고 외치는 아나키스트들이 1917년 소비에트 전체주의등장의 前夜祭를 벌였고, 放任과 法治無關心을 自由의 인정이라고 착각하였던 비겁한 寬容主義者들이 1933년 나치전체주의를 안내한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法治(rule of law) 없으면 自由없습니다.    

2. 공장하나 지으려면 수십 번 관청에 드나들며 합쳐서 1700쪽의 서류를 제출하여 기업인이 불법건축자가 아니라는 입증을 事前에 하도록 하는 것은 規制(Regulation)입니다.

  규제가 많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일단 허가를 받은 후에는 불법이 발견되어도 책임 추궁이 별로 없어서 우리의 서울시청 맞은편 어느 호텔은 광장면적을 불법 잠식하고서도 그걸 헐수야 없지 않은가 하는 관용의 혜택을 무기한 미래에 걸쳐 받는 이익을 쟁취한바 있습니다. 당신회사가 공장을 지으려 하느냐 이 법령과 규정에 적힌 것을 조심하여 지켜라 특히 배출시설 규정을 절대로 어기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쉽게 허가하는 경제적 자유 분위기의 미국에서 만약 완료된 건물이 규제를 어겼으면 事後에 계속되는 과징금(過徵金)액수가 규정 어긴 이익을 초과하여 무기한 계속하거나 심지어 철거까지 강행하는 것은 法治입니다.
  
생산성이 월 70만원 밖에 안 되는 노동자 한 명에게 매월 210만원의 보상을 해주는 경영자에게 해고할 권리를 막는 것이나, 연금부담을 해주는 대신 경영자가 퇴직금을 없애기로 계약할 권리를 금지하는 것은 規制입니다. 경력을 속이고 입사한 직원을 8년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과거의 채용권 침해를 이유로 해고를 할수 있게한 우리의 판례는 法治입니다.
 
기업단체들이 시장 메커니즘아닌 방법으로 금리를 억제해 달라고 정부에 요청한다면 이것은 規制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고, 상호저축은행(상호신용금고) 임원의 이해관계업체에 대한 배임대출에 대하여 현재보다 더 가혹한 처벌을 하는 것은 法治입니다.
  
주식의 손실에 이해관계가 적은 소액주주에게 소송비용도 적게들이면서 집단 소송을 할수 있게 권한을 주어, 주식가치에 보다 큰 이해관계를 가진 대주주임원의 사업판단력(business judgement)을 소급 심사케 하는 것은 規制이고, 분식결산으로 주가를 올리고 대출을 더 받아 가는 것을 사기죄로 엄벌하는 것은 法治입니다.
  
개인의 노후설계를 중앙집권기관인 국민연금공단이 규격화하거나, 인간의 질병치료를 중앙집권기관인 국민건강보호공단이 규격화, 수량화하는 것은 規制입니다. 자기의 노후준비를 게을리 하거나 자기의 건강관리를 아무렇게나하고 불의에 닥칠지 모를 큰 병의 치료를 대비하지 않거나 하는 사람들 중, 생활보호 대상자가 아닌 사람에게까지 납세자 돈으로 생활수준을 올려주고 高價多額치료까지 해주는 것은 法治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워크아웃으로 어음을 부도내지 못하게 하거나, 기업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책임을 져야 할 직원들의 퇴직금을 우선 변제하게 하는 것은 채권자의 재산권 행사에 대한 反法治的 規制입니다.
  
남의 自由, 타인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한 經濟的自由를 보장하는 것이 法治입니다.  다른 사람을 害하는 자의 責任을 철저히 追窮하는 것이 法治입니다.  다른 사람을 해한 일이 없는 사람의 自由를 억제하는 것이 規制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일 없이 善意의 競爭을 하는 사람의 自由를 制限하는 規定을 만들고, 善意의 競爭으로 돈을 번 사람의 財産을 빼앗는 制度를 만드는 것이 바로 規制입니다.
  
뒤떨어진 나를 위하여 나보다 앞서 가는 사람을 묶어 달라고 하는 것이 規制를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제품이나 내가 바치는 서비스보다, 더 좋게 더 싸게 내 놓는 競爭者가 있어서, 내가 더 이상 장사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드라도, 그는 나를 해하는 자가 아니며 내권리를 빼앗아 가는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경쟁자를 묶어 놓거나 제한해 놓으라고 내가 아우성치고 로비한다고, 정부가 나의 판매량을 『公正하게』 보장해 주는 것은 規制입니다.
 
이런 짓은 市場의 主權者인 消費者를 해치면서, 善意의 競爭者로 하여금 『더 좋게 더 싸게』최선을 다 하는 自由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사히 몇년동안 잘못 교육받고 자란 사람들과 사회주의논리를 떠드는 지식인들이 改革하자고 떠들어 온 것들의 95%가량이 바로 이런 規制를 해달라는 것들입니다.
  
요사히 몇년동안 改革이 좋은 것인지 못된 것인지 어리둥절해온 기업인들과 시민들의 대부분은 規制와 法治를 구별하지 못하여 왔습니다.      
  
規制있는 곳에 경제적자유 없습니다. 그러나 法治는 經濟的自由의 필요조건입니다.

3. 성과를 차지하는 결과인 부(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곳은 經濟的自由가 없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이 최선을 다하여 성과를 차지하여 부자가 되는 것을 벤치마킹하고 추월의 노력을 하는 것이 나의 당연하고 정상적인 생활이라고 여기는  사회라야 經濟的自由가 생존할 수 있습니다.
  
하는 사람이 박수 받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박수를 받지 못하는 당연하고 정상적인 현상에서만 經濟的自由가 생존할 수 있습니다. 스톡옵션의 50%를 사양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압력에 대한 양보일 뿐입니다. 스톡옵션을 다 받아서 더 투자하거나, 자기취향의 사업에 기부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正常이기 때문입니다.
  
노동효율이나 노동강도를 높인 동료 노동자에게 압력을 가하는 노동운동이 責任追窮을 받지 아니하면 이때부터 최선을 다하는 경쟁의 自由는 숨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동료학생의 공부분위기를 해쳐도 퇴학의 責任을 追窮 받지 않는 학교와, 주먹으로 선량한 동무를 때려도 회초리의 責任追窮을 교육하지 못하는 교사는 최선을 위한 경쟁을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
  
남의 건물을 불법점거하면서 매일 부당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소유자로부터 責任追窮의 배상판결을 받는 대신, 이사비용의 보너스까지 받는 사회는 그 法治의 실패와 정부의 직무유기를 국민에게 실감시키고 있습니다.

  自己責任이 없는 곳에 自由가 없습니다. 自己責任이 있는 곳에 自由人의 人間像이 있습니다. .

  個人責任을 사회구조에 돌리는 버릇은 특히 맑스주의의 인간 소외론의 매력이지만, 이것이 『지식인의 아편』이 되어 특히 젊은이들을 못쓰게 만들어 왔습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사회구조에 떠다 밀고, 젊은 시절에 사회에 대한 害毒行爲를 하고서도 전향할 용기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슬그머니 時效赦免을 받는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나쁜 교육을 하고 있는 사회이며, 自由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 사회입니다.
  
責任追窮의 본질이 바로 法治입니다.

責任의 地獄이 없는 자본주의는 개인의 지옥이 없는 그리스도교와 같습니다.

責任追窮을 하지 못하는 사회는 시민을 自由人으로 보지 못하고, 未熟兒로 봅니다.

責任을 묻지 않는 곳에 自由社會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의 自由, 남의 권리를 손상시켜도 이를 관대히 넘겨버리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사형제를 굳이 존속시키는 데에는 그 철학의 배경이 있습니다.

끊임없는 無地獄의 誘惑이 다름 아닌 끊임없는 責任逃避의 유혹입니다.

惡을 惡이라고 責任追窮 못하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일수가 없습니다.

테러보복의 책임추궁을 글로 쓰지도 못하는 지식인들은 공연히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지 말라』는 위선의 논리기교를 내세우다가 비현실적인 『논리의 악순환』속에 빠질 것입니다.

4. 經濟的自由는 공짜가 아닙니다. 自由人는 내 책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불안한 때가 많습니다.

自由의 制度는 내 실패를 아무 누구도 따뜻하게 이해해 주지 않는 냉정한 데가 있습니다.
  
중소기업이라고 해서 조달청의 단체수의계약을 조르는 것은 독립정신을 가져야 할 기업의 自由를 스스로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독립정신을 가진 용기있는 責任의 기업인이야 말로 經濟的自由와 번영을 향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는 사람은 기업인의 자격을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하기는 奴隸的忍從을 한 끝에 돈을 벌게 된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노동조합의 조합비를 자동공제하라는 아무런 規制의 법령규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업인들은 조합비 자동공제를 해소하고 싶어도 노사협상에서 그런 자기의 주장을 할 쓸게(Guts)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전임자에게 급여를 지급하라는 법적 規制가 분명히 따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기업인들은 스스로 노사대화에 내어놓을 용기가 없어서, 국가더러 그 금지법조항의 입법이나 유지를 청원함으로써 「기업을 위한」規制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해고를 정당하다고 판단했거나, 그렇게 판단할게 틀림없다고 예상되는 해고자의 복직을 우선 협상의제로 내 놓고 와일드 캣 스트라이크를 벌이는 노동조합에 대하여, 『좋은게 좋다고 일부 들어주는』 사기업의 3년 임기 경영자는, 『이틀 시한 안에 해결하라는 정치 상층부에 압력을 받드는』공기업경영자보다 더, 5년 후의 자기기업의 自由를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經濟的自由를 원하는 기업인에게 法治擁護는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자기의 일입니다.

기업인의 經濟的自由는 法治를 위한 鬪爭을 통하여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임광규 (변호사)

                                   [이 글은 헌변의 공식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 2003-12-23, 23:58 ] 조회수 : 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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