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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邪惡)한 사학법 / 공산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헌변   
 다음은 미래한국신문   http://www.futurekorea.co.kr 에 있는 것임.



사악(邪惡)한 사학법


공산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노무현정권이 사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면서 내건 명목은 ‘사학의 공공성’이다. 실제로 작년에 열우당이 이 법안을 내놓을 즈음 당시 열우당 천정배 원내대표는 “사학의 공공성과 투명성을 높여 교육의 질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공공성’이란 양두구육(羊頭狗肉) 같은 것이다.  

정부는 모든 국민이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다. 정부는 또한 맑은 물과 쾌적한 주거환경을 국민에게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이런 목적은 분명히 공공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가 독점적으로 물과 주택 그리고 교육 서비스를 공급하도록 하면 옛날 소련이나 북한 꼴이 되고 만다.

반대로 가격 메커니즘에 기초한 시장의 자율기능에 이를 맡기면 온 국민은 보다 맑은 물과 좋은 주택 그리고 좋은 교육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자율과 선택 그리고 경쟁과 시장이 있어야 소비자인 국민은 좋은 물, 좋은 주택, 좋은 교육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자율이 없는 것이다. 사립학교는 말만 사립학교이지 스스로 학생을 모집할 수 없게 돼 있다. 정부 말대로 오늘날 사립학교가 온갖 비리와 불법의 온상이라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책임은 정부에 있다. 비리 사학에도 정부가 학생을 배정해서 사학이 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사학의 비리를 예방한다는 핑계로 이제는 사학의 소유주체를 송두리째 바꾸려하고 있다. 그것은 공산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우리는 흔히 정부가 소유. 운영하는 ‘공립학교’는 공적으로 운영되는 성스러운 학교이고, ‘사립학교’는 장사꾼이 운영하는 냄새나는 학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언어의 장난이 빚어낸 착각이다.

우리가 흔히 공립학교라고 부르는 학교란 사실은 정부가 소유. 운영하는 ‘정부학교’(‘government school’)일 뿐이다. 대체로 보아서 정부학교는 사립학교에 비해 비효율적인데, 왜냐하면 정부학교는 경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학교 평준화를 내걸고 사립학교가 학생을 선발할 권리를 박탈한 데 있다. 권위주의 정부가 끝났으면 사립학교에게 학생선발권을 돌려주어야 하는데, 이제는 오히려 학교를 송두리째 내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학교교육을 공교육이라고 부르고 학원 등을 사교육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스운 것이다. 선택과 경쟁이 없는 우리나라에선 공교육이 사교육을 이길 수 없다. 또한 사교육에 비해 공교육이 공적인 면은 티끌만큼도 없다. 정부가 학생을 배정해서 망할 염려가 없는 학교에 교원노조가 들어섰으니 공교육은 거대한 철밥통이 돼버렸다. 오늘날 사립학교가 그나마 사학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지배구조 때문인데, 개정 사립학교법은 여기에 칼을 대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언어조작(semantic manipulation)에 매우 능숙한데, ‘공공성’이란 주술적(呪術的) 단어도 그런 면이 있다. ‘공공성’ 같은 외견상 고상한 단어를 선점해서 자신들에 대한 반대를 도덕적으로 능가하려는 것이 이들의 술책이다. 그러나 ‘공공성’이란 공허한 개념이다. 역사는 자유와 선택을 통해서만 개인의 창의성과 능력이 고양되며, 그런 과정을 거쳐서 공공선(公共善)이 창출돼 왔음을 잘 보여 준다. 교육과 주택 등 모든 것을 공공성의 이름으로 정부가 관리하는 나라는 이제 북한과 쿠바 밖에 없다.

개정법이 담고 있는 반(反)종교적, 특히 반(反)기독교적 의도에도 주목해야 한다. 근대 교육을 기독교 사학이 시작한 우리나라에 있어 이 문제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기본적으로 무신론(無神論)에 서 있는 좌파들에 있어 교회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개정 사학법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좌파 뿐 아니라 세속적 휴머니스트들이 벌이는 반기독교 캠페인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기독교 학교에서의 종교수업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한 고등학생을 수시 전형에 합격시킨 적이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기독교 학교가 학생들에게 미사나 예배를 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문제는 정부가 제멋대로 학생들을 배정하는 데 있는데, 이 같은 본질은 본체만체하고 어린 학생을 영웅으로 만든 처사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反)기독교 포퓰리즘을 보게 된다.

아래는 본지 127호에 기고한 중앙대 법대 이상돈 교수의 기고문임.
누가 ‘公共性’을 말하는가

요즘 사립학교법, 언론관련법 등의 개정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에서 눈에 가장 많이 뜨이는 단어가 ‘공공성’이다 이들 법률의 개정을 추진하는 열린우리당의 입장은 한마디로 신문 방송과 사립학교는 ‘공공성’이 강하기 때문에 국가가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기간행물법 개정안은 “편집의 공공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로 신문사와 뉴스통신사가 편집규약을 의무적으로 제정하고 독자가 신문 편집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방송법 개정안은 “방송 편성권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방송사업자가 방송 편성에 간여할 수 없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신문방송은 ‘공공성’이 강한 것이니 사업자는 아예 운영에서 손을 떼라는 이야기다. 심지어 특정신문의 시장점유율이 일정 규모를 넘으면 이를 불공정 거래행위로 보고 규제하려는 움직임마저 있다. 민영방송인 SBS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서 재인가를 유보해 놓은 것도 방송의 ‘공공성’ 때문이다.

사립학교에 개방형 이사회와 운영위원회를 도입해서 전교조 등 교원노조가 학교 경영에 참여하도록 하자는 사학법 개정안도 사학은 ‘공공성’이 강한 조직이라는 사고(思考)에 터 잡고 있다. 실제로 천정배 열린우리당 대표는 사학법 개정안은 “(사학의) 공공성과 투명성을 높여 교육의 질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 정부는 일정 수준 이상의 부동산을 보유하는 것 자체를 악(惡)으로 몰아 세우면서 공공임대주택을 대대적으로 공급하겠다고 선전하고 있다. 공공임대주택은 그린벨트에도 허가를 내주는 등 온갖 특혜를 베풀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재건축 아파트에는 임대주택을 일정 가구 이상 포함시키라는 등 별의별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공공’이란 수식어를 믿고 벌이는 짓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공공성’을 내세운 정책은 대개 실패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뉴욕 보스턴 등이 임차인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월세 상한(上限)을 정해 놓은 적이 있었다. 사업자들은 수지가 안 맞는 임대 아파트를 세우지도 않았고 기존의 임대주택을 보수하지도 않았다. 결국 집을 구하기가 어려워졌고 도시 자체가 낙후되어 갔다. 존슨 대통령 시절에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를 안정시킨다면서 도시마다 거대한 공공주택 단지를 건설했다. 오늘날 공공주택단지는 범죄와 마약의 소굴로 전락해 버렸다.

학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선진국에서 국립대학을 독립재단 형태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고, 자립형 공립학교를 세우는 것도 모두 공립학교가 중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학교 교육이 이 모양이 된 데는 공립학교는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고, 온갖 규제로 손발이 묶인 사립학교는 자주성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그대로 놔두고 개방이사회를 두어 사학의 ‘공공성’을 강화하겠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중고등학교 선택권과 TV 뉴스 선택권을 오래 전에 상실한 우리 국민이 그나마 누려 온 것이 신문 선택권이다. 이른바 개혁세력은 조선 동아 등이 과거 정권에 편승해서 사세(社勢)를 확장했고, 무가지를 배포하는 등 불공정거래에 앞장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가 발행하는 어떤 신문은 신문 이름을 바꾸는 등 별짓을 다했지만 기로에 서 있고, 무가지 공세를 가장 많이 펼쳤던 또 다른 어떤 신문도 비슷한 처지이다. 정부가 ‘공공성’을 내세우며 조선 동아 등 국민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신문에 족쇄를 채우려 하는 이유는 너무나 뻔한 것이다.    

언론관계법과 사학법을 개정하려는 세력이 교묘하게 언어를 교란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데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사실 KBS와 MBC는 공영방송이 아니라 ‘정부방송’이다. 공립학교는 공공성이 있는 학교가 아니라 정부가 소유 운영하는 ‘정부학교’일 따름이다. 현 정부는 그나마 민간이 훌륭하게 운영하고 있는 사립학교, 민영방송 그리고 중요 신문을 장악하기 위하여 ‘공공성’이란 ‘주술적(呪術的) 용어’를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1980년대에 성행했던 ‘민중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심코 들으면 ‘민중민주주의’는 국민 대중에 뿌리를 둔 민주주의라든가, 또는 국민 대중을 생각하는 민주주의 정도로 들린다. 그러나 ‘민중민주주의’란 사실 ‘계급혁명론’이었다. ‘민중’이란 간판을 내건 지독한 좌파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용어를 혼란시키는 것은 좌파의 상투적 전략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진보’라고 부르지 않는가.

많은 사람에게 ‘민중’ ‘진보’ ‘공공성’ 같은 용어는 ‘특권층’ ‘보수’ ‘사유재산’ 보다 더욱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공공성’이란 주문(呪文)을 내세운 개혁은 선택과 경쟁에 기초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미래한국  2005-12-26 오후 8:43:00    



[ 2005-12-28, 23:50 ] 조회수 :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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