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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韓·日 강제병합 100年, 내일을 말한다]'對日청구권 담판' 秘話 털어놓은 김종필
김민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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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단독] [韓·日 강제병합 100年, 내일을 말한


다]'對日청구권 담판' 秘話 털어놓은 김종필

 

 

  •  입력 : 2010.08.28 03:09 / 수정 : 2010.08.28 11:52

[韓·日 강제병합 100年, 내일을 말한다] [1]
日, 처음엔 "8000만弗 내겠다"
'박정희 8억弗 훈령' 들이대자 오히라 외상, 자리에서 '벌떡'
60년대초 남한, 北보다 가난
경제개발 '종자돈' 마련 위해 배수진 치고 '6억弗+α' 관철

조선일보는 일본 마이니치신문과 '한·일 강제병합 100년, 내일을 말한다' 시리즈를 공동기획, 그 첫 번째로 한·일 청구권 협상의 당사자인 김종필(JP) 전 총리와 일본 총리 중 첫 공식 방한(訪韓) 기록을 갖고 있는 나카소네 전 총리를 인터뷰했다.

JP는 지난 25일 청구동 자택에서 가진 특별인터뷰에서 1962년 11월 12일 '김-오히라 메모' 합의를 이끌어내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의 물꼬를 튼 당시 오히라 일본 외상과의 3시간 30분여에 걸친 담판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JP는 "3시간이 넘어서야 실마리가 풀릴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했다"면서 "오히라는 이 자리에서 '8000만달러가 최대한'이라며 처음으로 '청구권 자금' 숫자를 꺼냈다"고 말했다. JP는 "오히라가 이는 이케다 총리가 지시한 금액이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JP는 "당신과 (세 시간) 얘기하는데 커피 한 잔도 안 주는 인색한 나라가 8000만달러는 무슨 8000만달러냐고 쏘아붙였더니, 오히라는 '아 죄송하게 됐다'면서 비서실 문을 여는데 기자들이 꽉 차 있더라"고 했다.

그는 이때 "일본 전국시대의 끝을 보게 한 오다 노부나가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라'고 했고, 그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거든 울려보자', 또 그 뒤를 이어 260년 이상 막부를 차려 일본을 지배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려보자' 했는데, 지금 여기서 필요한 것은 두견새를 울려보자고 한 도요토미 아니냐고 했더니 오히라가 그때서야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1962년 11월 12일 일본 외무성에서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오히라 일본 외상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을 벌이고 있다.
이후 본격 대화에서 JP가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협상 카드인 '8억달러'를 처음 꺼내자, 오히라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둔우(鈍牛·오히라의 별명)처럼 걸어다녔다고 한다.

JP는 "한 시간쯤 더 격렬한 논의 끝에 최종 '6억달러(무상 3억·유상 2억·민간차관 1억달러)+알파'안을 제시했고, 고민하던 오히라 외상이 '나는 이제 죽었다'면서 이를 수용해 메모 작성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그는 또 "당시 '나라 팔아 먹은 매국노 이완용'이라고 욕먹을 각오로 협상에 뛰어들었다"면서, "이후 8억달러의 청구권 자금으로 포철을 세우고 고속도로를 깔았고, 대한민국의 경제개발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당시 한국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절대빈곤국인 데다 모든 게 북한에 뒤지던 상황이었다"면서, "국민의 반대라는 어려움에도 정권의 운명을 걸고, 일본 자금을 끌어들여 경제정상화를 꾀한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평가받을 만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한일 국교정상화‘물꼬’를 튼‘김·오히라 메모’.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이 합의한 비밀 메모로‘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알파’등의 내용을 담았다. 지난 2005년 8월 26일 한일협정 관련문서 비밀해제로 처음 공개됐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김종필(JP) 전 총리는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을 서두르기 1년 전 정부 예산이 400억원,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124달러, 남한은 84달러 였다"면서, "세계최빈국인 우리에겐 당시 자원도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고, 가난한 한국에 돈을 꾸어줄 나라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JP가 '6억달러+알파'라는 '김-오히라 메모' 합의를 이끌어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이후 정부 간 공식협상이 타결국면으로 치닫던 1964년 6월 서울에선 연일 '한·일협정 반대데모'가 열려 '박정권 하야하라'는 구호가 나오는 6·3사태로 이어졌다.

JP는 5·16 주체세력이 한일 국교정상화에 나선 배경에 대해 "제1차 경제개발 시드머니를 마련하고, 일본열도를 거쳐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적 판단에서 였다"고 했다. 그는 또 "당시 박정희 의장이 '8억달러 카드'를 훈령으로 내려보내는 등 (두 사람 간) 긴밀한 협의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JP는 한일 국교정상화협상에 참여하면서 '친일파'로 몰릴까 고민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래서 두 번이나 쫓겨 나갔어. 1963년에 한 번 쫓겨 나가고, 그 다음에 애들(대학생들)이 막 떠들어서 쫓겨나가고. 그때 걸림돌이 청구권인데, 혁명도 한 놈인데, '좋다', 할 사람이 없으면 내가 하지요. 박 의장에게 그렇게 말해 내가 나서게 됐다"고 했다.

한국에선 박 의장이 최고회의를 통해 '김-오히라 메모'를 곧바로 승인했다. 그러나 유럽순방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이케다 총리는 격노했다. 오히라 외상은 이때 "네가 총리냐"는 막말까지 들어야 했다. 이케다가 이를 받아들인 것은 이해 12월 25일이었다. 그러나 오히라는 목이 달아나지 않았다.

[InfoGraphics] 한반도 운명을 가른 5개 조약 인포그래픽스
[ 2010-08-30, 10:15 ] 조회수 : 2363
출처 :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