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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민족』을 남용(濫用)하고 『화해』를 오용(誤用)할 것입니까.(임광규 변호사)
 
다음은 광야의소리  http://www.aware.co.kr 에 있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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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민족』을 남용(濫用)하고 『화해』를 오용(誤用)할 것입니까. 
 
 

임광규 베네딕도 (신광동본당)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의 부회장]
 

 1. 얼마 전에 새천년복음화연구소장이라는 분이『사회교리를 통해본 민족화해와 일치』라는 글을 써서 명동성당 구내에서 발표하였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민족』과『화해』를 함부로 쓰면서 흡사 사회교리처럼 보이게 하려는 교회안의 일부 세태를 보고 걱정하는 분이 보낸 것이어서 읽어보았습니다.
 
 이 글의 중요부분 4가지를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늘의 북한 사회는 마치 탕자처럼 사회주의 실험에 실패하여 빈털터리가 되고, 설상가상으로 1994년과 1995년에 심한 가뭄과 홍수로 심각한 기근을 겪게 되어 수십, 수백만 명이 희생되는 재난에 봉착했다. 그러자 북한은 탕자처럼 1995년 대홍수로 인한 재난의 심각한 피해를 국제사회에 알리면서 도움의 손길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이때 국제사회와 남한은 북한의 인도적 지원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서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과 북한에 인도적 지원사업을 전개한 국제사회나 남한 지원단체들의 모습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성서에 나오는 아버지는 탕자가 자기 잘못을 고백하는 것을 기다릴 틈이 없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탕자가 아버지께 죄를 고백하고 아들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토로했지만, 아버지는 아랑곳없이 좋은 곳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껴주면서 아들로서의 신원이 회복되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가 15, 24)고 기뻐한 아버지는 큰 잔치까지 벌였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남한에서는 대북 인도적 지원에 나서기에 앞서 그들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숨기지 않았다. 철의 장막보다도 굳게 닫아걸었던 빗장을 열고 나온 그들의 어색하고, 방어적이며, 세련되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의혹과 경계의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쌀을 보내지 못하게 했고, 쌀을 보낼 만큼 진전이 되었을 때에도 군인들에게 배급되어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빼놓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 단체는 이보다 덜했지만, 그 역시 여러 가지 룰을 강조했다. 분배의 투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북한사회체제에 익숙지 않은 요구를 하게 되고, 이를 주저하는 북한 당국자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물론 그 결과 북한사회의 빗장을 억지로라도 열어 보이게 만드는 효과는 가져왔지만, 그것이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에 모든 것은 내맡기는 것과 같은 일치에의 길을 열어놓지는 못했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만 매몰되지 않고, 신앙적으로 영성적인 접근을 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영성의 눈으로 이 모습을 통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화해의 측면에서 볼 때 북한의 인권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실 일반적 또는 보편적 의미의 접근은 복잡할 것이 없다. 오히려 단순명료하다. 미국과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작성한 북한 인권보고서에서 나타나는 제반 사실들 즉 수십만 명에 이르는 정치범들을 수용하고 있는 강제수용소의 존재와 공개처형, 사상․양심․종교․집회․결사․정보접근 등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제약과 여행 제한, 식량난으로 인한 대규모 탈북자 발생과 탈북자에 대한 잔혹한 처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집단체조와 카드섹션에 동원되는 북한 주민,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없는 북한의 대규모 기아사태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북한 정권에 책임을 묻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의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시각은 결국 북한 사회의 민주화 즉 폐쇄적이며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 정치체제의 변화만이 궁극적인 해결의 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만약 이러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그 장애요인인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촉진하는 것이 해결의 지름길이라는 점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일반적 또는 보편적 의미의 접근이 자칫 냉전구조하의 체제중심적 접근과 판단에 머물게 될 위험성을 지적한다. 즉 이러한 접근태도는 북한사회의 자체변화 요인을 간과함으로써 결국 외부적 압력에만 의존하게 만들게 되어 마치 수술은 성공해도 환자가 죽어버리는 불행한 결과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현실적 위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2001년 9월 21일에 유엔인권위로부터 B규약에 대한 심사를 받고 상당수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개선을 추진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 4월 16일에 유엔결의안이 또 다시 채택되자, 이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EU의 결의한 제출 경위 자체가 인권문제와는 상관없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하면서 강력히 반발했다. 북한은 이라크 전쟁문제로 사이가 벌어졌던 EU가 북한 핵문제를 구실로 북한을 압박해 들어가는 미국의 적대정책에 편승하면서 북한을 희생양으로 삼아 미국과의 관계복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결의안 채택을 강행했다고 비판했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이러한 접근태도를 제국주의적 접근으로 판단하며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러한 시각 차이는 북한인권문제의 개선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위험이 없지 않다. 북한의 인권상황이 열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개선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요되기보다는 스스로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사회 교리에 입각한 민족화해적인 입장은 북한이라고 하는 사회체제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섭리의 손길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된다.』
 
 
 『당시(1998년 10월) 북한 조선천주교교인협회 장재철 위원장이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를 통하여 주교회의 의장 정진석 대주교에게 자금과 물자의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가톨릭대학교와 북한 교수의 교류를 제안하고, 이십만 달러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 사실이 이 회의에 보고된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는 북의 지원 요청과 교류 제안에 대하여 주교회의 의장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아마도 이십만 달러의 현금 지원 요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민족화해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현금 지원 요청에 대한 대응은 다른 형태의 지원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탄력적인 대처가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때 북측과의 보다 적극적인 협의를 통해 가톨릭대학과 북한 교수 교류 제안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면, 한국교회 차원의 민족화해라는 실천 영역은 상당한 변화를 맞이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기회를 성사시키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로는 교계제도를 갖추지 못한 북한 천주교 공동체에 대한 남한 교회의 신뢰가 부족한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썼습니다.
 
 
 요컨대, 북한지역의 김정일 등 지배계층이 뉘우치고 용서를 빌고 있으니(지배계층 때문에 처참하게 살고 있는 북한지역의 동포들은 낭비한 탕자들이 아님) 화해해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로 시작하여, 인권에 대한『일반적 또는 보편적 의미의 접근이 자칫 냉전구조 하의 체제중심적 접근과 판단에 머물게 될 위험성』이 있고『북한은 국제사회의 이런 접근태도를 제국주의적 접근으로 판단하여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고 있』으니『북한 인권문제의 개선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위험이 없지 않다』면서『(북한) 스스로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빙빙 둘러대며 비참한 동포를 외면하자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사회교리에 입각한 민족화해적 입장은 북한사회체제의 한계를 인정하자는 것』『섭리의 손길을 기다리자는 것』이라는 논리로 나가다가, 결국 편리하게도『1998년 북한의 조선천주교교인협회 장재철 위원장이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를 통하여 주교회의 의장 정진석 대주교에게 20만 달러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응하지 않은 것이『북한 천주교 공동체에 대한 남한교회의 신뢰가 부족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에는 장재철이 대표하는 천주교 공동체가 있는데 왜 이를 믿지 않고 20만 달러 등 지원을 안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2. 천주교 사회교리에 입각한 민족의 문제라는 말을 하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미국사람과 대하거나 캄보디아사람과 대할 때에는 이렇게 하다가도, 한국 민족끼리는 저렇게 달리 대해야 한다는 무슨 천주사회교리가 있는 것처럼 호도하면 안 됩니다.
 
 『네(아브라함)가 나에게 순종했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다.』(창세기 22장 18절)
 
 『많은 민족이 세상 모든 곳으로부터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상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있을 것』(마태오 8장 11절)이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계시대로 다른 민족인 로마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에게『어떤 민족출신이든 당신을 경외하고 옳은 일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신다.』고(사도 10장 35절)고 말합니다.
 
 도대체『우리 민족끼리』라는 편협한 태도가 가톨릭 교리 안에 자리 잡을 좌석은 따로 없습니다.
 
 
 그래도『우리 민족끼리』를 말하면 어디 한번 해 봅시다. 남한 동포들이 북한 동포에게 적대한 적은 없습니다. 북한 동포를 그 비참에서 헤어나게 하고 싶어 마음고생은 하고 있어도, 북한 동포에게 악의를 품은 남한 동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묘하게 북한 동포와 북한 동포를 오늘의 비참으로 몰아넣은 그 지배계층을 한데 뒤섞는 꼼수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북한 동포에 대한 연민을 이용하여, 그 지배계층과 그 체제를 도와주게 하는 사기수법에 민족화해란 말을 붙이는 것은 언어의 남용(濫用)입니다.
 
 남한에서 1980년대에 주체사상운동의 핵심 분자로 암약했던 강길모씨가 과거의 자기 활동을 반성하면서, 2007년 4월 20일에 강연하였습니다;
 
 “북한 권력과 북한 인민 또는 주민 동포들을 구분하지 않고 그저 북한에 대한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오도된 또는 기만적 어법입니다.”“누군가 막 두들겨 맞고 있는데 그 옆에서 팔짱끼고 말로만 평화를 역설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맞고 있으면 일단 말려야 합니다.”
 
 도대체 인권을 말하는데, 같은 한민족이니까 북한 동포의 인권은 김정일 체제가 스스로 풀어가도록 유도하자는 글 솜씨는 무슨 논리입니까. 김정일도 같은 민족의 한사람이니까 그의 불의에 눈감자는 말로 들립니다. 
 
 
 탈북난민을 내 이웃처럼 여겨 그들의 고통을 널리 알리고 구출하려는 분들은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누구든 이 시대에 예수님을 구출하는 축복받을 분들입니다. 북한 동포의 인권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마음 아파하고 항의하는 분들은 한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독일인이든 누구든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왜 그러지 말자고 하면서 사회교리라고 합니까?
 
 
 3. 천주교 사회교리에 입각하여 말한다면서, 오늘의 북한 동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김정일 체제의 한계를 인정해 주고 화해하자고 주장하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한 사람들이 북한 동포들과 화해할 일은 새삼스레 없습니다. 애초부터 남한 사람들은 북한 동포들을 애처롭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합당하게는 얼마든지 도와주려 하는데 새삼스레 화해라니오? 
 
 속셈은 김정일 등 북한 지배계급과 서로 화해하자는 아닙니까? 김정일과 그 수하 지배계층을 한편으로 두고, 남한의 사람들을 다른 한편으로 두어 서로 좋은게 좋은거라고 상대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 대신 북한 지배계층의 발아래 짓밟힌 북한의 보통 인민들은 열외로 제처 놓고 잊어 보자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한반도는 정의에 눈 감고 억눌린 사람을 외면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까? 
 
 
 2007년 4월 24일 북한인민군 창설 75주년을 하루 앞두고 노동신문은『오늘은 비록 배를 굶더라도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고 군대를 강군으로 온나라를 철벽의 요새로 전변시켜 나가는 인민들에게는 휘황한 미래가 펼쳐지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외신보도는 북한 인민군창설 75주년에『핵보유국』이라고 쓴 대형 카드섹션 연습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궁핍과 대량살상무기를 병행하면 강도가 되는 길 밖에 다른 무슨 길이 있습니까? 강도의 전 단계가 우선은 그냥 신사적으로 달라고 말해 오는 것입니다. 
 
 핵으로 남한 동포들에게 공갈하는데, 북한 동포를 이 지경으로 만든『김정일 체제의 한계를 인정해주』고 돈과 물자를 원조해주는 것을 화해라고 부르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천주교 사회교리까지 끌어들이는데 이건 언어의 희롱(戱弄)이고 지독한 오용(誤用)입니다.
 
 
 공갈배나 강도가 그 짓거리의 시작을 못하게 하는 것은, 그래 보아야 소득이 없다는 강도의 판단이 들도록 하는 선량한 사람의 단호한 대비태세입니다.
 
 궁핍과 대량살상무기를 병행하는 북한 지배계층의 요구대로 돈과 물자를 도와주기 시작하면 그 종착역은 침략의 밥입니다. 
 
 마이클 노박의 지적을 빌리면, 예수께서는『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은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지,『평화를 입으로 말하는 사람』이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의로운 자가 단호할 때 비로소 평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악행을 선행이라고 말하고 선행을 악행이라고 말하는 자. 어두움을 밝음이라 말하고 밝음을 어두움이라 말하는 자, 쓴 것을 단 것이라 말하고 단 것을 쓴 것이라 말하는 자는 그 장래의 파멸이 확실하다』(이사야 5장 20절)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요한사도는『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 사람은 집으로 초청하지도 말고 도와주는 말도 하지 마시오. 그렇게 도와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의 악행에 가담하는 것이오』(요한 제2서간 10장 11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화해』에 관한한 소비에트의 스탈린주의를 그대로 닮은 것이 김정일 체제입니다.
 
 소련은 상대방인 자유세계 안에서 화해무드를 끊임없이 증진시키는 공작을 하였습니다. 그래야 화해주의자(pacifists)들이 득표를 더 해서 자유세계의 방위태세가 허약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소련 국내에서는 서방과의 화해를 주장하자는 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소련 국내에서 오레그 라진스키가 서방과의 화해를 주장하자, KGB가 그를 즉각 체포하였습니다. 알렌산더 샤트라브카도, 블라디미르 미센코도 세계와의 화해를 위한 행진을 했다고 제꺽 제꺽 체포하였습니다. 그들은『국가에 대한 반역죄』를 범했기 때문에 시베리아 중노동형에 처해졌습니다. 소련의 궁핍과 무력증강을 병행하는데 지장이 되니까요. 
 
 북한에서 어느 동포가 남한과 서로 사이좋게 왕래하고 서로 의견을 들어야 화해가 될 것 아니냐고 제안했다고 합시다. 역시『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사형 내지 중형에 처해집니다. 북한에서는 더욱 더 심하여 감히 누구도 라진스키, 샤트라브카, 미션코의 흉내조차 내지 못합니다. 요컨대 김정일의 전략은 남한의 화해무드와 북한의 강성선군(强性先軍)의 협박을 배합하는 것입니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서 1983년에『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개입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올바른 크리스천이고, 불의 앞에 굴하거나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올바른 크리스천』이라고 언명하므로 써, 전체주의 등 반인륜체제와의 화해주의를 교회교리로서 확실하게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억울하게 사형 선고된 사람들을 구해주라. 한발 물러서서 그들을 죽도록 내버려주지 말라. 네가 몰랐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말라. 하느님은 모든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너를 보고 계신다. 하느님은 네 영혼을 보고 계시고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을 그가 한 것에 맞게 심판하신다.』(잠언 24장 11절 12절)
 
 『악한 자에게 ‘너는 무죄다’라고 말하는 판사는 많은 사람과 여러 나라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죄지은 자에게 유죄판결을 하는 판사에게는 축복이 쏟아질 것이다』(잠언 24장 24절 25절)
 
 
 남한 사람들과 그 정부는 북한 사람이든 그 지배층이든 간에 북한에 대하여 침략한 일이 없습니다. 핵무기를 제조하거나 화학무기를 대량비축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핵무기를 만들어놓고 화학무기를 대량 비축해놓고 남한사람들의 선거권행사를 타깃으로 하여 남한사람들이 누구를 뽑으면 전쟁이 난다고 겁주고 있는 북한지배층과 어떻게 하는 것이 화해인가요?
 
 침략을 협박하는 자의 요구를 들어주자면서『전쟁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의 협박에 동조하는 일방적 화해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권고는 실질적으로『죽는 것 보다는 노예가 낫다』는 연명(延命)주의자(survivalist)의 셈법을 가지고 있습니다(적어도 내통자가 아니면서 일반적 화해주의자라면).
 
 이를 두고 바이겔은『신앙의 포기이며 새로운 잡신종교에 대한 길 내주기』라고 평합니다. 
 
 해(害)를 피하려고 악(惡 )앞에 엎드려 복종하는 것은 정당한 크리스천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비크리스천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크리스천에게 70번을 7번이나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신음하는 북쪽동포들을 짓밟으면서 이웃 남쪽동포들에게까지 협박하는 북한 지배층의 요구를 들어 주자면서, 뉘우치는 탕자에 대한 『용서』라든가 『화해』라든가의 용어를 함부로 갖다 붙이는 것은 언어의 오용(誤用)입니다.
 
 『용서』는 잘못한 자가 그 잘못이 끝나고 나서 다시 잘못을 반복할 의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할 때, 잘못한 일을 당한 사람이 앙심을 품지 않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인민의 인권유린을 그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 지배층과 체제에게 『미리 용서』를 해 두는 것은 인권유린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죄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화해』는 서로 앙심을 품지 않고 따뜻하게 지내자는 약속을 의심거리 남기지 않고 거짓 없이 지켜나가는 동안 비로소 유지됩니다.
 
 버젓이 배를 굶더라도 핵보유국을 추구하는 사태를 그냥 놓아두고, 『그냥 화해』가 유지된다고 어리석게 믿으면 남한의 자라나는 후손의 안전에 대한 죄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4. 솔제니친은『수용소군도』책을 쓰면서『이 책은 허구의 인물이나 허구의 사건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이나 지명은 모두 실명 그대로 표기되었다. 머리글자로 불리어지는 이름들은 그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에서다. 만약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인간의 기억력이 다 기억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습니다.
 
 『태백산맥』소설을 써서 청소년들로 하여금『대한민국 경찰은 악, 공산 빨치산은 선』이라는 허위내용을 역사의 진실처럼 착각하게 한(발간되었을 때 이래 수많은 청소년들이 이를 읽고 지금도 실록 다큐멘터리로 알고 있슴) 우리나라 소설가가 고발당하자, 이 소설은 허구(fiction 가짜)인데 허구를 꾸미는 예술을 형사 처벌할 수 있느냐고 주장하였습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의 경우는 그런 가짜가 아니고 자기의 인격과 생명을 걸고 쓴 진실의 기록입니다. 『수용소군도』의 수천가지 스토리 중 하나라고 사실과 틀린게 있었으면, 1974년 솔제니친이 추방된 후에 소비에트체제가 그 틀린 것을 캐내어 선전하였을 텐데 그런 선전이 없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수용소군도』에서 솔제니친은『이미 세상을 떠나 이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친다.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회상하지 못하고 또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리지 못한 나를 그들이 용서해주기를 바라면서』라고 적어 놓고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의 지식인들 일부가 같은 민족이라고 입을 크게 벌리고 말하고 함부로 글을 쓰면서, 북쪽 동포들과, 그 동포들을 오늘의 이 처참으로 몰아넣은 그 지배층을 구분하지 않고,『민족화해』라는 두루뭉수리로 만들고자 하는 것을, 역사는 부끄러운 일로 기록할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지금 외국에 나가서 관계자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국인인 것이 부끄러워지는 때가 있습니다.
 
 
 수용소군도로 돌아가 봅시다.
 
 『1922년 봄에「체카」(소련 비밀경찰)는「게 ․ 페 ․ 우」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본시 반혁명분자와 투기모리배 숙청의 임무를 맡은 이 기관이 이번엔 종교문제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종교혁명>도 아울러 수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종교혁명이란 교회 지도층을 <한쪽 귀는 하늘에 기울이고, 다른 한쪽 귀는「루안비카」(소련 비밀경찰의 감옥)쪽에 기울이는 사람들로 대치시키는 일이었다. 혁신교회파가 그것을 약속하고 나섰으나, 외부의 도움없이 그들 자신의 힘만으로는 교회기관을 지배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총대주교(總大主敎)「티혼」이 구속되었고 뒤이어 두개의 큰 재판이 벌어지고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즉「모스크바」에서는 총대주교의 호소문을 전파한 자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고「페트로그라드」에서는 교회 지도권을 혁신교회파에 넘기는 것을 방해한「베니아민」대주교에 대한 재판이 있었던 것이다.
 
 각 지방마다 대주교와 주교가 구속되었다. 언제나 그렇든 큰 고기를 잡은 다음에 송사리떼에까지 그물을 던지는 법이다. 일반 사제(司祭)들과 수도자들, 심지어는 부제(副祭)들까지 투옥되었다. 그것은 혁신교회파의 교회개혁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하여 날이면 날마다 성직자들을 무더기로 긁어들였고「솔로브키」감옥에는 각 층마다 그들의 백발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20년대 초기에는 성령신앙자, 신비가(神秘家), -「팔렌」백작 일파는 성령과의 대화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각종 종교단체,「베르쟈예프」파 철학자들이 투옥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동방「가톨릭」파,「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추종자들,「아브리코소바」일파도 숙청되었다. 그리고 다음엔 일반「가톨릭」신자와「폴랜드」신부들에게 손이 뻗쳤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게 ․ 페 ․ 우」와 NKVD(게․페․우의 후신)의 중요 목표 중의 하나였던 종교의 박멸은 정교회의 일반 신자들의 대량 투옥으로서만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러시아」풍속도를 그 수도복으로 검게 수놓았던 수도사와 수녀들은 특히 집요한 탄압을 받았으며 투옥되거나 유형되었다.
 
 교회의 적극분자들은 모조리 처형되었고 종교적 서클도 모두 해체되었다. 나중에는 일반신자들, 노인들과 부녀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긁어 들였는데, 특히 부녀자들은 끝까지 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에 유형지나 수용소에서는 오랫동안 <수녀님>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하기는 그들이 처형된 것은 신앙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자기 신념을 공공연히 입밖에 내서 말하고 아이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라는 편이 옳을는지 모른다. 「타냐 ․ 호드케비치」도 이런 시를 쓰지 않았는가.
 
 
 너는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다.
 
 오직 하느님만이 혼자서 듣도록.....
 
 
 이 시 때문에 그녀는 10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인간이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자기 아이들에게까지 숨겨야만 한단 말인가! 자녀에 대한 종교교육은 20년대부터 58조 10항, 즉 반혁명 선동죄로 간주되었다. 물론 재판정에서 신앙을 부인할 수도 있다.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아버지는 신앙을 부인하고 어머니는 끝내「솔로브키」수용소로 간 경우도 있다(이 20년대에 특히 부녀자들은 신앙에 대한 놀라운 강인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종교범들에게는 예외 없이 그 당시의 최고형인 10년형이 선고되었다.(깨끗한 사회질서를 위해 대도시에서 숙청작업을 진행하던 이 시기에, 특히 1927년에는 <수녀님>들과 함께 매춘부들도「솔로브키」수용소로 유형되었다. 죄 많은 지상 생활의 애호자인 그들은 훨씬 가벼운 3년형을 받았다. 숙영지나 중계소에서, 심지어는「솔로브키」에서도 그들은 상관들이나 경비병을 상대로 아무런 방해 없이 자기들의 유쾌한 직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3년 후엔 묵직한 트렁크를 몇 개씩이나 들고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여자 종교범들은 과연 언제나 사랑하는 자식들한테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대종교 투쟁의 밤>인 1929년「크리스마스」전야에「레닌그라드」에서는 지식층 종교인을 대량으로 구속했다. 그리고 1932년 2월에는 많은 교회를 일시에 폐쇄하였으며 성직자들을 한꺼번에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그러나 그 밖의 장소와 날짜에 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비록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종파라 할지라도 박해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929년「소치」와「호스타」사이에 위치한 <공동 마을>사람들이 한꺼번에 투옥되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생산도 분배도 공산주의적 방법으로 철두철미 정직하게 운영했다. 국가 권력 하에서는 백년이 걸려도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너무나 유식했고 종교 서적을 너무 많이 읽어서 무신론을 자기들의 철학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들 속에는 많은 침례교도와「톨스토이」주의자 그리고「요가」행자(行者)까지 섞여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공산체계>는 해독을 끼치는 것이서서 민중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20년대에「톨스토이」주의자의 커다란 집단이「알타이」산맥 기슭으로 추방되었다. 그들은 거기서 침례교도들과 함께 <공동마을>을 건설했다.「쿠즈네츠키」공업단지가 건설될 때 그들은 식량을 공급했다. 그러나 곧 검거선풍이 휘몰아쳤다. 맨 처음에 교사들을 잡아들였다(국정교과서에 따라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자동차 뒤를 쫓아 달려갔다. 다음엔 마을 지도자들을 검거했다.』
 
 『이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비밀경찰 끄나풀이 될 것을 거부할 사람에 대한 보복(여기에는 고해성사의 비밀을 고수한 신부들도 포함된다. <기관원>들은 종교의 유일한 이용가치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알아내는데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 한국인에게 낯익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북쪽와 남쪽(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에서도 그렇게 당했으니까요.
 
 북한 공산 정권은 1949년 1월, 원산교구 덕원 베네딕도 수도원의 경리 책임자였던 엄(Pius Emmerling) 신부와,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공장 책임자였던 배 그레고리오 수사가 정치보위부에 강제 연행되어 간 후 영영 소식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해 5월 9일, 내무서원 수십 명을 태운 트럭 한 대가 덕원 수도원에 도착하더니, 원산교구장 신(辛) 주교와 수도원장 홍(洪, Lucius Roth) 신부, 부원장 안(Schleicher Arnulf) 신부, 덕원 신학교 철학교수 길(Rupertus Klingseis) 신부 4명을 체포, 연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어서 원산교구의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체포하고, 나아가 함경남북도 전역의 교회재산 전부를 몰수하였습니다.
 
 1949년 5월 14일 평양교구 홍용호 주교는 종신 허원 예정자들과의 면담을 마치고 오후 4시 50분쯤 서포의 성모수녀원을 떠나면서 마침 심부름 온 김운삼 송은철 두 소년과 함께 평양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홍 주교와 두 소년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 뒤 교화소(형무소)의 한 직원을 통해서 평양시 인민교화소 특별 정치범 감방에 홍 주교가 수감된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1950년 1월부터는 다시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홍 주교는 다른 성직자들처럼 평양시 인민 교화소 특수 감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인 10월 13일에 다른 죄수들과 함께 북쪽으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홍 주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당의 남침이 있기 전까지, 평양교구 소속의 성직자들, 수도자들, 평신도들은 계속해서 체포되어 행방불명되었고, 일체의 교회 재산은 강제로 몰수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북한 천주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침묵보다 더 처참한 일을 강요받았습니다. 1985년 지학순주교가 평양에 가서 만난 그 누님(어려서부터 천주교신앙가운데 자란 분)은 침묵하는 대신 ‘이곳이 천국인데 하느님이 어데 있느냐’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남쪽의 짧은 공산치하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울에서 교황사절 이하 사제, 수도자, 평신자들이 체포 연행되어 가고 행방불명으로 되었습니다.
 
 성모몽소승천 대축일 전날인 1950년 8월 14일 인민군 장교 2명이 충남 합덕성당에 들어와 고해성사를 주시던 백(Perrin) 신부를 끌어가고 현장에 온 윤복수 회장도 태우고, 송산원 복사가 옆에 있다가 신부님 모시는 복사라고 대답하니까 그도 더 태우고 갔습니다. 
 
 서상본당의 고(Jean Colin) 신부도, 당진본당의 코르데스 신부도 압송되었습니다. 예산본당의 이(Richard) 신부, 온양본당의 노(Leleu) 신부도 8월 20일에 감금 이송되었습니다. 대전형무소로 압송된 이 블란서 신부 5분은 그곳에서 9월 하순경에 학살당하였습니다.
 
 합덕본당의 윤회장과 송상원 복사는 9월 29일 당진 군청 내 정치보위부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예산본당의 윤갑수 회장은 9월 27에 성당근처에서 반혁명분자로 사살되었습니다. 서상본당의 백락선 공소회장도 9월 12일에 길거리에서 학살당하였습니다. 
 
 위의 경우들은 남한 내의 북한공산당 점령 지구에서 가톨릭교회 관계자들을 체포 학살한 수많은 사건들 중 몇 예에 불과합니다. 
 
 북한에서든 남한에서든 수많은 천주교 사제들과 회장들이 잡혀갔고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은 굶겨서 죽게 하든, 병들어 죽게 하든, 학살하든 어떤 방법으로든지 숙청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분들이,『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회상하지 못하고, 또 모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우리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공산치하의 소련과 오늘의 북한을 비교하면, 같은 스탈린주의인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솔제니친의 실화를 인용하겠습니다.
 
 『1934년 이라클리 신부는 유형(流刑)중의 신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알마아타로 떠나갔다. 그 동안에 그를 체포하려고 세 번이나 기관요원들이 모스크바의 그의 집을 다녀갔다. 신부가 돌아올 때 그의 교구신도(敎區信徒)들은 정거장에서 그를 맞아 집으로 돌려보내지를 않고 신도의 집에 숨어있게 했다. 신부는 이집 저집으로 옮겨가며 8년이나 숨어 살았다. 그러나 그는 기나긴 은신생활 때문에 녹초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2년 결국 체포되고 말았을 때, 그는 기쁜 마음으로 찬송가를 불렀던 것이다.』
 
 『「골리드만」심문관이「베라 ․ 코르네예바」에게 2백6조(條)를 서명하라고 내주었을 때, 그녀는 자기에게 맡겨진 권리를 이해하고 그들의 <종교집단>에 관련된 17명 전원의 조서를 상세히 규명해보기 시작했다.
 
 심문관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그래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심문관은 그녀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가 싫었던지 그녀를 넓은 사무실로 데려다 놓고 자기 자신은 가버렸다. 그 사무실 안에는 대여섯명 가량의 동료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우선「코르네예바」여사는 조서를 일기 시작했으나, 얼마 후 어떻게 되어선지, 아마 동료직원들도 따분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서로간의 이야기가 오가다가 그녀는 마침내 본격적인 복음설교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를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자유로운 몸일 때 대장간, 마구간, 혹은 주부로 일하는 등 비천한 일에만 종사해 왔지만, 명석한 두뇌와 능란한 화술을 겸비한 훌륭한 여자였다).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들으면서 이따금씩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예기치 않은 기회에 뜻밖의 설교를 듣게된 것이다. 어느새 방안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딴방에서 들으러온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가 타이피스트, 속기사 그리고 서류를 정리하는 사무직원들이었다. 비록 심문관들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들하고 같은 기관, 같은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녀의 독백을 여기서 다 회상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그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성공했다. 조국의 배반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농노제도(農奴制度)시대인 1812년의 조국전쟁(「나폴레온」침략전쟁) 당시에는 왜 그러한 배반자가 없었느냐고 반문했다. 순리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그때 더 많은 배반자가 있었어야 했을텐데! 그러나 그녀는 주로 신앙과 신도들에 대해서 말했다.「혁명 전의 당신네들은 정권을 탈취하려는 자유의지 때문에 수난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는 종교인들이 당신들을 방해했던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서도 가장 행복한 나라를 건설하기를 원하고 있는 이때, 당신들은 왜 이 나라의 가장 훌륭한 시민들을 괴롭히는 겁니까? 그들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인재들입니다. 신자들은 감시할 필요가 없어요. 그들은 도둑질도 모르고 일을 기피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럼 당신들은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와 시기(猜忌)주의자들로 공평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겁니까? 지금 당신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왜 착한사람들의 마음에 침을 밷는 겁니까? 교회에 진정한 기능을 부여하고 교회를 건드리지 마세요. 그렇다고 당신들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들은 유물론자들이지요? 그럼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켜서 믿음을 없애게 하면 되잖느냐 그 말이예요. 왜 체포를 해야 합니까?」
 
 이때「골리드만」심문관이 들어와서 난폭하게 이야기를 가로채려고 했다. 그러나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심문관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이봐 그대로 놔둬! 이야기를 하게 내버려둬!… 」「자, 계속해요, 계속해, 아주머니!」(그녀를 뭐라고 부를 것인가? 시민(市民)? 동무? 그런 호칭은 모두 금지되고 있다. 그들은 결국 임시방편으로 <아주머니!>하는 호칭을 쓴 것이다(그리스도께서도 여인이라 불렀으니, 제대로 들어맞은 호칭이다). 그래서「코르네예바」여사는 자기 심문관이 있는 앞에서 설교를 계속했던 것이다!
 
 비밀경찰 사무실의 종사자들이 보잘 것 없는 한 여죄수의 말에 그토록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소련에서는 사제가 자기 집에서 종교 활동을 하고, 반혁명분자를 돌보러 먼 유형지(流刑地)에 기차타고 가서 성사를 줄 수 있었습니다. 소련에서는 사제가 8년간이나 은신하면서 사제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제가 체포되서는 학살되지는 아니하는 형편이므로 피신의 괴로움에서 풀려 찬송가를 불렀다는 점입니다.
 
 소련에서는 구속된 크리스천 여성이 비밀경찰 조사관실에서 당돌하게도 설교할 수 있었단 말입니다. 
 
 
 이것이 북한에서는 도대체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한국의 북쪽에서는 두만강 건넜다가 잡혀 오는 자 중 그리스교 설교를 들었다거나 성경을 소지하였다거나 하면 가장 악질 반동분자로 몰려 처단을 받습니다. 당시의 소련보다 훨씬 더 가혹합니다. 당의 핵심분자를 천주교 신자로 꾸며 위장시켜서 조선천주교인협회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남쪽을 상대로 20만 달러를 요구하는가 하면, 장충성당이라는 가짜를 만들어 놓고 연출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혹시 옛 천주교신자의 아들 손자가 북한 지배층의 하수인이 되어가지고 조선천주교인협회 안에서 옛적 공과책을 외운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역할을 하는 가능성도 높습니다.
 
 주교를 배출한 가문에서 자란 부인이 ‘이곳 평양이 천국인데 하느님이 어데 있느냐’고 오빠에게 말해야 하는 곳입니다.
 
 
 1983년 미국의 전국교회협의회 소속 목사 2명이 소련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모스크바의 예배중인 어느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러시아인 크리스천들이 ‘이곳은 박해받는 교회입니다’라고 쓴 깃발을 흔든 일로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북한에서 이런 화제는 아예 가능성이 없습니다.
 
 
 솔제니친은 1918년 8월 30일자 소련의 비밀경찰 훈령을 인용합니다.
 
 『사회혁명당원(사회혁명당은 제정러시아에 대하여 레닌의 사회민주당과 함께 싸웠음)은 모두 지체없이 구속할 것이며 브르조아계급과 장교계급에서는 다수의 인질을 확보할 것』『백위군(혁명에 반대한 군대) 활동에 가담한 자는 무조건 총살에 처할 것』
 
 솔제니친은『많은 사람들이 정보원노릇 하기를 거부하였는데 그 때문에 그들은 모조리 가차없이 형벌을 받아야 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북한의 공산주의 지배층은 어떠했습니까.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전면적 남침을 시작한 다음날인 6월 26일 김일성은 방송연설을 통해 남한의 공산주의 세력과 빨치산에게「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요언(妖言)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 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는 지령을 하달하였습니다.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지역을 점령하자 인민군과 좌익세력들은 대한민국에 협력한 사람들 중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경찰이나 군인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을 체포해 인민재판에 회부했으며, 체포를 거부할 시에는 즉결처형을 했습니다. 점령지역에서의 요인 체포와 우익계 숙청은 조선노동당과 전시내각의 주요 사업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인민군은 공무원, 군, 경찰, 학자 등 소위 인텔리 계층을 최우선 대상으로 학살했고, 경찰 가족이나 지방 유지들을 그들의 진지로 끌고 가 처형하였습니다.
 
 북한 지도부는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을「민족반역자」로 규정해 학살했습니다.
 
 내무부에서 발간한「대한민국 통계연감」에 의하면 6 ․ 25전쟁 중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된 수는 122,799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 밖의 자료를 살펴보면,「한국전란지」122,799명,「군정위편람」128,936명「유엔군 총사령부 보고」128,936명,「북한 30년사」128,936명 등으로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6 ․ 25전쟁 중 인민군과 좌파에 의해 학살된 수는 대체적으로 12만-13만 명 정도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적 ․ 돌발적으로 일어나거나 보복에 의한 학살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은폐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집계보다는 훨씬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을 것입니다. 그에 더하여 많은 엘리트 인사들이 납북되어 갔습니다. 1952년 정부에서 작성, 발간한「6 ․ 25사변 피납치자 명부」에 총 82,956명의 납치자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국가적 인적피해가 엄청났습니다.
 
 
 현재 국내 국외에 걸쳐서, 북한 인권에 관한 생생한 스토리가 계속 알려지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의 목숨을 건 발걸음들이 그 스토리의 진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2007년 6월 19일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세계크리스천연대(Christian Solidarity Worldwide)가 소리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한 소리(voice for the voiceless)의 이름으로 보고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의 사망률이 5-10%에 달하고, 극심한 굶주림까지 감안하면 지금까지 사망자 규모가 38만명에서 1백만명 사이가 될 것”이라고 추정하면서“1950년대와 60년대 기독교단체를 대상으로 집단학살이 자행됐을 가능성이 높다”며“종교단체에 대한 학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이 같은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하는 북한 정권을 충분히 압박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목격자들의 다양한 증언으로 미뤄볼 때 “북한정권이 국제법상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한 것으로 판단된다”며“살인과 몰살 ․ 강제노역 ․ 강제이주 ․ 임의투옥 ․ 고문 ․ 학대 ․ 1970년대 일본인 납치사건을 포함한 강제실종 ․ 강간 ․ 성폭력 등을 구체적인 범죄사례로 지목했습니다.
 
 CSW 주선으로 영국을 방문한 탈북자 신동혁(2005년 탈북)씨와 안명철씨는 이날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수와 북한관련 의회그룹 의원들을 만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증언하면서 신동혁씨는“수용소에서 태어났고, 바깥세상이 어떤 줄 모른 채 자랐다”며 자신을 소개한 뒤, “수용소 탈출시도를 한 부모가 공개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부모의 시도 때문에 고문을 당해 등, 정강이 등에 아직 상처가 남아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어 안명철씨는 “북한 내 정치범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5개 수용소에 약 20만 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북한 정권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본인은 물론 3대에 걸쳐 이 수용소에 수감된다”고 증언했는데 1987-1994년 북한 정치범수용소 경비원을 지낸 안씨는 당 간부인 아버지가 취중에 반체제 발언을 한 죄로 부모와 동생들이 수용소에 끌려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은 탈북을 결심하고 중국을 통해 1995년 한국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의 지배층의 일원이었다가 반성하고 탈북한 김덕홍씨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이유는 단지 김일성 ․ 김정일을 믿지 않고 진짜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초상화와 휘장을 잘못 관리해서 훼손시킨 죄목, 6.25때 가족이 월남한 것도 수감대상이 된다. 정치범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는 결혼이나 출산이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온 가족이 함께 수용된 경우에도 부부를 종신토록 갈라놓는다. 결혼이나 출산이 허용되지 않는 법적 근거는 바로‘정치범은 3대를 멸족’시키라는 김일성의 교시 때문이다. 한편, 모든 수감자들은 하루에 12시간씩 휴식 없는 고된 노동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한 법적 근거는‘죽을 때까지 고된 노동을 하면서 당과 수령 앞에 지은 죄를 씻게 하라’는 김정일의 지시이다. 수감자들은 토피(진흙과 볏짚을 섞어서 만든 블록)로 지은 다세대 형식 또는 반토굴 형식의 짐승 우리만 한 집에 온돌을 놓고 짚이나 풀단 등을 깔고 생활해야 하며, 경비대원들이 입던 헐어빠진 옷을 가끔 공급받아 춘하추동 입고 다녀야 한다. 특히 수감자들은 수용소 당국이 공급해 주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감자와 강냉이만으로 식생활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정치범들은 수령을 배신한 동물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중 텔레비전에 자주 기고하고 출연하여 온 요나탄 모리스 신부는 2006년 10월 9일자 방송에서 이렇게 발언하였습니다.
 
 “북한 김정일의 인권유린 사실을 접어둔 채 외면하고서, 실행하려는 어떤 정책제안도 실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악취 나는 정책제안일 뿐이다.”
 
 
 소련의 수용소군도를 접어두고 외면한 인사들이 그 당시에도 꽤 있었습니다. 영국 성공회 캐터베리 주교까지 된 휴렛 존슨은 1931년에“공산주의는 기독교의 조직을 가능하게 하였던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본질적 부분을 회복하였다”고 공언한 일이 있으며, 1940년에는 소련과의 화해를 위한 운동에 기부하라고 호소하고, 1951년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가 소련의 인권을 왜곡하는 발언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소련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을 러시아인들은 방종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러시아인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현대과학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공산주의 신조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방부처리를 위한 수술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인들은 공산주의 신조를 의문시하지 않는다. 수술과정에서 방부제를 무시하는 의사를 나무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산당은 예술가들이 공산주의 신조에 충실해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 좌익에 가담하여 싸웠던 조지오웰이 좌익의 위선을 간파하고 전향한 후에 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로 러시아 전체주의를 옹호하고 있는 어떤 한심한 영국인 교수가 다음과 같이 말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소비에트 정권이 인도주의자들이 개탄하고 있는 어떤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환기에서는 정치적 반대를 할 수 있는 권리가 불가피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러시아 국민들에게 요구되는 희생도 목표달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바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언어의 오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웰은 언어의 명확한 의미를 해치는 것으로서 언어의 실제 의도와 표면상의 의도의 차이를 더욱 크게 하는 불성실함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화해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적에게 전해 주는 인상과 메시지에 관하여, 마이클 노박은; “소비에트 집권자들은, 꽤나 활발한 화해주의자들이 수용소군도에 있는 500만명을 돕는데 손가락 하나 들지 않는 다는 점, 그들이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막아주라는 크리스천의 의무를 포기하였다는 점, 그들이 박해자들을 보고도 이제는 배신할만한 어느 원칙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 그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백성에게 가만있으라고 권하여 박해자를 돕고 있는 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는 빌라도의 병사들을 도와주라는 그 따위 계명은 어디에도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마이클 노박에게 소비에트치하의 인민들은 혈육의 동포가 아니고 지구의 저쪽 편에 있지만, 그는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인민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데 있을 뿐 아니라 우리와는 혈육의 동포인 이웃입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가운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가 체포될 때에 자기와 평소 별로 친분이 없던 직속 여단장이 비밀경찰이 보는 앞에서“당신은 제1 우크라이나 전선에 한 친구를 가지고 있지?”라고 체포사유를 넌지시 미리 알려주므로 써 소비에트 법규위반을 태연히 하면서 인민의 적이 된 자기에게“대위! 당신의 행복을 비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솔제니친이 석방된 후 11년 전의 옛 추억으로 찾아가니 그는 퇴역장군이 되어 사냥꾼협회 검사관으로 있었습니다.
 
 솔제니친은 수용소의 문화교양부(도서실)와 유형생활 중의 지방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는 도서관 여자사서가 열흘에 한번 씩 수감자들의 책을 거두러 와서 다른 책의 주문을 받아 적어 간다고 하였습니다.
 
 북한을 지구상 최후의 스탈린주의 체제라고는 하는데, 북한의 상관이 그렇게 태연하게 반혁명범죄를 저지른 부하를 감싸고도 무사할 수가 있을까요? 북한의 강제수용소에 도서관이 있을까요?
 
 소련보다 더한 비참을 가까이 두고도, 우리 한국에는 휴렛 존슨들이 아주 많습니다.
 
 
  
 
  
 
 
 
입력날짜 : 2007-07-09 (22:23), 조회수 : 20 
[ 2008-10-22, 22:23 ] 조회수 : 4680
출처 : 광야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