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환경주의자』
이상돈
브레인북스 (446쪽)
임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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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의원께 드리는 질의서
헌변
 추미애 의원께 드립니다



1. 머리말
  추의원께서 의정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헌법을생각하는 변호사모임은 추의원께 위로와 치하를 보냅니다. 앞으로 크게 정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은, 대한민국 헌법이 지상의 가치로 받들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200명의 변호사단체입니다. 이 모임은 위 목표의 성취를 위해서, 연구하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등, 다양하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사명감과 애정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치인, 관료, 학자등에게 우리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추의원께 대해서도 이러한 견지에서 몇가지 질의를 하고자 합니다. 혹시 추의원의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나라사랑의 방법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고 받아들여 주시고,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인, 특히 정치인은 국민앞에서 자신의 신념과 정책을 투명하게 밝혀야 할 책무를 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의원이 1999.10. 29. 제 208회 정기국회에서 행한 사회, 문화분야 대정부질문에대해서 헌변은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추의원은 그 날 행한 대정부질문에서 제주 4.3 사태를 다루면서 그 연설의 제목을 "인권유린의 20세기를 정리해야 합니다!!!"라고 부쳤습니다. 위 제목을 보면 추의원은 "20세기"를 "인권유린의 세기"로 단정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른 모든 세기에 비해서 20세기가 특별히 인권유린의 세기로 규정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20세기에는 인권유린이외의 사건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아니하였습니까? 추의원은 이 땅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것도 "인권유린의 20세기"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까?
  

  만약 헌변의 질문제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 추의원은 감정적인 흑백론을 앞세워 자신의 견해와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을 극한적인 언어로 매도하는 절대주의의 신봉자라고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추의원은 제주도 4.3사태를  20세기 "인권유린"의 전형적인 사건으로 부각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제목을 사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선동적인 표현이나 편파적이고 과격한 어휘를 사용하여 국민을 자극하는 것은 공인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 추의원의 어휘와 품위에 대하여
  추의원은 정규대학과정을 이수한 지식과 교양의 소유자입니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법관직을 상당기간 지켰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국가와 국민의 내일을 개척해 나가는 선량입니다. 추의원이, 이러한 경력과 경륜을 가진 국회의원으로서 신념과 가치관을 뚜렷이 밝히는 것은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선량은 다른 사람의 철학과 신념도 존중할 줄 아는 여유와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그것이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비방하고 매도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비방과 공격이, 천박하고 감정적인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추의원은 이 사건 대정부질문에 앞서서 바로 이러한 반교양인의 언어로 정형근의원을 비방하는 포화를 열었습니다. 헌변이 정형근의원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아니합니다. 다만 추의원이 사용한 어휘와 감정의 표출방법이 국민에게 너무 큰 실망을 안겨 주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추의원의 이 감정적이고 편파적인 사고가 제주 4.3 사태를 그릇되게 평가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도 아울러 말하고 싶습니다.

  추의원은, 정의원에 대하여, "오늘도 거짓으로 드러난 정형근의원의 발언이 참으로 딱하기 조차 하다". "모든 것이 정형근 의원의 조작극임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엉터리없는 거짓말, 억지주장, 거짓조작을 일삼아왔다", "염치없으면 목이라도 움츠리는 것이 자라라고 할진대 그만도 못한가? 그래! 궤변을 더 이상 늘어놓아서 혹세무민하지 말도록 충고한다. 그리고 국리민복을 우선해야 할 국회의원이 국회를 마치 미친사람 널뛰는 듯한 그런 모양으로 건전한 상식조차 통하지 않도록 만든 데 대해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추의원은 국회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는 자신의 발언을 냉정한 지성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추의원이 그 글을 다시 읽어보고 난 다음에 자신이 할 말을 했고 적절한 어휘를 사용하였다고 한다면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겠습니다.

3. 노근리사건에 대하여
  추의원은 노근리사건을 제주 4.3 사태와 동일한 성격의 사건으로 보고 대정부 질문의 서두에서 이 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추의원은 "미국의 AP통신"이 노근리사건을 "미군에 의한 무차별양민학살"사건으로 보도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이 이 사실을 밝혀주기까지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채 이 사건을 보고도 못 본척, 들어도 못 들은척했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우스꽝스럽고, 수치스러운"일이었다고 자탄하고 있습니다. 추의원이 지적한 AP통신은 연구논문집이 아닙니다. 더구나 정부문서등을 근거로 한 증거서면이 아닙니다. 그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장병들의 경험담을 모은 인터뷰기사에 불과합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 응한 예비역 군인들이 "우리의 경험담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자신의기억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 기사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AP통신에는 "무차별양민학살"이라는 표현이 전혀 없다고하는 점에 있습니다. 추의원이 "무차별양민학살"이라고 번역하기에 이른 원문은 "US forces killed 400 South Korean refuges"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표현이외에는 추의원의 "학살" 주장에 근접한 어휘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추의원도 아시겠지만 "kill"이라는 말은 "살인"행위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살인"보다 훨씬 넓은 개념을 가진 어휘입니다. man- slaughter(과실치사)는 물론 형사책임의 대상이 되지 아니하는, 결과적 사망원인 제공 (예컨대 태풍이나 재해, 질병등으로 인한 사망등)까지 "kill"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고의적인 살인은 murder 또는 homicide 라고 말합니다. 특히 추의원이 말하고자 하는 "대량학살"에는 massacre라는 말이 쓰여집니다. 그러므로 kill 이라는 말에는 "학살"이라고 하는 "독살"스러운 의미가 들어 있지 아니합니다. 결국 Bollinger등 몇사람이 말한 것으로 되어있는 위의 문장은 "미군의 손에 의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의 난민 400명이 희생되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위 AP기사의 다른 부분에서 더욱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을 옮겨봅니다. "Texas주 출신의 Al Olsovsky 예비역중위는 (노근리) killing에 관해서 아는 바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침략군이 때로는 남한의 피난민으로 가장하기도 하고 피난민대열을 방패로 삼기도 했다". "당시 우리 미군은 8,000명의 행방불명자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위 중위는 말하고 있다""Herman Patteson은 "희생자들 중에는 적군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AP통신이 미군의 비밀문서 가운데서 발견한 예비역들의 인터뷰자료에 의하면 미국지휘관들은 전쟁초기의 절망적인 수주간의 후퇴기간중 위장적군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민간인에 대한 발포명령을 내렸다". "예비역들은 (민간인) 사망자중에서, 위장한 북한병사들의 시체를 발견하였다고 말했다" "Hobart R Gay 소장은 기자들에게 말하기를 당시 미군전선을 압박하던 대부분의 백의집단(白衣集團)은 분명히 북한의 게릴라였다라고 말했다". "Hobart소장의 부대는 피난민대열에 향해서 수없이 경고발사를 가했지만 그들을 되돌려 보내지 못했다. 드디어 어두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수단밖에) 다른 방책은 없었다" AP통신의 기사는 위와 같이 적혀있는데 추의원의, "미군에 의한 무차별양민학살"론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입니까? 이 점에 대한 명백한 답변이 없다고 하면 추의원의, 편견에 찬, 속단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4. 4.3 사태의 성격에 관하여
  추의원은 4.3사태를 "미군과 한국의 군.경에 의한 무차별양민학살과 인권유린"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추의원이 대표발의자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 "제주 4.3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특별법이라 한다) 제 2조 (정의) 제 1호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은 [무장유격대]와 "토벌대"사이에 빚어진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위 규정에 의하면 첫째로 위 법의 주인공은 무장유격대와 토벌대에 의해서 희생된 모든 제주도 양민입니다. 둘째로 무장유격대와 토벌대는 모두다, 양민대량학살의 가해자이고 그 사이에 선, 악과 정, 부정의 우열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쟁점, 즉 추의원이 군과 경찰을 통한 국가권력의 집행과 이에 대한 무장유격대의 폭력적 저항을 동일한 수준에 놓고 평가하는 가치관에 대해서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권력에 대한 폭력적저항과 그 폭력적저항에 대한 군.경의 진압행위를 동일하게 보는 것은 공산주의 폭력혁명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국가의 안보에 대한 수호자로서의 권위를 가지는 한 혁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격하시켜서 이를 단순한 물리적 폭력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 혁명논리의 기초적 요건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위 법안이 "무장유격대"와 "토벌대"를, 마치 국경선에서의 양국군대의 총격사건처럼, "무장충돌"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추의원의 논리를 분석해보면 선량한 제주도민의 증오를 받아 마땅한 것은 무장유격대가 아닌 잔인무도한 토벌대입니다. 추의원이 "오히려 대부분의 희생자가 우리 군과 경찰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그 책임이 우리 정부의 것이기에 더욱 더 간과해서는 안될 중대한 인권유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5. 양민대량학살에 대하여
  추의원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주 4.3 사태"를 "미국과 한국의 군,경에 의한 무차별양민학살사건"으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추의원은 그 "양민대학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달고 있습니다. "장장 7년동안 피흘림이 계속되었던 제주 4.3 사건은 과연 그 희생자 수가 얼마나 될까요? 당시의 제주 인구 약 27만명중 적게는 3만명 이상, 많게는 7-8만명 수준에 이르렀으리라 추정됩니다. 사건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제주 4.3 을 이렇게 어림짐작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은 바로 살아남은 우리들의 나태와 비굴함을 반증하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추의원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3만명 내지 7,8만명에 이르는 제주 4.3 사태 피해자 모두가 "양민"인가 하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한 판단은 첫째로 추의원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무장유격대"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점과 둘째로 "피해양민"이 "무장유격대"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데 따라서 달라진다고 할 것입니다.


1) 우선 무장유격대의 실체에 관해서 살펴봅니다. 추의원은 한라산을 근거로 암약하던 무장유격대가 남로당과 아무런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의원의 이 주장은 판단착오에 의한 실수가 아니면 의도적인 조작에 의한 억지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무장유격대원들은 1948. 4.3 이 사태를 일으킬 당시 "오각별" 공화국 깃발을 앞세우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와 "적기가"("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전사하리라"라는 가사의 노래)와 인민항쟁가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말아라.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이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마는 무장유격대원들은 1948년 5월 10일 거행될 예정이었던 제헌의회의원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선거관리위원들을 죽이고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죽이는 한편, 방화, 약탈을 감행하여 제주도내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선거를 무효화시켰습니다. 그들은 "5.10 총선의 투표에 참여하면 임민의 반역자가 되고 그러한 매국노는 단죄되어야 한다"라는 전단을 뿌렸습니다. 조선공산당 총비서겸 남로당의 실권자였던 박헌영은 "남로당 당원 동지에게 고함"이란 글에서 4.3 사태를 "인민항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무장유격대의 실제가 완벽하게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의원이 "제주 4.3 사태"의 기간을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까지"로 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4.3 사태"는 그 말 자체가 밝혀주고 있듯이 재산무장대(빨치산)의 집단적 무력행사의 출발점인 위 1948. 4.3 부터 기산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추의원이 확립된 종래의 관행적 정의를 파괴하고 4.3 사태의 출발점을 1년 1개월이상 소급시켜서 1947년 3월 1일로 보는 것은, 위와 같은, 4.3 사태의 공산주의 무력폭력성을 희석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교를 부린다고 해서 4.3사태의 공산주의 혁명투쟁성이 변질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민일보가 편저한 "4.3은 말한다"는 4.3시기를 4.3 전.후기로 나누고 "4.3 이 전기"를 제 1,2기로 "4.3 이후기"를 제 1기내지 제 8기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 중 무장유격대의 실체를 밝히는데 참고가 될만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4.3 이전
제1기. 인민위원회 주도기 (1945.8.15.-1947.2.28)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 원회.인민위원회가 전도에 걸쳐 주도권을 장악하던 시기이다.

제2기. 미군정공세기 (1947.3.1-1948.4.2) 3.1 발포사건과 이어 벌어진 전도적인 총파업을 계기로 인민위원회와 미군정의 대립이 본격화된다.

4.3 이후
제1기. 무장대공세기 (1948. 4.3.-5.11)
4월 3일 첫봉기를 시발로 무장대가 공세의 주도권을 쥔 시기이다. 미군정은 더욱 악화된다.

제2기. 경비대주도토벌기 (1948. 5.12.-10.19)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한 경비대의 작전이 강력히 전개된 반면 무장대의 공세는 비교적 약화된 시기이다. 무리한 강경작전으로 주민들을 오히려 도피입산케 한다. 이 무렵 9연대 병사 41명이 입산하는 사건도 벌어진다. 박진경 연대장 암살(6월) 이후 토벌은 더욱 강화되나 제주도에 배속될 예정이던 여수 14연대가 총뿌리를 돌림으로써 상황은 새로운 모습으로 급진전된다.

제3기. 사태의 유혈기 (1948.10.20.-12.31)
  토벌대의 전개로 인명피해가 극심한 시기이다. 토벌대에 쫒긴 무장대는 아지트를 산중 깊숙히 옮기는 한 편 때때로 해안마을에 대해 보복기습전을 시도한다.

제4기.  육.해.공 합동토벌기 (1949.1.1-3.1)
  9 연대와 교체된 2 연대가 도착한 후 무장대의 공세가 한 때 활기를 띠었으나 육.해.공 3군의 합동작전에 의한 토벌이 강화되면서 무장대 세력이 더욱 약화된 시기이다.

제5기. 이하 생략
  위 "4.3 시기구분"을 보면 추의원 자신도 "무장유격대"가 대한민국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집결된 군사조직체였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장유격대의 조직과 규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1957.4.3자 제주신보 보도에 따르면 제주도 인민해방군이라고 불리워진 무장격대의 병력은 19,90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중 군.경 토벌대에 의한 피사살자는 7,893(전술), 귀순자는 2,000명, 피체포자는 7,000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조직과 병력을 살펴볼 때 무장유격대는 다름아닌 공산무장혁명군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이 인민해방군에는 방대한 조직과 인원을 가지고 있던 제주도 남로당조직이 포함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김대중대통령께서 무장유격대의 실체를 공산주의 빨치산으로 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봅니다(한라신문 98.11.24자) 그러므로 제주도 인민해방군을 공비로 보지 아니하는 견해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봅니다. 위 인민해방분기 총사령관 김달삼등이 제주도공산화 실패후에 북한으로 탈출해서 북한의 국가훈장 2급을 받는 한편 거기서 중책을 맡았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 다음으로 추의원이 일컫는 "양민의 실체"를 살펴봅니다. 추의원은 "무장유격대"에 소속되지 아니한 제주도민 전체를 "양민"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역시 위 "4.3 은 말한다"로부터 자료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 중 상황판단에 참고가 될만한 자료중 중요한 부분 몇 곳만 발췌합니다.

"1948년 10월 25일 밤 대정면 모슬봉과 가시오름. 한림면 금오름등에서는 일제히 봉화가 올랐다. 또 마을에서는 무장대 쪽에 가담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왓샤시위"가 벌어졌다 무장대로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한 시위였지만 이는 출동명령만을 기다리던 9연대에게 토벌대상지역을 선정해 준 격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봉화는 9연대 제 3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모슬포의 모슬봉에서도 올라 군을 더욱 자극시켰다. 9연대는 봉화가 오른 대정면 신평리와 일과리, 그리고 한림면 금악리에 즉각 출동 젊은 이들을 눈에 띄는대로 붙잡아 모슬봉 서쪽 일제 때 만든 탄약고 터에서 집단 총살했다" (70-71면)

  "1948년 10월 29일 애월면 고성리에 진입한 토벌군은 우선 무장대은신처를 찾았다. 곤한 잠에 빠져 있다가 불의의 기습을 받은 무장대는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다."(84-85면) 당시 이 마을사람들은 무장유격대원 40여명에게 3,4일간 자기들 집에서 묵게했다고 이 저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4.3 초기엔 무장대가 함덕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함덕지서는 번번이 무장대의 피습을 받았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식량과 의복을 올려 보냈다.

  그러나 1948년 여름께부터 군.경의 강경작전이 벌어지자 대부분의 젊은 이들은 은신생활에 들어갔다....주민들은 집에 숨어지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밤에 몰래 내려온 무장대는 "이제 곧 통일된다. 며칠 있으면 해방된다고 선전하며 여전히 기세를 올렸다...양정근씨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4.3전에 남로당과 민애청에 가입했었습니다. 당시 남자면 누구나 그랬습니다. 아니면 따돌림을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많은 젊은이들이 산으로 피했습니다. 80%이상이 산으로 올랐을 겁니다... 아버지 집 마굿간의 거름 쌓아논 곳에 토굴을 만들어 숨었지요. 숨어지내는 동안에도 토벌대가 세번이나 가택수색을 했어요. 결국 나도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산으로 식량을 올려 보냈습니다. 당시 마을에는 군경원호회가 조직돼 있었는데 모금을 하면 반은 군.경 먹이는데 썼고 반은 산으로 올렸습니다" (431-432면)

  상황이 이렇다면 추의원이 주장하는 희생자 7,8만명이 모두 다 "양민"이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중 적지 아니한 사람들이 "무장유격대"의 동조자였습니다. 그리고 무장유격대가 7년간의 항쟁기잔중 제주도민의 지원과 협조가 없었다고 하면 그 많은 총포와 탄환 그리고 군량미를 어떻게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토벌대"와 관공서를 끌질기게 괴롭힌 신출귀몰의 기습작전이 "제주도 양민"의 정보제공없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계엄군.경에 의하여 체포되어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은 2,971명의 죄명이 내란죄, 살인죄, 방화죄와 국가보안법위반죄였습니다. 추의원은 이러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무장유격대"에 소속된 사람들 뿐이었고 "선량한 제주도민"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면 "내란죄","국가보안법위반죄","방화죄"의 범인들이 어떻게해서 "선량한 도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점에 대해서 추의원이 명백한 반론과 반증을 내어놓지 못한다고 하면 이제 앞으로는 결코 4. 3 사태를 "군경에 의한 무차별 양민학살"이라는 말을 뱉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4.3 사태기간 군.경의 과잉진압 또는 착오, 감정으로 인한 "양민희생"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적 확인절차에 의해서 구제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추의원의 주장처럼, "무차별양민학살"론으로 구제할 문제가 아닙니다. "무차별 양민학살"이란 예컨대 지금처럼 평온한 시기에 군.경이 갑자기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명동거리에 진입해서 총기를 난사하고 포격을 가해서 길가는 행인이나 상인을 참살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4.3 사태는 군대식 무장을 갖춘 공산주의 체제전복혁명투사들에 의해서 국기가 묺어질 긴박한 7년간의 전쟁상태 속에서 군.경이 필사적인 항쟁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상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서 "명동대참살" 같은 표현방법으로 국가권력을 폄하할 수 있습니까?

  추의원은 제주 4.3 사태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토벌대에 의한 양민대량학살"사건의 사례로서 "북촌리사건", "토산리사건", "동광리사건"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지면관계로 위 사건들 중 "북촌리사건"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추의원은 이 사건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구성하고 있습니다. "1947.1.7 아침 일부군병력이 이동 중 북촌마을 어귀에서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군인 2명이 사망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군인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무장대와 내통한 빨갱이 가족을 찾아낸다며 주민 약 300명을 처형했습니다".추의원 주장의 요지는 토벌대 군.경이 아무런 이유없이 북촌리 주민들을 위시해서 수만명의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대량학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추의원처럼, 제주 4.3사태를 "군.경에 의한 제주도민 대량학살사건"으로 보고 있는 제민일보 4.3 취재반이 편찬한 "4.3은 말한다" 4권의 북촌리 부분을 살펴봅니다. "북촌리는 일제때부터 자존심 강한 마을이었다. 해방후에는 항일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주도한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똘똘 뭉쳐있었다. 북촌리는 1947년 8월 13일 마을안에서 총격을 가하기위해 승선한 경찰관에게 뭇매를 가한 소위 '8.13 사건'을 계기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48년 6월 16일에는 북촌 포구에 피항한 배를 조사하던 중 동승했던 경찰관 2명을 살해했다.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서 청년들은 수배를 받아 일찍부터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입산시기도 다른 마을보다 빨랐다"(435면 20행-436면-437면 6행).

"유지들이 산에도 협조하고 토벌대에게도 협조하는 소위 "양면작전"으로 마을을 보호했다"(437면 4행), "입산한 북촌마을 청년들이 마을을 보호해 줬기 때문에 산쪽으로부터의 습격은 없었다. 또 어른들은 산쪽뿐만 아니라 토벌대에게도 협조하는 "양면작전"을 써 강경토벌전을 피했다." "아버지가 민보단장일때 군.경에게 소를 몇 마리씩이나 바치는 것을 목격한 아들의 증언도 있다"(437면 8행), "왠만한 젊은이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거의가 산에 올랐는데 산에도 못간 채 집 부근에 토굴을 파 하루하루 숨어 지내던 사람들은 대대본부에 자수했다가 희생된 것이다"(438면 15행)

  위 저서에 의해서 밝혀진 것은 북촌리 주민들(다른 마을 주민들도 대동소이하다)중 희생자들은, 추의원의 주장과는 달리, 무고하게 사살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공산 빨치산(무장유격대)에 가담하거나 그 작전에 협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추의원의 주장과는 달리, 북촌리를 위시하여 다른 마을에 이르기까지 그 "희생자"들은 "양민"이 아니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의원이 소리높여 외치고 있는 제주양민대량학살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추의원은 "대량양민학살"을 외치면서 "희생자들의 원통함을 알길 없는 표선백사장에는 오늘도 무심한 갈매기만 날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제주의 대명사격인 정방폭포 그러나 시원스레 떨어지는 정방폭포의 물살아래에는 아직도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한 원혼들이 폭포살을 맞으며 시신을 부대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외면하도록 배워온 우리는 무심하게도 그 원혼들 앞에서 여행 기념사진을 찍습니다"라고 읊조립니다.

  그러나 예술이나 문학은 진실을 동반할 때 아름답고 호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독선과 허위위에 세워진 예술이나 문학은 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문학도 될 수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다가 산화한 애국선렬들의 원통함을 알 길 없는 표선백사장에는 오늘도 분개한 갈매기만 날고 있습니다.  정방폭포의 물살아래는 아직도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한 순국 군.경 선렬들이 폭포살을 맞고 있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국회의원의 왜곡된 연설만을 듣고 있어야 합니까?

  1957. 4. 3자 제주신보 보도와 1988. 7월호 현대공론기사를 종합하면 4.3 사태로 인한 전체 인명피해는 27,719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중 무장유격대 피사살자는 7,893명, 무장유격대 동조자 피사살자는 15,600명, 우익인사 피살자는 4,200명, 무장유격대에 의한 피참살자는 1,300명, 경찰관 순직자는 120명, 국군전사자는 150-200명입니다. 위 피해자중 우익인사 피살자 4,200명, 무장유격대에 의한 피참살자 1,300명, 경찰관 순직자 120명, 군군전사자 150-200명을 "군.경에 의해 무차별학살된 양민"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장유격대 동조추정자로 분류되는 피살자 15,600명을 모두 "양민"으로 볼 수 없다는 것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명백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추의원의, 군.경에 의한 양민무차별 살상론은 설 자리를 잃어버릴 수밖에 길이 없습니다.

6. 제주 4.3 계엄령의 합법성에 관하여
  추의원은 4.3.사건 당시 제주도에 선포된 계엄령은 불법한 것이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추의원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봅니다."1948년 11월 17일 대통령령 제 31호로 발표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은 계엄령의 근거가 되는 계엄법이 존재하기도 전에 선포된 것이었습니다. 계엄법이 계엄령 선포후 무려 1년뒤인 1949년 11월 24일에 제정되었기 때문이니다"

  요컨대 제주 4.3사태는 불법한 계엄령으로 제주도양민을 대량학살한 사건이라는 것이 추의원의 주장입니다. 추의원의 4.3.사태계엄령위헌론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국방부장관은, 1998. 8. 1, 제주도 4.3사태 진압을 위해 선포된 계엄령의합법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유권해석을 내렸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 7. 17 제정공포되었고 계엄법은 1949. 11. 24. 제정되었으며 1948.4.3 발생한 제주도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1948. 11.17 제주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된 바 있습니다.

  당시의 계엄령은 제헌헌법 제 64조가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계엄권의 근거를 두었고 신법이 제정될 때까지 잠정조치로서 동 헌 제 100조에 의하여 일본 계엄법이 계속 유효한 상태에서 위 일본 계엄법의 규정에 따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령 제 13호로 선포된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법제처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의 터위에서만 존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엄업무의 주무관청인 국방부장관과 법률에 대한유권해석기관인 법제처가 4.3사태관련 계엄령의 합헌성에 관해서 확실하고 명백한 유권해석을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다른 개인의 주관적견해를 내세워 그것을 불법계엄령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비단 제 1심법원의 것이기는 하나 위 계엄령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사법부의 판단도 있습니다(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97가합 15722호).

  이제 추의원은 법조인 정치가로서 책임있는 답변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4.3 사태계엄령이 위헌이라는 법이론을 고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추의원의, "설령 합법적 계엄령이라 하더라도 저항능력이 없는 어린이, 노인, 부녀자까지 무차별 학살하고 재산을 소훼시킨 것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설명은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법률의 세계에는 "합법"과 "불법"만이 존재합니다. "불법과 설령 합법"이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적법한 계엄령으로도 "양민을 무차별학살"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그런 상식론을 가지고 제주 4.3 계엄령의 합헌여부에 관한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만드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의원은 적법한 계엄령의 집행과정에 불법행위가 개재하게 되면 그 계업령자체가 불법한 것으로 변질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해야 옳을 것입니다.

7. 역사교과서의 왜곡여부에 관하여

  추의원은 제주 4.3사태에 관한 고교교과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국내외의 학술논문과 연구성과물들은 "제주 4.3"과 공산당 당시 남로당 중앙당과의 연계는 희박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여 현재 사용중인 고등학교국사교과서는 "제주도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폭동..."이라며 제주 4.3 발발원인을 단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희생자들이 마치 공산주의와 연계가 깊은 것처럼 오해받을 소지도 있습니다"추의원의 위 주장과 관련하여 세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1) "국내외의 학술논문과 연구성과물들"중에는 "제주 4.3 과 공산당과이 연계"는 확실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 적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계가 희박하다"는 자료들만은 믿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대중대통령께서도 제주 4.3 사태의 주동자들이 격렬한 남로당계열의 공산당원들이었다고 하는 점을 인정하였습니다. 추의원은 혹시 제주 4.3 사태와 "남로당 중앙당"과의 연계가 희박"했다는 뜻으로 위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남로당중앙당은 제주 4.3사태를 반대하거나 방치한 것입니까? 제주 4.3사태가 당시 대한민국의 5.10총선을 방해하고 나아가서는 제주도에 한반도 무력통일을 한 군사기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불요증사실입니다(이유후술). 추의원의, 뚱딴지 같은, 남로당 "제주 4.3 사태 무관론"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나온 것입니까?

2) 추의원은 국사편찬위원회 편찬 고등학교 국사교과서가 "제주도 4.3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무장폭동"으로 "단정"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추의원의 "단정"은 옳은 것이고 국사편찬위원회의 "단정"은 잘못된 것이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추의원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증거와 자료검토를 거치지 아니하거나 잘못된 자료를 토대로 위와 같은 단정을 내렸다고 봅니까?

3) 추의원은 "제주 4.3 사태 희생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자와 연계가 깊은 것으로 오해받게" 하여서는 안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추의원은, "제주 4.3 사태희생자들은, 한사람도, 공산주의자와 깊은 연계를 가진 일이 없다"는 뜻으로 위의 주장을 편 것입니까? 만약 4.3 희생자중에 공산주의 폭력행사와 관련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모든 희생자"를 똑같은 "희생자"로 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내용후술) "희생자"중에 "진짜 희생자"와 "사이비 희생자"가 섞여 있다고 하면 이에 대한 옥석의 구별은 개별적인 선별구제절차에 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검증을 거치지 아니한 "희생자"론은 무책임하고 위험한 발상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보지 아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한 추의원의 견해르 듣고 싶습니다.

8. 제주 4.3 사태와 미국의 책임에 관하여  
  추의원은 4.3 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사건의 발생과 전개가 미군정시기에 이루어진 것인 이상 사건
초기 미군정 당국에게 책임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추의원이 이 사건 대정부질문초두에서 지적한 바, "노근리 무차별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미군책임론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무차별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4.3사태에 관해서 추의원이 추궁하는 "미군책임"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미군정체제하의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미국이 이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러한 결과의 발생을 방지하지 못했다고 하는 점에 대한 행정상 또는 민사상의 과실책임을 말하는 것입니까? 추의원은 4.3사태에 대한 사실확정과 법률적평가도 하기 전에 미국의 책임부터 운위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가하지 않습니까? 미국은 지금까지 6.25 전쟁의 공동참여자로서 우리와 혈맹의 관계를 다져왔을 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칙을 함께 지켜나가야 할 협력자입니다. 우리가 미국에 대해서 비굴해서는 안되지만 도발적이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추의원에 대해서 정치인으로서 무게있는 처신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9. 제주 4.3 사태와 창작활동의 관계에 대하여
  추의원은 제주 4.3 사태를 창작활동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금지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추의원의 주장을 옮겨봅니다. "분단상황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한반도의 냉전체제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적 구도속에서 반공이 우리 국민의 의식구조를 절대적으로지배하는 사고로 되고 "제주 4.3"을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의 소재로 삼는 것조차 단죄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추의원은 제주 4.3사태를 창작활동의 소재로 삼았다가 단죄되었던 작품으로서 한기영씨의 "순이삼촌","해룡이야기", 서준식씨의 "레드헌트"등을 들고 있습니다.추의원은 레드헌트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반포죄로 기소되었다가 (다행히) 국민의 정부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추의원께 우선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추의원은 레드헌트 영화상영자에 대해서 "국민의 정부"가 무죄를 선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위 사건에 대해서 무죄선고를 한 사람은 "국민의 정부"가 아니고 "국민의 정부시대의 법관"입니다. 이것은 형식논리가 아닙니다. 추의원의 뇌리에는 "국민의 정부"가 판결선고의 주체인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민정부"도 못하던 무죄선고를, 장하게도, "국민의 정부"는 해내었다는 주장입니다.그렇다면 추의원은, 온 세상이 아무리 "사법부의 독립"이나 "양심과 법률에 따른 법관의 심판"을 떠들더라도, 결국 법관은 "정부"와 "정권"의 지시에 따라서 재판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추의원 자신도 10년간 법관생활을 하는 동안 "군사정부"와 "문민정부"의 지시에 따라서 재판을 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법관"이 "정부"의 지시를 따라서 재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자탄하는 소리를 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행히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법관"이 "정부"의 강압에서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무죄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하면 무엇 때문에 사법부의 예속을 자탄하고 있습니까? 국민의 정부도, 시간이 흐르면 사법부의 구속에 대한 유혹에 빠질까 염려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정부"는 단임제를 실행하기 때문에 이후의 정권에 대한 견제를 위해서 위 제도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추의원은 과거의 정권이 제주 4.3 사태를 소재로 한 모든 창작활동을 "단죄"하였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제주 4.3 사태를 소재로 한 창작활동중 "단죄"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까?

  제주 4.3사태를 소재한 한 작품은 공산폭력을 미화하고 국가권력을 비방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불문에 부쳐야만 한다는 것이 추의원의 주장입니까? 작품에 대한 평가는 평가자의 주관적가치관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관해서는 법원이 사법적 판단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추의원은, 법관의 판단 자체를 믿을 수 없으므로 제주 4.3 사태에 관해선 아예 문제를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10년의 법관경험을 가진 추의원의 결론이자 확신입니까?

10. 대만의 2.28사건과 제주 4.3 사태의 동질성여부에 대하여
  추의원은 대만 2.28 사건과 제주 4.3사태의 성격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2.28 사건에 대한 대만정부의 해법을 한국정부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주장을 옮겨봅니다. "장개석 정권이 저지른 대만원주민 무차별대학살사건을 사건 발생 45년이 지나 해법을 찾은 대만의 예입니다.

  대만 2.28 학살사건은 47년에 발생하여 희생자가 2만명이 넘었고 가해자측에서 "공산폭동"으로 몰아 40여년간 사건관련논의를 금지했다는 점에서 제주 4.3사건과 매우 흡사합니다. 1947년 당시 장개석정권은 약탈에 대한 원주민의 저항으로 빚어진 2.28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대만정부는 사건 50주년인 97년 과거정권의 잘못에 대해 정부의 공식사과를 발표하고 2.28 기념탑과 기념관을 건립했습니다".

  한국정부는, 대만정부가 한 것처럼, 제주 4.3사태에서의 양민대량학살에 대해서 "선언적 사과"를 하고 "제주 4.3 희생자합동위령제"의 거행과 "제주 4.3 평화공원"의 조성, "제주 4.3 사태 진상규명위원회"의 구성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 추의원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대만 2.28사건과 제주 4.3사태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건들입니다. 추의원이, 성격을 달리하는 두 사건을, 동일한 성격의 사건으로 보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추의원의 이러한 잘못이, 편견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착오로 인한 것이지, 알고 싶습니다. 4.3사태에 대하여 추의원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제민일보" 편저 "4.3은 말한다" 제 4권 445면이하에 적혀있는 "대만 2.28 대학살진상--제주 4.3의 거울"을 보면 그 사건 당시 대만 원주민들은, 무기하나 들지 않는 맨손으로 본토출신의 이재민들의 억압에 항의하다가 대량학살을 당했습니다. 위 저서중 해당부분을 옮겨 봅니다.

  "대만인 앞에 나타난 장개석 정권의 본토인 지배자들은 1년도 못 가서 섬 주민의 원수로 화했다. 본토에서 온 권력자들은 일본인이 놓고 간 공장. 가옥.회사등 재산을 원주민들에게서 빼앗아 사유화하고 착복했다. 일본이 남기고 간 "국유화"된 원자재, 가공품, 농산물은 파렴치한 국민당 정부.군 요인과 그들의 앞잡이 상인들에 의해서 빼앗기고 탕진되거나 밀수행위로 본토에 반출되었다...본토에서 쳐들어온 자들이 장악하고 운영하는 기업들에는 20억원 (대만 元)의 정부지원이 융자됐는데 대만인의 그것에는 모두 8백만원 밖에 제공되지 않았다. 대만주민의 경제생활은 졸지에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447면) "대만인들의 원한은 안으로 안으로 곪아 들어갔다. 조그마한 계기만 있으면 거대한 불을 뿜을 모든 조건이 갖춰진 상태였다.

  1947년 2월 27일 밤 극우 반공주의 장개석정권의 야만성으로 전세계를 놀라게 한 그리고 분노케 한 2.28사건은 작은 일로 시작됐다. 이날 밤 무장한 일단의 전매청 관리들과 사복경찰보조원들이 한 여자 노점 담배장수를 덮쳐 탈세품이라는 이유로 몇 푼어치 안되는 사제담배와 담배값을 몰수하였다. 그 아낙네와 두 어린 자식이 이에 항의하자 전매청원은 여자를 매질하였다. 폭행을 당한 담배장수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격분한 주민들이 항의하자 장 정권의 말단관리는 총기를 난사하여 그 중 한 사람을 죽이고 경찰서로 도망쳤다. 격분한 대만 원주민들이 경찰서를 포위하여 범인의 인도를 요구하자 헌병대가 긴급출동하여 그들을 구출해 나갔다.

  군중은 일체 폭력을 쓰지 않고 헤어졌다... 다음날인 2월 28일 아침 더 많은대만주민이 그 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행진을 시작하여 장개석 정권의 배후자인 미국영사관 앞을 지나 전매청으로 향했다. 그들은 무장한 전매청 직원과 깡패 청년단원들의 폭행에 항의하고 책임자의 처벌과 전매청장의 사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시내를 행진해 가고 있는 동안 때마침 길가에서 원주민 노점상을 펴고 있는 두 사람의 전매청 직원과 맞닥뜨렸다. 두 사람은 격분한 원주민 데모대원들에 의해서 맞아 죽었다. 더욱 분노한 원주민들은 근처에 있는 수도(首都) 대복의 한 지청건물로 밀고 들어가 물건을 끌어내어 길 가운데 쌓아놓고 불질러 버렸다.

  본토인 직원들은 도주했고 원주민들은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성청으로 향했다. 그들은 여기서 행정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 때 건물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부군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군중속으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449면) "이 날의 현장을 목격한 미국정부 기관원의 공식보고서를 보면 원주민들은 본토인의 개인집이나 재산을 약탈하는 일은 서로 말리고 삼가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고 쓰여있다... 미국 국무성의 보고서에 의하면 대북시에서 이날 대만 원주민이 무기를 휴대했거나 무기를 사용했다는 한 건의 보고도 없었다고 한다"(450면)

  위 저서내용대로 2.28 당시 대만 원주민은 (1) 무기를 사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2) 본토인 개인에 대한 약탈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3) 공산당의 지시나 개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주 4.3 사태는 이 세가지 점에서 2.28사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추의원이 인정하고 있는 "무장유격대"는 군대조직에 버금가는 조직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 그들은 제주도민들에 대한 약탈을 수없이 자행했습니다.

  이것은 그 많은 재산유격대원들이 7년동안 무엇을 먹고 살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금방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재산유격대가 "약탈"을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제주도민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이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장폭도들에게 협조한 제주도민들은 선량한 양민이 될 수 없습니다. (3) 제주 4.3 사태는 분명히 공산당원들이 주동한 체제전복폭동입니다. 이와 같이 제주 4.3 사태와 대만 2.28사건은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논리를 전개하면서 이 양사건을 동질화하려는 추의원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11. 맺음말
  헌변은 추의원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를 지키기 위한 사명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강한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의원은 헌변의 이 문제제기에 대해서 전혀 동의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려와 확신을 가지고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유민주주의와시장경제원리는 그 제도의 우수성때문에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목숨을 걸고 지키는 곳에서만 열매를 맺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이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헌법중에서, 가장 자유민주주의적인 헌법이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을 제기할 사람이 없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 국민들은 그들 헌법의 뛰어난 자유민주주의 정신때문에 그 제도는 저절로 지켜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훌륭한 자유민주주의 헌법체제속에서 인류역사상 최악의 나치스독재체제가 싹트고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 국민들은 안일과 태만속에 살다가 어느날 아침잠에서 깨어보니 그들의 산과 들에서는 Hakenkreuz(나치스의 철십자)가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헌변"은 추의원의 자유민주주의론과 제주 4.3사태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힘드시더라도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회의원은 국민과 유권자가 의문을 품고 있는 점에 대해서 석명하고 설득해야 할 최소한도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추의원께서 정당한 이유없이 우리 헌변이 제기한 문제점에 대해서 해명이나 입장표명을 해태하는 때에는 부득이 추의원의 "제주 4.3 사태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직접 국민들께 표명할 것입니다. 이것은 추의원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기위한 선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헌법에 의하여 향유하고 있는 "알 권리"의 표명입니다.
  감사합니다. 늘 안녕하시기 바랍니다.

1999. 12. 21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회     장       정      기      승
[ 2003-12-23, 12:24 ] 조회수 : 1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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