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환경주의자』
이상돈
브레인북스 (446쪽)
임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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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역사에 대하여 저지르는 잘못
헌변
 

  시민단체들이 일부 정치인들을 무자격자로 낙인 찍어 낙선운동을 펼치는 것에 대해 3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것 같은 후련함을 많은 국민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정치권 일부에서 선거 때마다 무엇 좀 바꾸어 보자고 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번에는 무엇인가 달라질 것 같은기대를 가진 국민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이 아니라, 직업 정치인이 아닌 사람들이 정치인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변화이기 때문에 더욱 실현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보면서 감정적으로는 후련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우려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지금 그 운동이 추진되는 방법과 방향이 민주주의의 기본질서와 맞지 않기 때문이고, 그 운동의 비 전문성과 순수성이 오히려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도 분명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고, 사실 이들이 들고일어난 것도 지금의 우리 정치가 민주주의의 이상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부인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절차의 정당성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질서는 절차의 정당성(due process)이다. 이 원리가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는 한 시민의 기본권이 제도나 다수의 힘에 의해 유린될 때, 나를 포함한 사회의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유린의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당연한 논리 때문이다. 열 명의 도둑을 놓쳐도 한사람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을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가 보호받기 위한 것이다.

  감옥에 가보니 억울한 사람들이 참 많더라는 김태정 전 법무장관의 말은 바로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했던 박주선 전 법무비서관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자업자득이다. 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을 때 절차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억울한 사람을 만들게 되고, 언젠가는 자기 자신도 억울하게 희생될 수 있다는 지혜를 진작에 터득했어야 했다.  과거에도 인민재판 식으로 여론 몰이를 통해 정당한 절차를 무시하고 국민정서에 호소해서 미운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특정세력을 거세한 경우가 있었다. 과거에 몇 번 있었던 정치활동금지 조치가 그런 예이고, 또 최근에도 문제가 된 일이지만 국민감정과 정치외풍 때문에 사법기관이 절차와 결과의 공정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여론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경우가 그것이다.

  그럴 때마다 언론과 국민들은 그런 몰매를 주고 난 뒤 후련하다고 느꼈지만, 그 과정에서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때 그런 일을 앞장서서 하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나중에 바로 그 여론 몰이에 의해 다시 밀려나는 일을 많이 보았다. 정치활동금지법을 만들어 남들의 기본권을 박해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새로운 세력에 의해 다시 정치활동금지를 당하고, 전직대통령을 여론몰이로 사법처리한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에 의해 다시 똑 같은 여론 몰이로 사법 처리되고 하는 일이 왜 반복되는가. 이것은 우리사회가 집단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절차적 정의를 무시한데서부터 나오는 악순환이다. 마찬가지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도 지금은 여론이 그들 편에 있다고 해서, 절차적 정당성이나 법치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반개혁적 저항세력으로 보일지 모르나, 여론이 뒤바뀌는 날,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도 여론에 의해 짓밟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짜와 진짜가 반드시 뒤섞일 것이다

  그러나, 절차적 정당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정당한 절차 없이 단죄할 경우 파렴치범까지도 억울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표된 각종 명단에도 누가 보아도 공감이 가는 이름도 있지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하니까, 억울하다고 주장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까지 억울하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절차가 정당하지 않으면 누구도 유죄를 자인하지 않는 것이다. 결과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정당한 절차는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정치개혁을 하고 부정부패를 추방하자는 것은 우리사회의 안정과 통합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어느 사회든지 안정과 응집력을 유지하려면 공감하고 뭉쳐야 하는 기본이념과 지키고자 하는 기본가치가 있어야 한다. 우리사회를 유지하고 지키는 기본가치 체계는 바로 민주주의 질서이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무시하는 것은 바로 민주질서의 파괴를 원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뿐이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개혁이 너무 중요한 것이고 또 반드시 성공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과정은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것이 되어야 한다.

  순수한 동기와 뜨거운 열정 만가지고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4.19의 순수함이 5.16으로 이어졌고, 6월 항쟁의 열정이 노태우 정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번 시민단체의 주관적 잣대에 의한 무자격 정치인 선정발표와 여론몰이식 정치문제 개입은 우리사회가 민주주의적 절차와 원리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가치체계를 유지발전 시킬 능력이 있는가를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번에 아직 우리사회는 민주주의 원칙과 질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신념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와 절차를 무시하면서 이룬 정치개혁이 어떻게 민주정치가 될 수 있겠는가. ♠ 김종석 (홍익대 교수)

  [이 글은 헌변의 공식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 2003-12-23, 13:42 ] 조회수 : 15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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